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안 되는 좋은 것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 저는 돈이 안 되는 것만 좋아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꼭 그렇진 않았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정도의 생각으로 그럭저럭 지내왔는데요. 언제부턴가 그게 문제로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세상 사람 모두가 좋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해 나만 잘 모르고, 공감하지 못하고, 심지어 흥미조차 느끼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해 열등감 같은 게 생겼달까요. 지금껏 나도 모르게 가성비와 효율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포기를 계속해왔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욕심조차 내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 취향을 가질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 것은 아닐까··· 이런 마음들로 한없이 초라해지던 때가 있었죠.
인생의 어쩌면 중요했을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하고 싶다'는 마음이 늘 선택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만하고 싶다'도 포함해서요. 돈을 안 벌어도 된다면 지금 난 뭘 하고 있을까? 하고 질문을 던졌으니, 그 답도 돈이 되는 방향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예를 들면, 빚더미에 올라앉은 상황에서 더 이상 회사에 다니지 않겠다고 사표를 내고, 작은 옥탑방에서 노을과 라디오에 만족하면서 돈이 되지도 않는 그림을 그리는 일 같은 것 말이에요.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어떤 선택이 돈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그건 나쁜 선택일까요?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가장한 백수)로 살던 시기에 윤만세라는 이름으로 처음 아트웍을 만들었습니다. 지구에 놀러 온 여행자처럼 살고 싶다는 바람으로 그림을 그리고 <Walk the earth>라고 이름 붙였죠. (이름이 비슷한 밴드 Walk the moon의 영향이 매우 컸어요.) 엽서와 포스터를 가지고 소소시장(소규모 창작물을 위한 플리마켓)에도 나갔습니다. 천 원짜리 엽서를 온종일 팔고 5만 원 정도를 벌었어요. 도와주러 온 친구는 이렇게 천 원씩 팔아서 어떡하냐, 이래서는 돈이 안 된다···고 걱정했지만, 저는 회사에서 월급을 받을 때보다 기뻤습니다. 누군가 내 그림에 대해 물어봐 주고 좋아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났는지 몰라요.
고백하자면, 저는 돈과 무관한 것만이 진짜고 진심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에어비앤비보다는 카우치서핑으로 만나야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고요. 돈 걱정 없는 집에 태어났다면, 돈 걱정을 안 해도 됐다면, 힘센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더 멀리 훨훨 날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서 저는 에피소드 부자가 됐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카우치서퍼가 된 것도, 여행을 모험처럼 하게 된 것도 사실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거든요. 덕분에 저는 기꺼이 나를 도와줄 좋은 사람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걸 알아요. (망할 놈도 어디에나 있지만) 사람을 ‘믿는 것’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줄여주는지 알아요. (그걸 ‘신뢰 자본’이라고 하더라고요.)
Walk the moon의 <Anna Sun>이라는 곡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We got no money, but we got heart
우리가 돈이 없지, 영혼이 없나요?
그래서 돈이 필요 없다거나, 돈을 벌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까지 운이 좋다는 말로 퉁쳐왔던 모든 것이 사실은 다른 사람의 선의 덕분이었다는 것, 돈이 너무 없었지만 돌이켜보니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것, 많은 갈등과 괴로움이 돈 때문에 생기지만 돈이 안 되는 어떤 선택은 좋은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그게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세계이고 제가 믿는 구석이에요. 저는 돈을 많이 벌 거지만, 비록 돈이 진짜 많아지더라도, 맑은 하늘에 기뻐하고 매일 보는 일몰에 매일 감탄하는 마음만큼은 잃고 싶지 않아요. 돈이 안 되는 좋은 것들은 정말이지 돈 주고도 못 산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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