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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sorim May 31. 2016

너와 나의 펌킨 수프.

_멜버른, 너에 의한, 나를 위한 소울 푸드.



소울 푸드.

내게 소울 푸드랄게 있을까? 어쩌면 너무 거창한 타이틀 인지도 몰랐다. 그 한 입, 한 모금, 한 그릇에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니. 그렇지만 삐딱한 시선을 조금 거두어내고, 제일 먼저 코 끝에 맴도는 을 머금은 음식을 하나 떠올려 본다.


펌킨 수프.


호박 수프라거나 호박죽이라고는 표현할 수 없을 듯하다. 내가 처음 그의 첫 숟갈을 떠낸 곳이 바로 호주였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집의 풍경.


나는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소녀 혹은 여인이 사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디서 나온 용기였을까. 서로의 엇갈린 일정으로 이사 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는 말 한마디 섞을 기회가 없었고, 언제나처럼 까아만 옷들을 걸친 그 오후의 너는 연필을 손에 쥐고 너의 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너의 방문에 나는 갑작스레 빼꼼 고개를 내밀었고 막 만들려던 '토마토 파스타를 일 인분 더 만들까?'라는 질문을 건넸다. 점심을 같이 먹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제안이었다. 나의 뽀모도로 파스타는 어느 이탈리안 가정의 메인 셰프에게서 배운 것이었으므로 요리에의 큰 걱정이나 부담은 없었다. 아, 한 가지. 너는 채식주의자였기 때문에 다진 소고기를 곁들여 '뽀모도로'를 한국에선 볼로네제로 더 유명한 '라구'로 바꿀 수가 없었다. 대신에 나는 가스레인지 옆 선반에 층층이 쌓인 처음 보는 향신료들을 이것저것 넣어보았던 듯하다.


그래서 우리의 첫 식사였던 토마토 파스타와 펌킨 수프가 무슨 상관이냐고?


너의 노오란 펌킨 수프는 바로 나의 토마토 파스타에 대한 보답이었다. 일주일쯤 지난 평온한 저녁이었다. 나는 아직 저녁을 먹지도, 요리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까이만 옷을 입은 까아만 곱슬머리의 너는 상냥한 미소를 띠고 내게 저녁을 차려주겠다고 말했다. 너는 호주인이었다. 내가 머물던 나라의 현지인이었다. 현지 가정식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일던 차였다. 너는 한참을 주방에서 달그락 거렸고 나에게 방에 가서 편하게 할 일을 하라며 멀뚱이 서있던 나의 등을 떠밀었다. 너의 걱정은 말고 편안하게 방에서 기다리라고 너는 말했다. 나는 기다렸고 기다렸다. 아마 두 시간은 더 지나서였을 것이다. 내 배가 아주, 몹시 고파 더 이상은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마침내 주린 배를 부여잡고 너의 달그락거림이 가득한 주방에 들어섰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너의 두 손은 약간은 짙은 빛을 띤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번갈아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별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별다를 거 없이 그렇게 반죽을 꾹꾹 눌러 뜨거운 오븐에 구워내기만 하면 빵이 된다고 했다.


너와 나의 주방.
너와 나의 라운지.


마침내 너와 나는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라운지의 푹 꺼진 소파로 가 앉았다. 움푹 들어간 오래된 라운지의 소파는 늘 그러하듯이 너와 나를 포옥 안아내었고, 우리의 무릎에는 한 그릇의 노오란 펌킨 수프와 그에 꽂힌 약간 그슬려 검은 부분이 있는 기다란 빵이 놓여있었다. 숟가락은 늘 제각각이었다. 너와 나의 숟가락은 하나는 정교한 양식 숟가락, 다른 하나는 요란한 장식이 있는 넙적한 디저트 숟가락쯤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래되어 빛바랜 은색 숟가락으로 노오란 펌킨 수프를 푹 떠내 입에 담았다. 눈이 번쩍할 만큼 놀라운 맛은 아니었던 듯하다. 감탄사를 연발할 만큼 엄청난 맛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포근한 맛이었다. '소울 푸드'라면, 그저 딱 그 정도. 더도 덜도 말고 딱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이따금 마주하는 '소울 푸드'라 하면, 나의 코 끝에는 그 오랜 시간 뭉근하게 끓여 푸근하게 물러진 호박 수프의 향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그 진득한 향이 코 끝에 살랑이는 것은, 그 노오란 빛깔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너의 요리였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든 요리, 따뜻한 포옹처럼 나를 무장해제시키던 요리, 마음이 포근해지고 싶은 날이면 셀 수 없이 많은 저녁 호박을 잘게 썰어내 뭉근하게 끓이던 요리.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 딱 그만큼 포근한 '펌킨 수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 딱 그만큼 나를 포근하게 녹아내리도록 만들었다. 마음이 시린 날이면 너와 함께 먹었던 그 '펌킨 수프'의 안락함으로, 나는 영혼의 안식을 구하곤 했다.



당신의 소울 푸드는 무엇인가요?


거창한 답은 필요치 않았다. 적당히 포근하거나 적당히 푸근하면 되었다. 소울 푸드란 단어를 듣는 바로 그 첫 순간에 힐끗 아른거리는 사소한 맛의 기억이면 되었다.


안녕, 먼 곳의 너.

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는 나의 손으로 한 솥의 펌킨 수프를 끓여주리라 다짐해본다. 또한 너만의 소울 푸드가, 지친 너의 영혼을 언제고 든든하게 지켜내 주기를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해본다.


어느 봄날의 펌킨 수프.


*채식 펌킨 수프 (2-3인분)

올리브 오일 2 TBSP

마늘 3쪽

작은 적양파 1/2 개 (갈색 양파나 샬롯으로 대체 가능)

당근 1/8개 (양파 양의 반 정도)

단호박 1/2통 (2컵 정도이나 넣고 싶은 만큼 넣으면 된다)

파프리카 파우더 1/2 TSP

칠리 파우더 1/2 TSP

강황 가루 1/2 TSP

넛맥 1/4 TSP

생 로즈마리 반 줌 (작은 가지 2개 정도) 혹은 말린 로즈마리 1/4 TSP

코코넛 밀크 200ml (1/2 캔)

물 200ml

대파 2마디와 코코넛 밀크 한 스푼

소금, 후추


-가지고 있다면 약간의 야채 스톡을 넣어준다.

-기호에 따라 설탕, 아가베 시럽, 메이플 시럽 등의 감미료를 넣을 수 있다.

-호박 대신 고구마를 넣거나 반반을 사용할 수도 있다.


1. 마늘은 슬라이스하고, 양파와 당근을 잘게 썬다. 단호박은 껍질을 벗겨 가로세로 2cm 정도로 깍둑썰기하거나 두께를 얇게 슬라이스한다. (익는데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 적당한 크기), 대파는 얇게 슬라이스해 둔다. (단, 껍질이 부드러운 단호박의 경우에는 껍질을 벗기지 않아도 된다.)

2. 먼저 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마늘을 넣어 약 불에 볶다가 양파를 넣고 중 불로 바꾸어 반쯤 투명해질 때까지 볶는다.

3. 잘게 썬 당근을 넣고 볶다가 당근이 반쯤 익으면 단호박을 넣어 오일이 골고루 묻도록 섞는다.

4. 파프리카 파우더, 칠리 파우더, 강황 가루, 넛맥을 넣고 골고루 섞어주고 코코넛 밀크와 물을 넣고 로즈마리를 넣어 끓인다.

5. 약한 불에 계속 끓이다 호박이 푹 익으면 매셔로 호박을 전부 으깨준다. (혹은 수프를 조금 식혀 믹서에 넣고 갈아도 된다.)

6. 전체 수프의 양이 반이 될 때까지 뚜껑을 열고 졸여서 끓인다.

7. 간에 맞춰 소금과 후추를 넣고 슬라이스한 대파를 얹는다. (남아있다면, 코코넛 밀크 한 스푼을 회오리 모양으로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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