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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Apr 17. 2017

#12, 부러우면 지는거야

둘이서 다정하게 여유롭게 걷는 젊은 부부를 만나다 (for #28)

2015년 10월 25일 일요일 맑음


도노하마역 - 34km - 28 大日寺(Dainichiji)



미소노의 안주인 야마모토상, 일본 아줌마스럽지 않게 억척스럽다.

중학교에선가 영어 선생님이라는 데 일도, 젠콘야도같은 미소노의 많은 일도 척척 해낸다. 

물론 가족들의 협력도 잘 되고, 저렴한 숙소다보니 순례객들도 상차림이나 설겆이 정도는 도와주기도 하고 해서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가족같이 정감있는 분위기다. 

바쁜 와중에도 오늘 저녁의 숙소까지 챙기면서 아직 정한 곳이 없으면 알아봐 주겠단다. 기꺼이 부탁을 드리니 여기처럼 저렴한 곳은 없다고 미안해 하면서 28절 앞의 숙소를 예약해 준다. 건물의 사진과 약도까지 쥐어주는 데 집의 노란 외관이 화사하고 발랄해서 맘에 든다.

어제 도노하마까지는 걸어 두었으므로 힘 빼지 않고 타노역에서 다시 기차로 도노하마역까지 이동, 오늘의 오헨로미치를 시작한다. 

28번 다이니치지까지 구글맵으로 34킬로, 만만치 않은 거리다. 서쪽 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길이다. 오늘따라 자위대 모집 광고가 자주 눈에 띈다. 안그래도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으로 시선이 고울 리 없는 데 자위대 모집 お知らせ가 반가울 리 없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한 데 몸이 오히려 명징해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기름진 음식도 안먹고 하루에 30킬로 이상씩을 꼬박꼬박 걷고 있으니 살은 빠져 몸은 가볍고, 몸이 보내는 신호에 집중하게 된다. 처음 3일 정도는 양 발의 모서리, 새끼발가락쪽이 너무 아프고 배낭은 숨이 턱턱 막히게 무거웠다. 배낭의 무게를 더니 발의 통증도 줄어들고, 무엇보다 다행인 건 물집 한번 잡히지 않은 게 위안이다. 

그런데 배낭의 무게도 덜고, 심지어 카메라 바디까지 탈이 나서 돌려보냈는데 다시 무게가 버거워지고 있다. 삼각대와 렌즈 두 개는 쓸모가 없어지니 고철덩어리와 다를 바 없다.


그래도 해안을 따라 가는 길은 아름답고 평화롭다. 축복처럼 날씨는 내내 맑고 서울처럼 미세먼지, 황사가 거의 없어서 공기도 맛나고 10월도 하순이니 후텁지근한 습기도 없다. 아직도 조금 덥기는 하지만 걷는 여행이니 추위가 빨리 와도 반가울 리는 없을 거다.

아쉬운 건 방파제가 높아서 바닷가를 거닐어 볼 수가 없다는 정도? 

수행의 도장 고치현이 아직은 3일째인 데 절이 비교적 띄엄띄엄, 해안 길이 많고 길위의 자판기 중엔 맥주 전용도 있고, 스마일 100엔 자판기도 종종 눈에 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나, 배는 안 고파도 목은 마를 즈음 적절하게 맥주전용 자판기가 나와주니 맥주 한캔이면 점심으로 족하다. 웬지 고치현이 좋아진다. 



다노쵸(田野町)에서 야스다쵸(安田町)와 아키시(安芸市), 게이세이무라(芸西村)를 지나 고난시(香南市)에 접어드니 2시가 넘은 시각이다. 오늘안에 닿기는 할 건가 싶다. 기시모토초등학교(岸本小学校)를 지난다. 시코쿠의 초등학교도 어릴 적 초등학교와 비슷하다. 어디서든 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면 마음이 훈훈해 지는 건 나이를 먹었다는 건가.

28번 다이니치지는 고멘(後免).나하리(奈半利)선의 노이치(野市)역 못미쳐서 있는 마루코메료칸(丸米旅館)을 지나자마자 우회전해서 2킬로쯤을 더 간 곳에 있다. 산문을 들어서니 4시가 넘는다. 

낯익은 오헤로상 중에서 기타야마상과 유독 며칠째 같은 페이스인 듯, 다이니치지의 본당 앞에서도 기타야마상의 왜소한 체구가 공손히 손을 모으고 기도드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무얼 저렇게 간절히 염원하는 걸까. 기도빨 잘 먹힐 것 같은 이 신성한 길을 걸으며 간절히 염원할 걸 찾아봐야겠다.

콩고즈에 보관꽂이에 꽂혀있는 즈에들 중에서 꼬마 오헨로상의 인형과 종이 매달린 게 눈에 들어온다. 저런 거 하나 사서 배낭에 달아야겠다. 달랑달랑 종을 울리며 지나가는 오헨로상이 내는 소리에 신경이 쓰일 때도 있는 데 저것도 나름의 배려라고 한다. 산중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상대방을 놀래키지 않기 위해 미리 소리를 내는 용도로도, 들짐승을 쫒는 소리로도 쓰인다고 하니 콩고즈에도 없는 나로서는 쬐끄만 종이라도 울리며 다녀야 하지 않을까.

미소노의 야마모토상이 알려주고 예약해 준 遊庵(유우안?) - 맞게 읽는 건지 모르겠다 - 은 약도까지 가져왔기에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 데 생각보다 어려워서 살짝 헤매고 만다. 이틀 연속으로 30킬로를 훌쩍 넘게 걸었더니 힘이 들었나보다. 지척임에도 등잔 밑이 어둡게 찾아 헤맨 숙소는 미소노에서 본 사진과 똑같다.

주인내외분이 비교적 젊은 것도 맘에 들고, 실내가 참 아기자기 예쁘게 꾸며져 있다. 2층 올라가서 바로 오른쪽 방을 배정해 줬는 데 창으로 밝은 빛과 살랑살랑 바람이 들어오니 상쾌하다. 2층 복도에도 간이꽂이에 순례에 관한 책과 정보지가 좀 꽂혀 있었으니 천천히 살펴봐야겠다.

遊庵은 2식 포함에 비교적 저렴한 6300엔이라선지 세탁비는 100엔 별도로 받고 있다. 욕조에 들어가는 시간이 제일 반갑다. 개운하게 피로를 풀고 세탁기도 돌리고 6시에 식당에 모인다. 나 포함해서 오헨로상은 총 4명이다. 기본 찬은 미리 셋팅이 되어있고, 서양인처럼 근사하게 생긴 주인장이 직접 요리해서 서빙까지 해준 돈카츠와 밥과 된장국까지 수수한 메뉴지만 달리 보였던 건 식기가 특별해서였는 지도 모르겠다. 질퍽하지만 품격있는 도자기에 담겨진 담백한 요리가 좋다. 




같이 식사하는 오헨로상들도 나와 비슷하게 보이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이라선지 대화 소재도 다르다. 아키타현(秋田県)에서 왔다는 젊은 남자는 과체중에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는 데 밥은 마다하고 돈카츠 안주랑만 시원한 아사히 맥주를 두병째 마시고 있다. 

쌀 농사를 지어놓고 휴가차 왔는 데 그날그날 내키는 대로 걷고 싶으면 걷고, 차를 타고 싶으면 차로 이동하면서 오헨로미치를 돌고 있단다. 아키타현에서 쌀농사라, 우리나라의 아키바리가 아키타현에서 넘어온 걸까, 일본 사람이라고 다 치밀해 보이는 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사람좋은 웃음을 날리는 이 수다스러운 오헨로상이 밉지 않은 느낌인 데 맥주도 모자라 니혼슈까지 시키는 걸 보고 저리 마시다가 낼 아침에 출발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다른 둘은 사이타마현(埼玉県)에서 온 젊은 부부다. 자녀가 있다면 아직 10대일 것 같은 나이에 부부 둘이서 결원을 목표로 아루키헨로를 하고 있단다. 남편은 콧수렴을 멋지게 다듬은 젠틀남이고 아내는 왜소하고 병약해 보인다. 그래선지 하루에 25킬로 이내로 천천히 걷고 있단다. 남편이 에히메현(愛媛県) 출신이라니 시코쿠가 낯설지는 않겠다. 어쨋든 둘이서 다정하게 여유있게 걷는 오헨로미치가 부럽다.


숙소의 주인장 부부도 식탁옆에 서서 다 같이 수다가 끊이질 않는 데 아키타현의 남자가 제일 말이 많다. 매년 쌀농사가 끝날때마다 휴가로 시코쿠엘 오기 시작해서 3번째라니 거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의 여행에 꽂혔나보다. 간토축제 등 아키타현의 축제에 대한 자랑질도 열심이시다. 나도 아키타현은 잘 알고 있다고, 겨울소나타의 욘사마, 지우히메의 그 아키타가 아니냐고 하니 깜짝 놀란다. 마치 나를 일본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내 일본어가 그 정도는 아닌 데 나머지 사람들도 헐~ 하는 분위기다. 특히나 사이타마현의 아내는 외국 여자 혼자서 오헨로미치를 걷고 있다는 데 많이 놀란다. 아마 연약한 본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가보다. 

연세드신 분들 특히 남자들하고는 사투린지 뭔지 모르겠지만 잘 못 알아듣겠고 아무래도 의사소통이 더딘데 모처럼 비슷한 또래들과의 대화가 유쾌해서 저녁시간이 즐겁다.


식사후에 2층 복도에서 은퇴한 기업가 출신의 永井司라는 오헨로상의 책, 시코쿠 88개소 아루키헨로일기(四国88ヵ所歩き遍路日記)를 본다. 2010년 가을에 20여일, 2011년 봄에 20여일 두 번에 나누어 걸은 오헨로 여행기인데 두 페이지에 걸쳐 비용이 요약되어 있다. 참고할 만하다.



遊庵(유우안?) (2식) 6300엔

기차(타노-도노하마) 250엔

음료 198엔

세탁 100엔

납경(28번) 300엔


총 7148엔

이동거리 3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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