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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만세 Dec 25. 2022

11월의 카타르

Damien Rice : The Blower's Daughter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건 대학생 때 하숙집 방구석에서였습니다. 어둠의 경로로 다운받은 영화 <클로저>를 재생했는데, 시작과 동시에 이 음악이 흘렀어요.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 나탈리 포트만과 주드 로가 인파 속에서 걷고 있는 장면이었는데요. 이야기의 끝을 짐작이라도 한 듯 눈물이 터졌습니다. 엎드려서 한참을 꺼이꺼이 울었죠. 2년간의 첫사랑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거예요. 누군가와 관계가 끝난 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끝을 내는 데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어요.



11월이 되면, 11월이 가기 전에 이 노래를 들으라던 친구의 말이 생각납니다. 첫 연애의 시작부터 끝이 난 뒤의 온갖 찌질한 모습까지 (본의 아니게) 모두 지켜본 친구의 말이에요. 영화 클로저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11월에 이별한 것도 아닌데!) 친구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어쨌든 그 말은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고, 그로부터 여러 해 뒤, 11월치고는 아주 화창하고 따뜻한 카타르 도하의 해변에서도 이 곡을 들었습니다.


짐작해보건대 카타르에 가 본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첫 유럽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카타르를 경유한 적이 있습니다. 도하 공항에 내렸고, 인천행 비행기가 19시간 남았는데,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했어요. ‘그냥 빨리 집에 가는 표를 살걸’ 잠시 후회했지만 공항의 WiFi를 이용해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기어이 알아냈고, 임시 비자를 받아 카타르 땅을 밟았습니다.


미래에 온 줄 알았잖아요. (2012년, 도하)


카타르의 11월은 심하게 따뜻했어요. 겨울옷으로 무장한 채 런던에서 막 날아온 저는 ‘같은 지구가 이렇게나 다르다고?’ 하는 실감에 여러모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두꺼운 양말을 벗어던지고 풀밭에 앉아 여유로워 보이는 이곳의 사람들을 구경했어요. 날짜 감각 없이 여행하던 끝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11월의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친구의 말이 생각나 The Blower’s Daughter를 들었죠.


11월이고, 카타르 월드컵이 곧 시작되는 시점에 이 노래를 떠올린 건 그 때문입니다. 제가 카타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인생의 단 하루, 어느 따뜻한 11월 30일에 도하 시내를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 것이 전부거든요. 여기서 태어나기만 해도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라고 했던 것, 남자들은 희고 여자들은 검었던 것(옷 색깔이), 다 똑같은 옷처럼 보여도 디테일은 모두 달랐던 것, 어떤 옷을 입든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먹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던 것, 택시 기사님이 돈을 벌기 위해 케냐에서 왔다고 말했던 것, 그래서 결혼을 못 할까 봐 걱정했던 것.


시작 전부터 이번 월드컵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요. 11월, 카타르, 클로저, 첫사랑. 언뜻 보기에는 무관한 이 단어들이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그때의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에게 매우 친절했던 카타르인과 내 거스름돈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케냐인을요. 당시에는 ‘좋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망할 놈도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과연 어느 쪽이 좋은 사람이고, 어느 쪽이 망할 놈이었을까요. 아니, 망할 놈만 탓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였을까요. 복잡한 심경으로 아바즈 서명 캠페인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11월이 가기 전에 이 곡을 다시 들어봐야겠어요.





흠, 이거 흥미로운데?라고 느낄 법한 콘텐츠를 격주로 전달하는 흠터레터의 <완전진짜너무진심> 코너를 브런치에도 옮깁니다. 흠터레터를 구독하시면 다른 꼭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함께 만나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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