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콩나물국밥을 먹고
몇 신가 보니 1시 반이다. 새벽 1시 반. 아침이면 창녕군수배 탁구대회로 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을 푹 자는 게 좋다. 이대로 잠못자게 되면 컨디션이 엉망일 테지. 엉망인 채로 무사히 게임 치를 수 있을까. 비몽사몽 몽롱한 가운데 예탈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침부터 기분 꽝이 되겠지. 소중한 일요일 하루. 가족을 뒤로하고 내 욕심에 대회에 왔건만 처참한 상태가 되면 어쩌나. 그래 다시 자야 해. 가만히 눈 감았다. 자야 한다. 푹 자야 해, 하고 되뇌었다. 그러나 몽롱한 가운데 몸이 들썩여 참지 못해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 커피를 마신다.
어둠 속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본다. 어두컴컴한 산책로에 간간히 빛을 발하는 가로등. 내일 게임을 잘해야 할 텐데. 가로등 빛에 괴괴히 흐르는 강물. 아무도 없는 새벽 풍경. 홀로 커피를 홀짝이며 시계만 쳐다본다. 딱 한 시간만 앉아있다가 다시 들어가 자야지.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티브이를 켜 리모컨 소리버튼을 다다닥 눌러 음량을 제로로 만들어 화면만 본다. 뉴스에 빠져 깜빡 정신 차리니 시간은 어느덧 세시. 미쳤다. 얼른 들어가 잠에 들어야지 하다가 조금만 더 조금만 하다 다시 네시. 니가 정말 미쳤구나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제 낮잠을 잤잖아. 그래서 밤에 일찍 깬 거 같아. 그러면 피로도는 별로 없을 거야. 가만 머리가 그리 어지럽지도 않잖아. 커피 때문에 잠이 달아난 지도 모르고 컨디션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럼 보다 좋은 컨디션을 위해 국밥이나 한 그릇 먹으러 가볼까. 마침 가까운 곳에 24시 콩나물국밥집이 있다. 잠시간 고민 끝에 차 타고 국밥집으로 갔다. 가게 안에 들어서니 카운터에 한 명, 주방에 한 명이 아무도 없는 새벽에 나를 반긴다. 김치 콩나물 국밥을 시키고 한 숟갈 한 숟갈 정성스레 떠먹었다. 그래 힘내는 거야. 국밥도 든든히 먹었으니 힘내서 잘할 수 있겠지 했다.
집에 돌아와 씻고 가방을 꾸렸다.
일행의 차에 올라타 멍한 상태로 밖을 봤다. 대회 전 이렇게 아침을 먹은 적이 있던가. 없었다. 안 먹던 아침을 먹었으니 아침밥 덕에 게임에 도움이 되겠지 싶었다. 1시간 정도 달려 창녕 체육관에 도착. 동료와 몸을 풀었다. 감이 좋았다. 예선이 시작되고 나는 창원의 김 선수와 먼저 게임했다. 심판석에는 양산의 손 선수가 앉았다. 2년 전 양산의 손 선수에게 나는 완패당한 경험이 있어서 첫 게임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1세트를 이겼다. 2세트는 졌다. 졌을 때 퍼뜩 든 생각. 패하면 어쩌지? 그러면 예선탈락 확률이 높은데? 예탈 하면 어찌 되는 거지? 최근 이토록 잘난 체를 많이 했는데 지면 비웃고 좋아할 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진정으로 비웃고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본능적으로 그러지 않은 척 좋아하고 비웃을 것만 같은 탁구 동료들. 나 역시 그러한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어서 이 놈의 악마적 선악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후벼 팠다. 지면 끝장이다 하면서 3세트에 들어갔다. 단 1점이라도 지고 있으면 어김없이 드는 불안감. 지면 어떡하지? 예탈 하면 어떡하지?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가 띵한 기분에 지끈지끈 열나기 시작했다. 3세트를 내줬다. 미쳤구나. 4세트에서 간신히 이겨 2대 2 동률을 만들었다. 대망의 5세트. 옆에서 공이 발밑으로 굴러옴에도 나는 랠리를 이어갔다. 그리고 실점하니 옆테이블에서 통영의 김선수가 "스톱하지"하면서 안타까워했다. 통영 김선수는 불과 일주일 전 사천대회에서 맞붙었던 선수다. 그를 돌아보며 여유 부릴 상태가 아니었다. "괜찮아요" 답하며 점수판을 봤다. 2대 0으로 뒤졌다. 이때부터였다. 예탈이라는 글자가 머릿속을 짓눌렀다. 상대의 결정타가 계속해서 들어왔다. 나는 쫓겼다. 어떻게 회복할 새가 없었다. 상대의 마지막 한방이 엣지가 되어 게임을 내줬다. 창원 김 선수는 내게 "서브가 어렵네요"하면서 덕담 같은 한마디를 했다. 나는 심판석에 앉아 멍하니 체육관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거 지금 현실인가? 내가 진 게 진짠가? 싶어 좌우를 둘러봤다. 우리 구장 사람들은 저마다 힘겨워하면서도 승리하고 있었다. 나 혼자 패하고 심판석에 앉아있는 거다.
양산 손 선수가 김 선수에게 승리하고 나는 심판석에서 일어나 게임 준비를 했다.
손 선수가 "저번에 한번 붙었었죠? 구면이시네요"하고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네, 맞습니다"라며 대답했다. 그는 여유가 있었고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넬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게임이 시작되고 그의 백서브를 포핸드로 돌아서서 받았다. 그러니 커트와 너클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고 두 개 중 하나는 실패했다. 3세트 모두 그러했다. 10점까지 앞서다 듀스에서 잡혔다. 정신 차리니 3대 0으로 패했다.
어떤 서브를 넣지?
넣을 서브가 없었다. 한 번도 자신 있게 드라이브를 전진으로 꽂아 넣지 못했다. 끽해야 루프드라이브를 걸어 스매싱으로 처리했다. 같은 패턴은 금세 상대에게 읽혔다. 손 선수는 저 멀리 뒤에서 수비로 거의 다 막아냈다. 내가 실수할 때까지 여유롭게 랠리 하듯 받았다. 내 스매싱이 꽂히면 "나이스"라고 파이팅까지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 손 선수에 비해 나는 나이스, 파이팅까지 외칠 여유가 없었다. 여유 없는 나는 넣을 서브가 없어 토스한 공이 내려올 때까지 결정하지 못해 서브 실점까지 했다.
예탈 하고 걸어 나오는 시간.
도저히 고개 들 수 없는 부끄러움. 돗자리에 가 쓰러져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 괜찮은 척 있었지만 괜찮지 않았다. 내심 우승을 생각하며 왔는데, 예탈이라니,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그래 내가 착각하고 있었구나. 이게 내 실력이구나 싶어 허탈했다. 지금껏 잘해왔는데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무엇이 부족했을까.
돌이켜 보면 양산 손 선수의 백서브에 겁을 먹고 거의 커트로 리시브한 게 패착이었다. 그의 백서브는 커트 많은 거 하나 횡회전 많은 거 하나 꼴로 들어왔다. 커트로 오는 건 스톱 리시브도 되도록 짧게 놓으면 된다. 허나 횡회전 서브는 결대로 쇼트를 대어 밀면 된다. 나는 전부 커트로 받으니 스톱으로 놓지 못해 드라이브 선제를 내줬고 붕 띄워져 한방을 맞았다. 서브 회전이 이제 막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포핸드로 리시브했는데 이건 커트 너클 구분이 더 안되었다.
창원의 김 선수는 내 포핸드 방향으로 짧게 보내는 상회전 서브가 일품이었다. 1세트 때 당했으면 2세트 이후로 당하지 말아야 했는데 나는 5세트까지 내내 당하고 있었다. 커트인 거처럼 짧게 직선으로 보내는데 알고 보면 상회전이고, 얼결에 리시브하면 그대로 냅다 내려찍는 백푸시에 계속 당하기만 했다. 가만 돌이켜보면 상회전 서브는 즉각 뒤에서 앞으로 스매싱이나 드라이브로 응징하면 되는 거였다. 아니면 코스라도 왼쪽 대각으로 빼주면 최소한 백푸시는 피할 수 있었다는 거. 나는 왜 지금에야 깨달았을까.
단체전에서도 끝나지 않은 악몽.
나는 롱핌플 선수와 만났다. 롱핌플 선수는 두 갈래로 나눠진다. 가만히 갖다 대는 유형과 깎는 유형이 있다. 가만히 대는 유형은 보통 여성분들이 많고 쵸핑으로 깎는 유형은 과거 주세혁이나 서효원 같은 스타일이다. 가만히 대는 유형에게는 커트서브를 하고 민볼 드라이브나 백플릭으로 공격하면 된다. 반대로 상회전 서브를 넣고 루프 드라이브를 넣고 뜨면 스매싱으로 대응하면 된다. 그러나 깎는 유형은 다르다. 단체전에서 나는 깎는 유형을 만나 가만히 대는 유형으로 착각해 공격하다가 그대로 지고 말았다.
커트 주고 돌아오는 공이 민볼이나 너클이 아니라 커트량 적은 커트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맨 공이 아닌 것이다. 내가 드라이브를 걸면 돌아오는 공은 하회전 잔뜩 먹은 공이 돌아온다. 이것을 커트로 리턴하면 하회전이 다소 적은 공이 돌아온다. 그러면 이 공을 커트 드라이브로 공격해야 하는데, 민볼 드라이브와 스매싱으로 응대했으니, 바보처럼 뽕 타는 남자가 되어 그대로 패하고야 만 것이다. 최근 롱 핌플에 자신이 오르고 있는 추세였는데 또 이렇게 하나 아프게 배웠다.
탁구 정말 어렵다.
엊그제 일요일은 정말이지 힘든 하루였다.
6부에서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나 했던 입상이 이처럼 예선부터 치열한 세상이라니. 단체전에서 4~6부가 뒤섞여도 곧잘 승리하곤 했는데, 그놈의 1승 하기가 이렇게도 어렵다니...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초보다. 아직 다른 6부나 고수들에 비해 턱없이 구력이 부족하다. 어쩌면 지는 게 당연하다. 그저 부끄럽지 않게 끈질기게 잘 지고 오자는 마음으로 임하자. 덮어놓고 무조건 승리한다, 승리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진다, 지는 게 당연하다고 마음 비워야 한다. 이긴다는 생각이 1만 들어가도 스윙이 올라가지 않는다. 이긴다는 생각이 1만 들어도 과감함은 사라지고 저 멀리 떨어져 퍼올리기만 한다. 테이블에서 물러서지 마. 강타가 얼굴에 맞는 한이 있어도 눈을 부릅떠 맞서야 한다.
나는 초보다. 마음 비우기. 풀 스윙으로 가진 기술을 맘껏 펼친다. 이긴다는 생각에 겁먹어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되지 말아야 해.
올해는 이제 12월 22일, 고성대회 하나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