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짝햇님 Mar 11. 2020

나도 꿈이 불확실했던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마찬가지

교토로의 유학이 결정되었을 때 나도 남편처럼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남편이 목공 기술을 1차 소망 리스트에 적었을 때, 나는 제빵 기술을 익힐 생각에 조금 들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요리학원에서 일하며 강사를 준비하던 1년의 기간 동안, 내 손목이나 체력이 몸을 쓰며 일을 해야 하는 요리 분야에 썩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깨달았지만, 그래도 뚝딱뚝딱 그럴싸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언제나 손에 닿지 않는 꿈과 같은 것이었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오빠의 영향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연년생인 오빠는 내게 자주 간식을 만들어줬다. 바쁜 엄마 아빠 대신 나를 챙겨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본인이 먹는 걸 좋아해서인지 알 수는 없다. 오빠는 방과 후 교실을 등록할 때 꽤 오랫동안 가정 실습을 택하곤 했다. 거기서 배워온 방식으로 내게 돈가스나 피자빵 토스트를 만들어줬고, 엄마 아빠의 귀가가 늦은 어느 늦은 밤엔 냉장고를 뒤지더니 버섯으로 탕수 버섯을 해줬다.

어린 내 눈에 오빠는 멋있었다. 오빠가 하는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고 속으로 ‘우리 오빠는 1등 신랑감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엄마는 설거지나 콩나물, 두부 등을 사 오는 심부름을 나에게만 시켰다. 그 바람에 오빠도 요리는 해줬지만 치우는 건 점점 나에게 미뤘다.

이상한 일이었다. 선생님은 분명 남녀는 평등하다고 했는데, 엄마는 차별을 일삼았다. 엄마는 내가 고분고분하지 않으며, 핑계가 많다고 종종 꾸짖었다. 오빠와 다투면 대든다고 나를 더 혼냈다. 그래서 나는 진부하지만 가끔 친엄마가 나를 데리러 오는, 누구나 한 번쯤은 할 법한 망측한 상상을 하곤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우연히 요리를 좋아하게 되어 중학교 때부터 이런저런 음식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진로를 잡아갔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식품영양학과와 조리학과 관련 학교를 주로 찾으며 꿈을 키웠다. 다소곳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이 되고자 주방에 섰던 건 아닌데, 엄마는 나를 응원했다. 대학 수업에서 요리 실습이라도 한 날에는 이제 내가 밥 굶을 일이 없으니 안심이라며 좋아했다.

엄마는 큰 시름을 놓았지만 사실 대학 시절, 나는 그리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꿈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방향성을 잃지 않고 한 길로 가리라는 법은 없었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동아리를 찾아 나섰다. 다른 동아리는 입회비가 있는 반면 대학 학보사 기자는 학회비도 없고 신문을 발행할 때마다 소정의 원고료를 준다는 말에 그곳 문을 두드렸다.

그곳에서 나는 지금껏 우물에서 지내느라 접하지 못했던 많은 정신과 마주했다. 대입을 위한 신문 읽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로 보고 싶어서 여러 매체를 뒤적였다. 도서관에 앉아 콤콤한 종이 냄새를 맡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고, 똑똑한 사람들을 보면 경이로움과 함께 묘한 질투를 느꼈다. 더 알고 싶다는 생각, 더 깊고 넓게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내내 나를 부대끼게 했다.

그때의 나는 ‘적당히’의 기준을 나를 중심으로 찾지 못했다. 걸핏하면 무리를 했고 그러다가 이내 속도를 놓쳤다. 잡고 싶은 것들은 많은데 모든 게 다 멀게만 느껴졌다. 결핍이나 우울의 감정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던 나는 애써 밝은 척을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 홍역 같은 시간들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대학원 시절, 좋아하던 고고학 교수님 방. 종이에 적힌 ‘때때로 시계를 보고 지금까지 해온 것에 자신을’이란 구절도 멋졌다.


그렇게 사색을 즐기는 동안 나는 엄마가 원하는 현모양처와 점점 멀어져 갔다. 감정과 사고란 참 이상하다. 어느 기점을 지나고 나면 뒤로 돌아가기 뭣해 머쓱하게 서 있다가 결국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처음부터 글을 쓰거나 다루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학보사 문을 두드린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대기업 영양사 면접에 용케 붙어 2주간 삼엄한 신입 연수를 받은 기억도 있다. 나는 학과에서도 알아주는 꼴통(?)이었고, 성적도 거의 뒤에서 머릿수를 헤아려야 할 정도로 바닥이었는데, 그런 내가 사유서를 제출하고 연수를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재미있었다. 기출문제만 풀어도 다 합격이라는 영양사 면허 시험에서 문제 1개 차이로 떨어진 게 바로 나였다. 사회는 냉정했고 나는 영양사 불합격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연수 시절 받은 직무 도서를 박스에 담아 회사로 보내야 했다.

그날 발에 불이 나도록 중랑천을 달리며 조금 눈물을 흘렸다. 좌절보다는 안심의 눈물이었다. 노력도 없이 다른 사람의 옷을 뺏어 입은 것 같던 기분이 사그라지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찾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졸업식이었다. 한동안 백수로 지낼 딸의 졸업을 앞두고 서울로 온 부모님. 제대로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엄마는 다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라 말했고, 나는 아빠도 당연히 같은 말을 할 줄 알았다. 한 번도 나를 사회로 나갈 청년으로 봐주지 않던 아빠는 “사회가 원래 그렇게 냉정한 것이다. 하고 싶은 거 있음 더 준비해보던가”라는 무미건조하면서도 내게 꼭 필요한 말을 던졌다.

혼란스럽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아빠는 오랜 관습과 지방 사람 특유의 인식 때문에 나를 조신하게 키워 시집보낼 생각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동안에는 내가 선택한 모든 길에 훈수를 두기 바빴던 사람이 내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보험왕인 아버지는 나를 보험회사 사무실에 앉히고 싶어 했다. 서울 본사에 근무한다는 누구누구 씨에게 원서를 제출하라며, 들어가기만 하면 연봉이 얼만 줄 아냐며 자주 윽박지르던 그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다니.

자주 어물쩍거리던 나는 앞으로 목소리에 더 힘을 싣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게 불확실했지만 나는 조금씩 바빠졌고 내게 맞는 것과 아닌 것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집중은 잘하지만 시간의 압박을 싫어한다, 전공 공부에 충실하지 못했지만 식문화 자체에 관심이 많다, 글을 가까이에 두는 일을 하고 싶다, 소위 말하는 스펙 쌓기 공부를 하기에 형편도 시간도 넉넉하지 않다… 이런 조건을 기준으로 현실을 거르다 보니 가장 적합한 게 눈에 보였다. 출판사 아르바이트. 그렇게 찾고 찾다가 결국 편집자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일은 고단했지만 기쁨은 늘 있었다. 열심을 알아주지 않는 타인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시간도 많았지만 노력을 쏟을 대상이 ‘책’이어서 견딜 수 있는 날들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7년 차가 되었을 때 위기가 찾아왔다. 베스트셀러 시장을 의식해 팔릴 만한 책만을 만들어야 하는 생리에 심한 거북함을 느꼈다. 나는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은데, 실용이나 비소설 분야의 책들은 수명이 짧았다. 금세 잊히는 책을 계속 만드는 직업에 환멸을 느꼈다. 내가 그 시절 했던 부류의 고민을 요즘 말로는 ‘지속 가능성’이라고 부르더라. 당시 내 마음이 딱 그랬던 것 같다. 내 인생에서도 그런 무언가를 다시 찾고 싶었다.

남편 핑계를 잔뜩 대고 유학길에 올랐지만 나 역시 사실 비슷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와 남편이 각자의 이름에 걸맞은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 무언가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얻은 게 있다면, 더는 시장이나 사회가 규정해준 틀 안으로 나를 밀어 넣지는 않았다.

교토에서 지낸 4년 동안 베스트셀러를 읽지 않은 것도 그런 얄팍한 의식 혹은 의지의 힘이었다. 그동안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적어두고 미루기만 했던 세계문학과 책장에 오랫동안 꽂혀 있었지만 반쯤 읽다 덮어뒀던 책들을 더 자주 읽었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이 궁금해져서 관련 인문사회학 도서도 여러 권 훑을 수 있었고, 강해서나 성경도 더 규칙적으로 읽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나를 알아갔다. 나는 규칙과 약속을 좋아했다. 기술보다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길이 더 흥미로웠고, 그런 생각의 변화로 대학원 입시를 준비한 것이기도 했다.

계획이 무색해진 일들도 많지만 나에 대해 깨달은 몇 가지 사실들로 인해 나는 다시 책을 만들게 되었다. 물론 늘 원하는 책을 만들고 기획할 수 없는 입장은 여전하지만, 오래 사랑받는 책을 만들고 기획하고 싶다는 원래의 소망을 되찾은 건 매우 기쁜 일이다.

“너희는 여행을 위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지팡이나 가방이나 식량이나 돈이나 여분의 옷을 가지고 가지 말아라”라는 성경 구절(누가복음)이 있다. 깔끔 꽤나 떠는 내가 그 계명을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자랐다. 하지만 그 말이 갖는 묘미를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더 자유롭기 위해서는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먼 얘기이지만 나는 이제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여전히 불확실한 꿈이다.

작가의 이전글 근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