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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햇님 Apr 23. 2022

가난의 풍요를 생각한다

수고하지 않고도 먹는 나날


계절에 따라 냉장고나 서늘한 발코니 공간에서 사라지지 않는 채소가 있다. 지난여름에는 열무와 머윗대가, 가을에는 단감이, 겨울에는 배추와 무(김치도), 대파가 그랬다. 올봄에는 시금치와 쪽파다. 시금치가 똑 떨어질 때를 어찌 알았는지 어르신들이 때마다 밭에서 따다 주신다. 날이 완전히 풀린 뒤로는 부추까지 추가되었다.

물질적인 요소가 자신을 설명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돈이 전부가 아닌 시대를, 아니 그런 경계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거저 주고 거저 받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이 작은 마을에서 나는 초반에 마지못해 이 재료들을 받았다. 어르신들이 주는 채소는 미취학 아이를 둔 3인 가족이 먹기엔 그 양이 대체로 많았다. 몇 번 거절도 해봤지만, 그런 게 통할 리 없다. 다음 날 재차 물으시거나 문 앞에 두고 가신다. 마음을 고쳐먹고 “네, 주세요!”라고 시원스레 말하기 시작한 지는 이제 겨우 반년쯤 된 것 같다. 이렇게 대답한 뒤로 나는 동네 어르신들이 어여삐 보는 새댁이 되었다.

방대한 채소가 담을 넘어(이제는 밭으로 부르실 때가  많다) 우리 집으로 들어올  나는 재빨리 손질할 준비를 한다.  털고 뿌리 다듬고 깨끗이 씻어 물기를   소분해 냉장고에 넣어야  재료들을 그나마 오래 보관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념무상으로 채소를 다듬다가 문득 가난의 풍요를 생각한다. 버는 돈이 반토막 났어도 이렇게 풍족할  있다니. 땡볕에서 수고하지 않고도  귀한 재료를 냉장고에 채울  있다니.

난생 처음으로 파 장아찌를 담가봤다. 맛, 성공적.



어른들이 우리 집에 전해주는 물건이 꼭 채소만 있는 건 아니다. 그들 손주가 가지고 놀다, 이제는 자라서 더는 사용하지 않는 낡은 자전거나 모터 달린 자동차도, 모래 놀이할 때 쓰던 작은 삽이나 바구니도 우리 아이 차지가 되었다. 세발자전거는 1년 가까이 열심히 타다가 이제는 키가 커서 조금 더 큰, 보조 바퀴가 달린 중고자전거를 하나 마련해줬다. 새 물건에 집착하지 않고, 낡은 장난감도 기뻐하며 받는 아이의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아이는 시골에서 자라며 할머니, 할아버지의 존재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자기가 깍듯이 인사만 해도 함박웃음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기분이 좋은 날은 걷다가 마주친 일면식도 없는 어르신에게 먼저 인사하며 알은척을 한다(귀여운 사투리는 덤). 물건이 주는 풍요 다음으로 아이의 정서에도 여러 감정과 색깔이 채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자주 가는 옆집 할머님네. 이날 시금치를 잔뜩 뜯어왔다.


여기서 살면 살수록 호젓한 시골과 적막함, 심심함 같은 것들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을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배도 타고 기차도 타야 닿을 수 있는 시골 마을로 먼 친척을 만나러 다닌 기억이 있다. 기단이 높은 터에 흙으로 지은 전형적인 옛집이었다. 우리가 돌아갈 때 밭에 있던 온갖 채소를 뽑아 담아주던 그 다정함이 요즘 새록새록 떠오른다.

시골에서 땅을 일구고 사는 어르신들은 때로는 고단하고 쓸쓸해 보이지만, 자연의 생리를 그대로 따르면서 살아온 데서 오는 단단함이 있다. 오랜 세월 농사지으며 손에 밴 굳은살처럼 몸과 마음에 익어버린 강함이 있다. 제대로 텃밭을 꾸리거나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그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나는 여전히 관찰자다. 자연이 내게 은밀히 말을 거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긴 해도, 그 순간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물론 때때로 탐험 수준으로 어르신들 밭에 놀러 가 어설프게 밭일을 하고 돌아오는 날도 있다. 하지만 어르신들에게 느껴지는 그 꼿꼿함과 영롱함의 비결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온종일 고개 숙이고 밭고랑 사이만을 오가며 땅과 대화하는 이분들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겨우내 조용하기만 하던 시골이 생기를 띠자 별별 것들이 다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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