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즐겨보는 유튜브 브이로그가 있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한국인 트럭 운전사의 일상을 보여주는 영상인데,몇 년 전 미국을 여행했던 기억들을 떠올려줘서 참 좋다.
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요즘, 함께 고속도로를 달리며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은 그야말로 대리만족을 시켜준다.한겨울에 폭설을 뚫고 힘겹게 달리는 트럭을 보다보면 멈추고 정체된 이 시간들을 잘 살아내야겠다는 다짐도 절로 스며든다.
한 때 난 트럭 운전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드넓은 들판을 양 옆에 끼고 고속도로를 달리고집에 돌아가서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단순명료한 삶. 길 위를 살아가는트럭운전사의 삶은 마른 나무껍데기처럼 거칠고, 그래서 더 자유로워 보였다.
영화 <인 디 아일>에 나오는 브루노도 통독되기 전 동독에 살 때까지만 해도, 트럭 운전사였다. 통일 후엔대형 마트의 좁은 통로를 지게차로 느리게 달리고 있지만, 광활한 도로를 달리던 야생성은 여전히 몸속에 유전자로 남아있다.
영화가 시작하자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푸른 도나우 강’이 흐르는 동 트기 전 어두운 마트는 마치 검은 강물이 느리게 부유하는 곳이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시간이다. 판매되기 전까지 마트의 수족관에 가둬둔 물고기들처럼, 혹은 유통기한이 지나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음식들처럼.
마트의 삶은 모든 것이 소비되는 삶이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그 무언가가 흐르지 못하고 굳어버리는 삶.결국은 잃어버리게 만드는 날마다 똑같은 일상들. 수습직원 크리스티안이 첫 근무 후 집에 돌아오며 느낀 이상한 시차감도 그에 연유한다.
마트 안에서의 생활은날마다 똑같이 소모되는 시간이다.
일이 끝나 마트 밖을 나가도 마트 안과 별반 다르지 않다.햇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마트의 공간을 벗어났지만,바깥세상 역시 날이 저물어 이미 깜깜해졌기 때문이다. 마치 고유한 이름 없이, 매대 위에 누워있는 똑같은 제품들같은 기분이다. 하루가 지났지만 여러 날이 지난 것만 같은 느낌. 어떤 하루였는지, 기억이 안 나서 손가락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의 시간들.
사진출처 daum
그 시간을 배경으로 크리스티안, 마리온, 브루노라는 세 인물이 영화에 등장한다. 소비되길 강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로움.소년원 출신과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상처를 서로 보듬어주려는 크리스티안과 마리온의 사랑. 고속도로를 달리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는 브루노의 죽음.
무엇보다도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영화에는 있다. 크리스티안이 마리온을 만날 때 들려오던 파도소리다.신기하게도 이 소리는 어둡고 차가운 마트라는 무대에서 이상한 소격효과를 발휘하곤 한다.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는 날마다 똑같은 삶( 그래서 내가 정말 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이 아닌, 또 다른 삶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는 것처럼 똑같이 영위하고 있는 이 일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거다.
크리스티안이 마리온이 일러준 대로 지게차의 포크를 천정 끝까지 올렸다가 천천히 내리자 들려온 다시 들려온 파도 소리는, ( 둘이 커피를 마시던 휴게실 벽 한쪽 면을 가득 채운 그림의 야자수 해변에서 튀어나온 듯한 파도 소리처럼) 크고 아주 싱싱했다. 오래전 내 마음속에 있던 트럭운전사라는 꿈처럼!
하루하루 해야 할 일만 바라보고, 또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신없이 달리느라 정작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파도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이제는 멈춰서서 귀 기울여보라고 말하는듯 했다.
영화 마지막에 크리스티안은 마리안에게, 이제, 파도 소리가 들린다고이야기한다. 그 장면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마트의 어둔 통로를 집어등처럼 빛내며 달리던 지게차처럼, 나도 발길 닿는 대로 떠나고 싶어졌으니까. 삶이 온통 불확실하고 불완전해 보여도 길 위에 살아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껴졌으니까.
그 길에자유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소셜 미디어에서 틈만 나면 훌쩍 여행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아니란 것도. 북미 대륙을 횡단하는 트럭운전사의 삶이 겉보기엔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 한겨울의 폭설을 전쟁처럼 뚫고 가야 하는 가장 리얼한 현실이 있던 것처럼말이다.
날마다 어둔 마트에 갇힌 채 꿈을 꾸던 크리스티안처럼, 나도 이제는 방에앉아 파도 소리에 귀기울인다. 날마다 벽돌을 쌓아 집을 짓듯 글을 쓴다.가끔은 집 뒤편으로 오롯이 난 길을 지나 작은 숲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리고 숲에서, 난 파도 소리를 닮은숲의 바람을 듣는다. 바람이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