나는 미용사가 아니라 당신 아내라고!
갓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엄마는 내게 종종 말했다. 내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면 좋겠다고. 성적이 그리 나쁜 편도 아니었고, 심지어 강요하지 않아도 공부에 흥미를 보이는데도 딸인 내게 항상 ‘공부만큼 쓸 데 없는 게 없다’는 말을 많이 했다. 엄마는 실제로 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도 끔찍이 싫어했다. 밤 10시 넘도록 책을 펼치고 있으면 화들짝 놀라며 방에 들어와 불을 휙 꺼버리곤 내게 잠을 청했을 정도였다. 시험 기간에도, 밀린 숙제가 있는 날에도 예외는 없었다.
“어설프게 공부해봤자 반거충이밖에 더 돼? 그러지 말고 상고 다니며 미용 기술을 배우라니까!”
엄마는 미용사다. 외삼촌은 이발사이고, 큰 이모와 작은 이모, 넷째 이모와 다섯째 이모까지 외갓집 식구들은 막내 이모를 제외하곤 모두 미용 기술을 익혔다. 외삼촌은 미용사인 외숙모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삼 남매 중 큰 언니와 둘째 언니가 그 뒤를 이어 미용사가 되었다. 외갓집은 그야말로 미용사 집안을 이루었다. 현역으로 남은 인물은 진작 환갑을 넘은 엄마와 위로 열 살 가까이 터울이 지는 외삼촌 둘 뿐이지만 말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엄마도 내심 딸이 미용사가 되길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엄마 말을 빌리자면 미용사란 직업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더 빛이 난다고 했다. 특히 기술을 완벽히 익혀서 개업을 하면, 아이에게 맞춰 시간을 유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 그만한 직업이 또 있겠냐는 거였다. 공부를 아주 잘해서 사 자 돌림의 직업을 얻을 게 아니라면 ‘기술’밖에 믿을 게 없다는 말을 나는 꽤 오랫동안 들으며 컸다.
그래서인지 나는 엄마가 말리는 길이 더 궁금했다. 공부로 1등까지 할 정도의 실력은 못 됐어도, 뭐라도 되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제대로 칼을 뽑지도 않았는데, 중학교 3학년 1학기 때 이런 말을 했다.
“그래,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 가라. 너는 네 머리도 제대로 못 만져서 미용은 안 되겠어.”
그랬다. 나는 애석하게도 꾸미는 데 소질이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아직 어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졸업했으니, 점점 더 멋에 눈을 뜨고, 아침마다 산발인 제 머리도 드라이어로 조금씩 손보며 등교하게 될 거라고 기대 아닌 기대를 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산발인 머리를 간수하지 못해 싹둑 잘라버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짧은 쇼트커트와 단발 사이를 오가며 긴 생머리조차 구사하지 못했다.
이런 내게 자신의 머리털을 겁 없이 맡기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남편이다. 남편은 신혼 초, 이제는 미용실 가는 비용을 아끼겠다며 어느 날, 바리캉을 사 가지고 왔다. 다행히도 이 의욕은 오래가지 못했고, 나에게 특별히 괴로움을 안겨주지도 않았다.
“이걸로 머리 두 번만 깎아도 본전은 다 하는 거라니까?”
남편은 뭔가를 살 때 항상 가성비를 운운한다. 5만 원도 안 하는 저렴한 제품이었는데, 본전이 생각났는지 정말 딱 두 번 썼다. 사 왔을 때 한 번, 중고로 처분하기 직전에 한 번. 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용하고는 옷장 깊숙한 곳에 고이 모셔뒀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사용했다. 그때 나는 남편의 머리를 다듬으며 참을 인(忍) 자를 여러 번 새겼다. 진짜로 주먹이 울었다.
“나 이 사진처럼 깎아 줘. 가운데 부분 각도를 잘 살려야 해!”
남편은 빅뱅 멤버 태양의 사진을 내밀었다. 모히칸 헤어스타일이라고 했다. 삭발이면 삭발이지, 가운데 머리칼은 왜 남겨두는 건지. 게다가 각도. ‘이런 스타일리시한 스타일은 우리 엄마도 못할 것 같은데?’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를 받은 느낌이었다. 사진 속 태양의 가운데 머리는 위로 갈수록 길어지는 듯 보이기도 하면서, 뒤쪽에서 보면 또 절도 있는 각도가 멋있었다.
서걱서걱, 지잉- 지잉- 남편 머리 위로 이리저리 오가는 내 손은 꽤나 바빴지만, 그놈의 각도를 맞추느라 머리칼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남편 머리 위에 둥그스름하고 자그마한 언덕이 하나 생겼다. 급기야 부드러운 능선이 생겨버렸고, 더는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주춤주춤, 남편에게 거울을 보여줬다.
“… 아, 이게 뭐야~! 새집 올려놓은 것도 아니고.”
“아, 몰라! 그러게, 왜 그걸 나한테 하라 그래? 내가 미용사야? 미용사 딸이지?”
남편은 결국 삭발을 했다. 가까스로 가운데 머리를 남기긴 했지만, 내가 앞서서 다 잘라먹은 뒤라서 그다지 티는 나지 않았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으니, 다시 내게 머리를 부탁할 일은 없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법. 나는 교토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남편의 머리를 손질했다.
일본에서 다시 또 바리캉을 사게 된 것은 미용실 서비스 가격 때문이었다. 한국보다 두세 배 정도로 비싼 커트 비용은 부모에게 손 벌릴 수도 없는 유학생 부부에게 부담으로만 다가왔다. 한두 달에 한 번씩은 꼭 미용실에 가던 나도(내가 내 머리는 못 만져도 남이 만져주는 건 또 엄청 좋아한다) 금액의 장벽을 이지기 못해 처음으로 등허리까지 머리를 길러냈을 정도였다.
“이번엔 좀 좋은 걸로 샀어. 한 번 머리 하러 갈 때 4천 엔 이상인데, 이걸로는 세 번만 잘라도 이득이야!”
그랬다. 기계는 대략 10~15만 원쯤 하는 제품으로, 기능도 다양했다. 가이드 빗(빗 모양으로 생긴 덮개를 바리캉 앞에 꽂아 몇 ㎜ 간격으로 자를지를 결정한다)이 두 개 들어있었고, 날 자체가 3단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커트용 가위와 숱 가위도 같이 사 와서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남편과 나는 머리를 자르는 날만 되면 싸웠다. 더는 모히칸 헤어스타일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당분간은 그보다 쉬운(내게는 전혀 쉽지 않았다) 투 블록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겠다고 했다. 우리 사이에 오가는 얘기는 늘 비슷했다. 남편은 양옆 길이를 맞춰 달라, 뒷머리가 너무 삐뚤빼뚤하다, 옴폭 들어간 부분은 왜 그런 거냐 등등 질문이 많았다. 내 능력 밖의 일을 기대하는 남편에게 그만 좀 하라고 성질을 내면서도, 계속 잘라주고 있는 내가 더 미웠다.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미용실 가면 안 돼? 차라리 맛있는 걸 만들어달라고 해~”
“… 알았어,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남편이 토라졌을 때 나오는 말이다. 정말 정말, 다시는 머리 같은 거 자르고 싶지 않아서 계속 뒤에다 대고 쫑알거렸다.
“나는 자라면서도 머리칼 흩날리는 걸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건 꼴도 보기 싫어. 오빠가 자른 머리칼이 화장실 하수구를 막고 있는 것도 진짜 짜증나. 자잘한 머리칼이 내 옷이나 양말에 박혀서 따끔거리는 것도 너무너무 싫어. 싫어, 싫어, 다 싫어!”
조금 과했나 싶어서 뒤늦게 좀 미안해했지만, 그 뒤로 내 역할이 확연히 줄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다. 남편은 머리 하는 날만 되면 욕실로 전신 거울과 벽걸이용 거울을 가지고 들어갔다. 두 개의 거울을 앞, 뒤로 배치하고도 보이지 않는 부분은 손잡이 거울로 이리저리 비추며 혼자서 머리를 다듬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이제 목덜미 부분과 구레나룻 뒤쪽만 신경 써 다듬으면 되었다.
소화 가능한 만큼의 역할을 부여받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이다. 묘한 성취감에 젖어서 으쓱한 기분마저 든다. 이런 식으로 남편은 열 번도 넘게, 거의 스무 번 가까이 이 바리캉으로 머리를 다듬었다. 본전 생각이 들지도 않을 만큼 너덜너덜하게 사용하고는 한국으로 돌아올 때 역시나 중고 물품으로 녀석을 처분했다.
“오빠, 한국 가면 바리캉 안 살 거지? 이제 평생 사지 마, 그런 거!”
“응. 이제 블루클럽 가야지.”
한국에 오자마자 우리는 둘 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함에 하마터면 졸 뻔했다. 미용사의 가위질 소리가 귓가에 들려올 때면 나른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 안락함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남편을 떠올렸다.
‘정말 이상한 부분에서 절약 정신을 느끼는 남자야. 바리캉은 안 돼. 절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