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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Oct 16. 2024

위로가 필요한 시절



위로  
「명사」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


그의 뒷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몇 해 전 카메라를 둘러메고 수원화성을 돌고 있었다. 성곽을 따라 돌다가 화서문(아마 화서문이 맞을 거다. 그렇게 기억한다)에 이르렀고 늦봄의 오후 이른 더위 탓에 그늘이 필요했던 나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탄탄한 옹성과 성문을 감싼 두꺼운 성벽 위에 은폐하듯 납작 엎드린 팔작지붕 아래로 얼른 들어갔다. 그 옛날 물밀 듯 다가오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곳이겠지만 봄을 지워내고 밀려들어오는 뜨거운 햇볕의 진격을 이 요새에서 피하고 싶었다. 차가운 돌로 둘러 싸여있고 두꺼운 기와지붕이 낮게 드리워져 있어 화서문의 이 성루는 온 세상에 뿌리고 있는 햇볕을 완벽히 막아주었고, 성벽과 지붕의 좁은 사이로는 바람이 제법 빠르게 불어 땀을 식혀주기에 충분했다. 성루에는 평상처럼 마루가 깔려있었고 그곳에 털썩 주저앉아 더위를 식혔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성벽을 따라 걷기 위해서 밖에서 햇볕을 막아줄 유일한 무기인 모자를 다시 쓰고 일어났다. 들어온 입구 반대편으로 몸을 틀었는데 거기에 어르신 한 분이 내가 나가려는 입구 쪽으로 앉아 있었다. 분명 내가 들어올 때는 없었는데 어느 순간 그렇게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응당 흘렸어야 할 땀은 흔적도 없고 되려 얇지만 긴팔 소매를 가진 점퍼를 입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더위를 피하러 온 것은 아닌 듯해 보였다. 어쩌면 그는 늘 이 시간쯤 여기에 와 앉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 같은 뜨내기들이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는 익숙하다는 듯 반대쪽 출입구를 향해 앉아 그렇게 멍하니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깊은 내면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래서 그저 시시껄렁한 농지거리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햇살 찬란한 저 밖의 어디선가에서 이 어두침침하고 서늘한 곳에 있는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럴 때가 있다. 

그럴 때가 있다.

거센 풍랑이 내 삶에 휘몰아쳐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을 만큼 내 마음에 어지러이 떠다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 풍랑이 저만치 물러났을 때. 새삼 느껴지는 고요함과는 달리 여전히 마음은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어지러이 떠다니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 혼돈이 가라앉으며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아래로 아래로 침잠할 때. 그 깊은 심연 어딘가에서 내 마음이 아우성치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그 소리가 닿지 않는 것같이 느껴질 때. 그래서 시커먼 외로움과 무섭도록 대면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그리고 이곳과 달리 밝은 저 세계에서는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이 즐거워 보이는데 나만 이 짙푸른 고독감에 점점 더 물들어가고 있다고 느껴질 때. 끝끝내  모든 것이 다 지나고 빈 껍데기만 남아 이제는 삶의 의미조차 희미해져 간다고 느껴질 때. 이제는 작은 바람에도 이 가벼운 존재가 흩날릴 것만 같아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었으면 하는 아주 강한 소망이 가득 차오를 때……. 

그럴 때가 있다.

문득문득 그럴 때가 있다. 

점점 더 자주 그럴 때가 있다.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나만이 그런 생각을,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을 느끼는 수많은 이들 또한 한 번씩은 '그럴 때'를 느꼈을 게다. 어쩌면 어둡고 서늘한 그곳에서 누군갈 기다리는 그에게도 위로가 필요했을 수 있다. 그 또한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더 이상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는 없어 이제는 누군가의 힘을 얻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깨닫고 그저 묵묵히 앉아 누군가가 될 사람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회색빛을 넘어 이제는 점점 더 짙은 흑색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 너머 찬란히 밝은 세상 어딘가에서 그 빛을 함뿍 담은 누군가가 나타나 이 깊고 어두운 나의 세계까지 밝혀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 누군가의 위로 덕분에 봄빛처럼 아름답고 따뜻하게 번져나가는 내 마음의 온도를 느껴보고 싶은 게 아닐까.


다만! 필요한 이는 많은데 나눠줄 이는 적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또는 억울하게도, 무엇 때문인지 모를 어떤 이유 때문에 위로가 필요한 나는 누군가를 위로해줘야 하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분명한 것은 나만이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도 위로가 필요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먼저 다가와 자신을 위로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문제는 다른 이의 마음에 기대어 그 온기를 필요로 하는 이는 많은데 그렇게 먼저 다가와 나눠주는 이는 적다는 것이다.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나도 힘드니까, 나도 위로가 필요하니까, 남에게 마음을 나눠줄 여력이 이제 나에게는 거의 남아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의 힘듦으로 인해 다른 이의 힘듦을 애써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짙은 어둠에 나까지 더 무거워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그로 인해 나에게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괴로움 때문에 애써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한다. 나도 힘든데……


살기 힘든 시대이다.

세상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는데 어찌해서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는 걸까? 달래야 할 일도, 달래야 할 사람도 많아진 지금, 모두가 그렇게 점점 지쳐가고 있는 걸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일상은 아름답고 찬란하다. 그들의 마음까지 밝고 행복한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아름답고 찬란해 보이는 그들의 일상은 보는 이의 삶과 선명히 대조되며 자신의 삶을 더 초라하고 어둡게 만든다.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세상에서 스스로 초라해지고 외롭게 느끼게 되는 이유이다. 주변에 사람은 많으나 결정적 순간에는 사람이 없다. 군중 속의 고독이다. 


45년쯤 전에 가수 윤복희는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담담히 읊조리며 시작하는 그 노래의 첫 가사는 이렇다.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이런 사람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러나!

윤복희는 그 노래의 마지막에 다시 이렇게 읊조린다.

만약 내가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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