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시작되는 바로 그 주말이었다. 피로감이 급 몰려와 대충 소파에 누워 잠깐 눈을 붙여 낮잠을 자려했다. 그런데 낮잠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래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깨어보니 이미 긴긴 여름 한낮도 다 지나 밤이 되어 있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웬만해서는 내 체온의 변화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미련한 몸뚱이임에도 그날만큼은 열이 꽤나 차올랐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체온계는 39도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음을 깨달았다. 살면서 여지껏 겪어보지 못한 생경한 일이었다. 그간 아무리 여기저기가 아프고 다쳤어도 내 몸을 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병원에 가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내 몸을 어찌하지 못하니 병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병원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밤이었고, 날은 금요일이었다. 밤을 견디고 내일 병원을 찾는다 해도 어차피 주말이었다. 괜한 미련을 떨 필요가 없었다. 바로 가까운 종합병원의 응급실을 찾아갔다. 종합병원이기는 하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곳이라 응급실은 한산했다. 간호사의 간단한 문진을 마치고 코로나19 검사를 한 뒤 응급실 내부로 들어가 의사를 만났다.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었고 독감 검사를 또 했지만 그 역시 아니었다. 열은 여전했고 링거를 맞기 시작했다. 주사로 해열제도 투입했다.
괜히 서러웠다.
6개 남짓의 응급실 병상 중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 똑똑똑 떨어지는 링거를 멍하니 쳐다보게 되었다. 의도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병원 침대에 누워 의사의 처분과 간호사의 처치를 기다리고 수용해야 하는 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맥없이 끔뻑거리는 눈에 들어오는 작은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밖에는 없을 게다. 그렇게 10분, 20분 ... 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열이 생각보다 쉽게 떨어지지 않아 두 번째 해열제가 다시 링거액과 함께 투여되고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다가 문득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아프면 곧장 병원을 찾아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하면서도 서러웠다. 내 몸을 믿고 대충 약을 먹고 견디면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나이가 지나가고 있음이 처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 그냥, 괜히 서러웠다.
아프면 서럽다.
아프면 서러운 마음이 드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비슷한 서러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연휴가 시작되는 어느 날이었다. 고향을 떠나 홀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연휴 첫날에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아팠다. 열은 물론이고 식은땀과 오한이 번갈아 오가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갔다. 저녁이 지나 밤으로 가는 시간이 되자 이러다가 안되겠다 싶어 약국을 찾아 나섰다. 서울 신촌 한복판에 약국은 곳곳에 있었으나 연휴라 대부분 문을 닫았다. 한 시간 가까이를 헤맨 뒤 세브란스병원 근처에 있는 약국 하나를 겨우 찾았고 약을 샀다. 약사는 덤덤히 말했다. "꼭 식사를 하고 약을 먹어야 해요. 안그러면 위장에 탈이 날 수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아파 낑낑대느라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었다. 혼자 지내는 타향살이에 아프다고 밥 한 끼 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게다가 연휴라 문 닫은 식당은 많았고 이미 약국을 찾아다니느라 몸은 힘들었다. 신촌로터리 버거킹에서 햄버거 하나를 사들고 집으로 왔다. 오로지 약을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햄버거를 우걱우걱 씹고 있노라니 설움이 밀려들었다. 타지에서 혼자 살면 함부로 아파서도 안된다는 생각에 미치자 참으로 서러웠다.
비슷했지만 달랐다.
하지만 이번에 느껴졌던 것과는 분명 달랐다. 그때는 그래도 내가 나를 움직일 만했고 스스로 다시 몸을 추스를 만큼의 능력과 용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내 몸을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약간의 어이없음과 함께 상실감 비슷한 것이 나에게 스며들었다.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이 되어가는 느낌. 심지어 그것이 내 몸에서 느껴지는 것은 더욱 상심을 크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누군가를 지켜주거나 보호해 주는 능력보다는 다른 이들로부터 그런 보호를 받아야 하는 몸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는구나 싶은 느낌은 참으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만으로 40이 되었을 때 민방위도 끝나며 국방의 의무를 마치면서 느꼈던 '이제부터 나는 나라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 이 나라 젊은 친구들의 보호를 받는 사람으로 바뀌는구나.' 하는 느낌과 비슷하면서도 더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다.
사람이 아프게 되면, 나이가 들게 되면 제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지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 혼자 그런 일들을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되어지는 일도 아니다. 시간은 언제나 순방향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그걸 역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신체의 변화야 그렇다 치고 생각까지, 마음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저 순리대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도 생각과 마음이 건강하면 더 좋은 게 아닐까 싶다. 쓸데없이 서러워하며 마음까지 아프게 할 필요야 없지 않나. 하루하루의 시간이 내 몸에 누적이 되고 그만큼 내 몸의 사용기한은 점점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리인 것이고, 언제 다 채워질지 모르는 내 인생에 어떤 즐거움과 행복으로 채워나갈지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싶다. 괜한 우울감에 젖어 서러워하며 보낸 하루가 나중에 후회되지 않도록 말이다. 아프면 얼른 병원 가서 치료받고 약 잘 먹으며 회복할 생각, 그리고 그 뒤에 평소에 즐기던 내 삶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갈 생각을 하면 되겠다 싶다. 그러면 되려 몸도 빨리 회복하고 덜 아프지 않을까 싶다. 몸이 건강해지려면 내 마음이 먼저 더 건강해야 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이제는 내 몸도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듯하다. 내가 현생을 살아가기 위해 하늘에서 잠깐 빌린 몸이라 생각해야지. 그래야 사용기한이 다 되어가는 이 몸뚱아리를 더 잘 관리하고 보살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