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여행 후, 나의 머리맡에 내려앉은 감정들.
이따금 여행은 지독하게 나를 찾아온다.
어떤 때 보면, 여행이란 놈은 참으로 지독해서 때때로 나를 찾아온다. 집요한 빚쟁이처럼 나를 찾아온다. 몇 달이 지난 어느 오후, 일 년이 지난 어느 저녁, 심지어는 사 년이 지난 어느 새벽에 나를 찾아온다. 그의 빚을 갚기에의 나는 너무나 나약할 따름이고, 내 머리 속에 그 '희미한 기억의 끝자락'이 흐릿하게 나마 존재하는 한은. '여행이란 이름의 빚쟁이'는 경고도 없이 나를 찾아온다. 그에 대한 나의 채무를 갚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여행이란 놈의 이름을 나도 모르는 새 희미하게 내뱉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지독한 놈의 콧잔등을 살랑하고 내가 유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밤이면. 흐릿한 스탠드 불빛 아래 와인이나 혹은 맥주나 혹은 그 어떠한 술 한잔을 놓아두고 타다 남은 양초에 다시 한번 불을 붙여 빛을 밝히고 나면. 그 은은하게 촛불이 일렁이는 늦은 밤의 오래된 책상 앞에 앉으면. 나도 모르는 새의 나는, 그 지독한 것의 코 끝을 투욱 하고 치는 셈이 되었고 덕분에 코가 근질근질해진 '여행'이라는 놈은 에취 하고 재채기를 하듯 내가 미처 막아보기도 전에 덜컥 튀어나왔다. 아주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와 나의 머리맡에 다정스레 턱을 괴고 앉아 나를 빤하게 내려다보았다.
아, 어느 시린 겨울의 베를린이었다. 나는 베를린에 연고가 닿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친구랄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애틋한 류의 그런 인간관계는 되지 못했다. 나의 베를린 전부를 가득히 채워내어, 그 시리던 겨울의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줄 사람들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유 없는 오늘의 새벽, 나는 그 하얗던 베를린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나도 모르는 새 그 지독한 베를린의 어느 한 움큼이 슬며시 나의 창문 틈으로 숨어든 것이다. 물론 그 오래된 기억이란 놈과 나를 이어주는 몇 가지는 존재한다. 디지털이기에 빛바래 지는 못하지만, 오래되어진 기억과 함께 빛이 바랜 사진들과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담긴 그날의 음악들이다. 베를린의 음악이 나의 귀에 울려 퍼질 때이면, 나는 시계를 맨 흰 토끼를 쫓는 소녀 앨리스와 같이 무작정 따라 달려 나도 모르는 새 깊고 컴컴한 땅굴 속에 풍덩 빠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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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Phoebe Lou - Grey
아, 어느 여름의 파리였다. 나의 첫 번째 파리였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와, 그리고 함께한 나의 가장 소중한 이는 '파리' 그 자체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 년 전의 파리는, 아마도 그 모든 혼란스러운 혼돈들이 발생하기 전으로, 우리들의 한없이 자라나던 커어다란 환상을 꽉꽉 채워준 신비스럽고도 매혹적인 도시였다. 어느 빵집에 들어서든 쇼윈도 너머로 황홀하게 줄지어 늘어선 빵과 디저트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에펠탑이 보이는 드넓은 잔디밭에 늘어지게 누워, 지는 해를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에 부러움의 눈길을 감출 수 없었다. 파리의 지독함은 어느 흐린 오후 퐁퓌두 광장에 자리를 깔고 앉아 뜯어먹던 프랑스 버터가 가득한 부드러운 브리오슈 위에 뿌려진 우박 설탕의 달콤함으로 나를 유혹해 온다. 오래 전의 어느 날을 사무치게 그리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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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보면, 여행이란 놈은 참으로 지독해서 때때로 나를 잠식한다. 어느 기사를 읽었다. '이십 대의 해외여행이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망쳐놓는가.' 물론 나는 그 지독함을 통해 얻은 것이 많다. 조금씩, 아주 약간씩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 기사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후회 따위는 없었지만. 어느 친구는 말했다. 언제나 과거에 매여 사는 내가 걱정스럽기도 하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꽤나 자주 찾아드는 그 지독함에 취해있기에, 깨어난 오늘의 나는 행복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걱정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내가 너무 과거에 목메어 산다고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애써 붙잡을 마음은 없다. 그저,
모든 어제를 사랑하듯이 나는 모든 오늘을 사랑했고, 모든 '오늘의 오늘'이 '내일의 어제'가 될 터이니 결국 나는 모오든 오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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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것은 오늘의 나에게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잊지 말라고 속삭인다. 대부분 쨍한 여름이거나 손발이 어는 겨울인 오늘의 나에게 달콤하던 지난 봄바람을 기억하라고 속삭인다. 그 어쩌면 오래된 카피 문구와 같은 '악마의 유혹'은 오늘의 나에게는 잔인할 만큼의 지독함일지도 모른다. 굳게 다잡은 오늘의 나의 주먹을 스르륵 풀려버리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행, 그 지독한 놈은 이따금 소리 없이 나를 찾아와 지친 나의 머리를 옅게 쓰다듬는다. 나의 모오든 가장 젊었던,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고, 한 번의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게 하고, 보잘것없는 오늘의 나를 사소하게 나마 특별한 사람으로 만든다. 혼자만의 여행이든 친구와의 여행이든 연인과의 여행이든. 여행은 그 모오든 찬란하던 순간들의 누군가와 마주하게 한다. 홀로 떠났던 수많은 여행의 아련한 끝자락에서도, 나는 무수히 많은 날 이름 모를 거리를 씩씩하게 걷던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의 오늘, 누군가와 함께인 것이다. 혼자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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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행이여. 지독한 나의 새벽을 쓰라리게 만들지는 말아 주거라. 그저 그 약간의 씁쓸함으로 지친 오늘의 나를 보드랍게 토닥여주기를. 그 지독함으로 나를 포오옥 안아 덮어 평온한 단잠에 빠지게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