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히르 Mar 11. 2018

#20-2,  오헨로 쉬어가기 이틀째

12년 동고동락 배낭과 이별하다

2015년 11월 4일 수요일 맑음


하루 30킬로를 걷지 않아도 되는 날이 밝는다. 바다를 건너온 친구와 이슬 덕분에 조금 남아있는 숙취를 아침 대욕장에서 느긋하게 날려버린다.


이제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아침식사 후에 잠시 숙연한 순간이 찾아온다.

2003년 여름에 나홀로 일주일 도쿄•오사카여행을 위해 구입했던 38리터 라*마 배낭을 떠나보내야 하는거다. 자주는 아니었어도 긴 여행때마다 곁을 지켜준 배낭과 함께 지중해의 이집트, 그리스, 터키도 다녀오고, 일본도 몇번, 40여일 남미배낭여행에도 함께 했다. 그런 동반자를 떠나보내는 슬픔은 오랜 연인과 헤어지는 아픔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시코쿠가 오롯이 걷는 순례여행이라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겠다고 마음먹었었지만 둘째날에 노*페 소형배낭을 버려야 했던 거랑은 무게감이 다르다. 

특히나 아직도 겉은 멀쩡한지라 더 죄책감이 들기도 하는데, 12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을 거듭한 인체공학적 배낭시스템과는 다른 터라 집중적으로 어깨를 짓누르고 그 여파로 허리까지 아파 오게 하는 데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다.


호텔 데스크에다 배낭을 버려달라고 부탁하니, 의아한 표정이긴 해도 내부에 잔여물이 있는지만 확인 후에 추가요금 없이 버려주겠단다. 부탁하는 김에 새벽에 대욕장에서 분실한 머리끈도 찾아달래서는 친구가 공수해온 새 배낭에다 짐을 옮겨 담는다. 헤어진 아픔은 잠시뿐, 오헨로 초반부에 박선생님께서 추천했던 독일 브랜드 툴*의 여성용 50리터 배낭은 놀라운 신세계를 보여준다.

둥글둥글 터질 것 같았던 배낭에서 상하로 날렵하게 긴, 그러면서 신체조건에 따라 키높이 조절도 되는, 크기도 여유가 있어서 하루에 챙길 간식까지 담고도 여유가 있을, 무엇보다 든든한 허리벨트가 무게를 분산해서 어깨와 허리의 부담을 줄여주니 앞으로의 절반의 일정이 한결 수월해지겠다는 자신감이 몰려온다.

정든 놈과 이별하는 슬픔, 새 것을 맞이하는 기쁨이 교차. 삶이란 늘 만남과 이별의 연속!!


새 배낭과 오랜 친구, 그리고 친구가 가져다준 카메라와 함께 룰루랄라 업된 기분으로 관광에 나선다.

오늘은 친구와 함께 세토내해를 둘러보고 에히메현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가 온천에 묵는 걸로 느긋한 일정이다. 




마츠야마는 한국인인 우리에게도 꽤 친근한 도시다.

지브리스튜디오의 대작들 중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브가 된 도고온센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리고 일본 근대화시기의 국보급 소설가 나츠메쇼세키가 잠시 교편을 잡았던 마츠야마중학교의 경험을 살린 「도련님」의 주요 무대였던 터라 이들을 관광상품화한 것이 곳곳에 숨어있기도 하다.

그래도 오늘은 마츠야마 시내를 벗어나 이마바리 근처의 하시하마역에 내려 느긋한 걸음으로 시마나미카이도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오를 거다. 시마나미카이도는 에히메현의 북쪽 끝에서 오시마(大島), 오미시마(大三島), 가미지마(上島), 무카이시마(向島)를 거쳐 혼슈로 이어지는 자동차도로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 이마바리 조선소도 보이는데 경기가 좋지는 않은 듯 대체로 분위기가 가라앉은 듯하다. 


역에서 2.5킬로라 어렵지 않게 전망대에 오른다. 날은 맑아서 세토내해의 무수한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너무나 한가한 시코쿠의 반나절이 대교아래 유람선처럼 느리게 지나간다. 

시코쿠의 두개 현을 지나도록 죽도록 걷기여행만 한지라 걷는 일 외에 여행하는 법을 모르겠다. 반가운 친구지만 같이 걷잘 수는 없어서 근처 식당으로 향한다. 가이세키 한 상차림씩 마주하고 대낮에 마시는 기린생맥주가 꿀맛이다. 이보다 더 한가로울 수,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오후다.



에히메현의 산골짜기에 자리한 니부카와온센호텔에서 하시하마하마역까지 픽업나오기로 한 시간은 5시였는데, 도무지 그 시간까지 빈둥거릴 재간이 없다. 일찌감치 호텔에 들어가 느긋한 온천을 즐기는게 낫겠기에 다시 전화를 넣는다. 3시까지 와줄수는 없냐니까 3시반까지 오겠단다. 

어슬렁 어슬렁 하시하마역 인근의 조용한 주택가를 거닐면서 올해의 전시주제인 윈도우 사진을 담아보기도 하고, 처음 발견한 할인가 자판기에도 흐뭇해 한다. 





일본사람의 수많은 장점 중에서도 특히 약속시간 지키는 건 본받을 만하다. 3시반에 정확히 하시하마역 앞에 봉고차를 댄 호텔 점원이 골목을 빠져나오는 우리를 반긴다.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구불구불 시골길을 30분 가까이 달려서야 호텔에 도착한다.

외관은 너무 수수하다. 근사한 저녁과 아침식사 포함이긴 해도 둘이서 22만원의 호사를 누릴만큼의 분위기는 아니다. 그래도 실망하긴 이르다. 긴 복도를 따라 걷는데 벽면이 군데군데 생화로 장식되어 있다. 곳곳에 호텔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오랜 가마(?)같은 장식물에 뜻을 알 수 없지만 유려한 문체의 액자들까지 기품있어 보인다. 


물좋은 대욕장에서 한가로이 오래도록 온천을 하고 기대했던 저녁만찬장으로 간다. 

ようこそ
お越し下さいました
どうぞごゆっくりお召し上がり下さいませ
鈍川温泉ホテル

'어서오세요. 잘 오셨습니다. 천천히 드시옵소서. 니부카와온천호텔' 쯤이려나. 참 대접받는 느낌이 좋다. 

저녁먹는 내내 서빙을 해주고, 야채튀김을 해주고, 스키야키에 돌솥밥을 퍼주던 아리따운 미즈타유키상도 너무 고맙다. 이쯤 되어야 고치소우사마데시다가 절로 나오지 않을까.



정말 조용하고 깜깜한 시골 료칸에서 기분좋은 포만감에다가 시원한 캔맥주를 얹어 오랜 벗과 보내는 밤이 길고도 아쉽게 지나간다.



니부카와온센호텔 (2식 포함) 10800엔

음료 2000엔

식사 3000엔

전철 160엔

하시하마왕복 1700엔

총 17660엔


매거진의 이전글 #20-1, 오헨로 쉬어가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