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바람 Nov 06. 2024

사라졌으나 사라지지 않았다

뜻밖의 발견



책상을 바꾼다고요~?!

얼마 전 사무실 책상이랑 파티션을 바꾼다고 공지가 떴다. 게다가 사물함까지 사무실 집기 전체를 바꾼다는 것이었다. "책상을 바꾼다고요? 왜요? 뭐 하러? 뭐 고장 나고 그런 거 없는데?!" 괜한 짜증과 귀찮음이 밀려왔다. 아직은 쓸 만해 보이는데 굳이 왜 이걸 다 바꾸나 하는 생각도 있었었지만 그건 그저 명분에 가까운 소리였고, 솔직하게는 그렇게 리모델링을 하면 개인 사물을 싹 다 정리해서 박스에 보관했다가 다시 풀어 재배치야 하는 수고로움이 뒤따라야 했기에 그게 더 귀찮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내가 투덜대어 보아야 무슨 소용일까. 회사 차원에서 결정한 일이니 잠자코 짐이나 정리해서 박스에 넣어두는 수밖에. 이런 이유로 그동안 사물함에, 서랍 속에 갇혀서 1년에 한 번 햇빛조차 보기 힘들었던 물건들이 하나하나 책상 위로 올려졌고 제 주인과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끄집어 내놓고 보니 이미 버렸어야 할 것들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고 보니 이 기회에 이것들을 한 번 싹 정리해서 과감히 짐을 줄여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랍 속에 아주 소소한 물건들까지 하나하나 다 꺼내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맨 아래 서랍의 맨아래 바닥에 있던 서류박스를 저~엉말 오랜만에 꺼내어 열어 보았다.

 

뜻밖의 발견

오래된 서류 박스를 열자 그 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물건들이 하나둘 씩 십여 년만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우선 초창기 직장 생활 시절에 선배, 동료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이 튀어나왔다. 오랜 시간 사진에 취미를 갖고 있었던, 지금은 퇴직한 선배님이 찍어준 사진들이었다. 어두운 서랍 속에 오랜 시간 갇혀 있어서 그런지 빛도 바래지 않은 그 사진들 속에 내 모습도 있었다. "이 사람... 선배님 맞아요?"라는 후배의 너무나도 진지한 말에 옆에서 같이 짐을 싸던 선후배들이 모두 깔깔 대며 웃었다. 내가 봐도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진들 밑에서 더 오래된 물건들이 옛날의 그 빛깔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튀어나왔다. 예전에 쓰던 통장과 건강보험증이었다. 정말정말 뜻밖의 발견이었다. 사진들이야 서랍 깊숙한 곳에 잘 넣어 두었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서랍 속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물건들이었다. 통장을 열어보니 대학생 때부터 쓰던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찌 여전히 내 책상 서랍 속에 있었을까? 여기서 근무하게 되면서 시작된 귀차니즘이 물건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그 오랜 세월을 지나왔던 것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10년 전쯤에도 전면적인 사무실 리모델링이 있었다. 아마 그때에도 나는 저런 것들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서류 박스 채로 그냥 새로운 책상 서랍으로 옮겨 두었을 것이다. 다 끄집어내어 정리하기 귀찮았으므로! 그게 이제 와서야 툭하고 튀어나온 것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오랜만에 옛 감상에 젖어보는 추억 여행도 다녀오게 해주었다. 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것들이 다시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았었구나 하는 생각에 이런 맛 때문에 서랍정리를 하나보다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 어찌할까?

그런데  또 다른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물건들을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버릴까, 아니면 계속 보관해 볼까? 사진들이야 디지털로 보관하는 것보다는 인화된 것으로 보는 맛이 조금더 각별함이 있어 계속 보관하는 데에 별다른 고민이 없었지만, 통장과 건강보험증은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이미 사용도 끝나 정지된 통장들이고 더군다나 저 은행들은 IMF와 금융 위기 시절을 겪으면서 사라져 버린 은행들인데 그 통장들이 무슨 의미가 있어 보관하겠나 싶지만 이 뜻밖의 발견이 준 추억 여행의 달콤함이 머뭇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사라져 버린 줄만 알았던 옛 기억들을 되살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게 하는, 그래서 동시에 마음 한 편이 따뜻해져만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나중에 언젠가 또다시 느끼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러고 보니 …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요즘 사진이나 물건들을 정리해 보관해 두는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 영상을 많이 찍어 두는 것이 유행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중 언젠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했을 때, 그래서 몹시 그리워 몸서리쳐질 때, 그 영상들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며 위안도 얻고 추억도 떠올리며 그분을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은 예나 지금이나 있는 것이고 그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풀어내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당연히 달라지는 것이겠지. 그래서 지금은 스마트폰이라는 간단하고 유용한 도구를 통해 그리움과 추억을 고이 저장했다가 그리움이 사무치는 순간에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이겠지. 꽤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어떤 특별한 의지나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그저 내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는데 그렇게 되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뒤늦게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 이유를 명분으로 만들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다. 


그리움은 무게가 있다. 

그리움도 추억도 다 무게가 있다. 물리학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분명히 무언가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되면 마음의 무게감이 확연히 달라진다. 그리움의 정도가 짙을수록 그 무게는 더 무겁다. 그 무거움을 견디지 못할 때 그를 떠올려 회상에 젖게 되고 그러면서 제 마음을 달래게 된다. 그런데 그 무게는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이고 결국엔 점점 더 가벼워져 간다. 정말 놀랍게도 신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움은 쌓일 텐데 그러다 보면 사람이 견디기 힘들 만큼의 무게가 짓누르게 될 것이기에 신은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큰 선물을 준 것이다. 날이 갈수록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고 떠오르는 빈도를 줄여가며 궁극에는 완전히 잊히게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무게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겹지만, 결국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움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래야만 아직 현생에 남아있는 사람은 현실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은 그렇게 인간의 뇌를, 마음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현생에 더 충실하며 살라고!


추억은 마음에만 남겨두기로 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참으로 매정한 논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것처럼, 그렇게 떠나는 사람을 선연히 보내주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붙드는 것은 도리어 순리에 어긋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추억과 그리움은 그 물건을, 그 사진을, 그 영상과 목소리를 남기는 것과는 별개의 것일 수 있다. 아무리 잘 보관을 해놓은들 20년이 되도록 완전히 잊고 살면 보관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어쩌다 뜻밖에 발견되면 그저 한 번의 추억거리가 될 뿐이다. 결국 추억과 그리움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보관의 문제가 아니니까. 가장 큰 상처와 생채기가 마음에 남듯, 가장 큰 그리움과 추억도 마음에 남는 것이다. 무언가를 남기지 않아도 마음으로 간절히 떠올리면 보이고 들릴 있다고 믿는다. 

어느 순간 내가 생을 마무리하고 떠났을 남은 이들이 나를 추억하고 그리워해준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것도 시간이 오래도록 계속 그러고 있으면 도리어 내가 남은이들에게 미안해질 듯하다. 이제 그만 나는 서서히 잊고 남은이들은 그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 영위했으면 하는 바람이 강하게 같다. 남은이들에게 미련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 때가 되면 서서히 잊히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사진에 있는 저 통장과 건강보험증은 결국 정리를 했다. 그 어디에도 남겨두지 않았고 그저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만 추억으로 남겨두었다. 덕분에 소소한 미소를 얻게 되어 감사했다는 인사를 마음속으로 하고 떠나보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