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번 버스를 타고
사무실 불을 가장 마지막으로 끄고 나온 날은 몸에 남은 물기가 다 증발된 것처럼 목이 마르다. 곧 부서질 낙엽 같은 기분이 되어 터덜터덜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면 거기서부터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회사 근처 술집에서 들려오는 왁자한 웃음소리, 식당 자리를 차지하고 마주 앉은 이와 호탕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나 말고 모두 다 안녕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한없이 초라해지고 마는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얼굴들 많은데. 묻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 자주 삼키느라 목이 메는데.’
그럴 때면 조금 시간이 걸려도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스물넷,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서울 변두리에 산다. 버스는 늘 중심을 거쳐 외곽으로 향한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밤의 노래를 듣고 도시의 반짝임을 주워 담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았던 마음을 추스른다. 이런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까?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도심의 야경, 특히 한강을 건널 때 물에 비친 노란 불빛을 보고 있노라면 팍팍했던 마음이 한결 가뿐해진다. 까만 밤, 강에 비친 불빛이란 늘 은은한 법이고 굳세기보다는 자주 흔들리며 물 냄새를 낸다. 그러니 내 퇴근길도 항상 화창하고 화려할 필요는 없지.
버스로 하는 퇴근, 기분 전환에 도움을 주는 다른 요소도 몇 개 생겼다. 지하철에서는 멀미할 걱정이 없어 주로 책을 읽는데, 버스에서 독서는 불가능하다. 흔들리는 차체에서는 뭔가를 듣는 게 더 안정적이다. 나이 스물부터 듣던 고리타분한 음악을 재생하는 시간, 오디오클립으로 배우 김태리를 만나는 시간 등이 요즘 나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다 읽고 싶었지만 졸다가 덮고 말았던(혹은 읽었지만 이제는 내용이 가물가물한) 고전 소설을 한 여배우가 옹골진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면 나는 일인극을 바라보는 단 한 명의 관객이 된다. 다부진 낭독이 끝날 때쯤 내 안에는 몽글몽글한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일의 의미, 내 편에 선 사람들, 이유 없이 내게 찾아오는 행운과 호의 같은 것들. 부조리의 부조리는 결국 나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라서 가끔은 삶의 부조리가 나를 비켜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