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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Baek 백산 May 14. 2023

나의 이름표는 무엇인가

한 의사 선생님의 고백을 듣고... 

난 지금 쿠팡에서 광고 제품을 만드는 Product Manager Director로 일하고 있다. 난 누군가에게는 동료이고, 매니저이고, 직원이다. 고객에겐 제품을 만드는 제품 매니저이고, 협력사들에겐 협력사 직원/의사결정자이다.  


일터를 벗어나면 조금 또 다른 역할들이 보인다. 가족에겐 남편, 아들, 아빠이고, 교회에선 선생님/같이 신앙생활하는 친구이고, 또 다른 곳에선 친구이기도 선후배이기도 특정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런 것들은 나의 역할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아이덴티티 일까. 난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어떤 사람인가. 나의 역할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일까. 


오늘 새롭게 알게 된 분 (채영광 교수)의 나눔에서 새로운 시각을 발견했다. 아 이렇게 나의 역할을 정의하고 일하고 사시는 분도 있구나. 그러면서 다시 도전받고 생각하게 됐다. 난 나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고 살아갈 것인가. 아래 이분이 오늘 나눈 여섯 가지의 역할/키워드를 나눈다. 미리 말씀드릴 것은 아래의 나눔이 크리스천의 맥락에서 나눠진 것이라는 것 - 그래서 추가 부연설명을 붙이겠지만 다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전체 영상이 궁금하신 분은 이 링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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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공녀 (The little princess): 아버지 친구역할


첫 번째 이름표: 아버지 친구 역할이다. 각자가 왕자님이고 공주님인걸 일깨워주는 아버지 친구역할. 사랑을 맘껏 나눠주고 부어 넣어주는.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크리스천의 믿음에 대해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그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것이다. 즉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왕)을 아버지로 두었기에 우리 모두는 왕자고 공주라는 것, 존귀한 존재이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란 것이다. 


암환자들을 돌보면서, 채영광 교수님은 자신의 첫 번째 역할을 그 아버지 (하나님) 친구로 정의했다. 환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너무나 낮게 보고 낮은 자존감/고통/미래에 대한 불안 등등 이 모든 것으로 싸우고 있을 때, 이들에게 사랑보따리를 맘껏 나눠주며 이들이 공주고 왕자라는 걸 이야기해 주고 일깨워주는. 그런 너무나 따뜻하고 사랑 많은 아버지 친구. 그래서 이분은 병원에서 간호사/의사들과 함께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환자들에게 다양한 상을 부여하며 (가장 긍정적인 사람, 잘 버티는 사람, 웃기는 사람 등등) 그걸 전달하며 과정을 축복하고 축하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분이 기도가운데 어떻게 이 역할에 대해 정의하고 수행하고 있는지 쓴 시를 한편 소개한다.

제목: 부탁

아침에 찾아온 하나님 부탁 내 아들 잘 부탁할게. 내 딸 잘 부탁할게
낮에 보이는 하나님 마음. 내 아들 때문에 정말 아프단다. 내 딸 때문에 많이 울었단다.
저녁에 들리는 하나님 음성. 내 아들 기다려주어서 고맙다. 내 딸 품어주어서 고맙다.
내가 뭐길래 나에게 부탁하실까
거저 받은 은혜. 수지맞은 인생
날마다 듣고 싶은. 내 공감의 근원. 하나님 부탁


2. 카메오 (Cameo): 감독의 명으로 잠깐 들어와 치고 빠지는 카메오


두 번째 이름표: 카메오. 감독의 부탁으로 잠깐 출연했지만 전혀 주목받지 않고, 역할이 크지 않을 때가 대부분인 그런 카메오. 


이분은 수많은 환자를 접한다. 한 환자에 쓸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다. 또 많은 경우 어떤 환자에게 시간과 마음을 많이 써도 본인 마음을 알아주지 않거나, 본인이 한 수많은 일이 전혀 티 나지 않을 때도 부지기수이다. 이렇게 되면 보통은 환자와의 인터액션/상호소통이 하나의 기계적 일로 되거나, 아니면 본인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아서 상처받고 마음이 닫히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의 역할이 카메오라는 걸 인정한다면? 주연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인정해주지 않고 관객이 자신을 잘 못 볼지라도, 감독과 친해서 잠깐 우정출연해서 할 말만 딱 하고 빠지는 게 본인의 역할인걸 본래부터 안다면? 상처받을 일도 없고, 매너리즘에 빠질 일도 없다. 카메오로서 역할만 잘하면 되고, 감독한테 인정/칭찬받으며 크레디트를 쌓으면 된다. 


그게 이분이 정의하는 두 번째 역할이다. 감독은 하나님이다. 각 환자의 삶의 주연은 그 사람이다. 본인은 감독에게서 대본을 받고 그것만 수행한다. 매일의 기도는 그 대본과 역할을 받는 시간이다. 


3. 마라톤완주 동반자: 인생이란 마라톤 완주를 끝까지 돕는 동반자 


세 번째 이름표: 인생이란 마라톤의 완주를 끝까지 돕는 동반자이다. 누구나 각자의 마라톤 레이스를 - 길이도 다르고 난이도도 다르고 코스도 다르지만 -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기에, 그 과정을 함께하고 끝까지 잘 완주할 수 있게 돕는. 


많은 말기암 환자가 결국 죽는다. 그리고 죽을 때 자신이 패배했다고, 실패했다고, 병과의 싸움에서 졌다는 패배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의사들도 죽음을 패배로 규정하고, 그렇기에 확률적으로 너무 생존확률이 희박하면 "의사로서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을 긋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분은 인생을 하나의 마라톤으로 보기에, 누구에게나 오는 죽음 그리고 그 너머 영원의 세계를 믿기에, 죽음이 다가온다고 해서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패배했다고 단정 짓지도 않는다. "더 이상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린 끝까지 이 레이스를 함께 할 것이고, 언제든 최선을 다해 완주할 수 있게 모든 할 수 있는 걸 하겠습니다" 란 자세로 환자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 오면 아래와 같이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강 가운데 있습니까? 당신 자신과는 요? 신과는 요? " 이렇게 평강 가운데 레이스를 마무리하게 돕고, 잘 달려온 그 레이스를 축하하고 축복해 준다. 


아래는 영원을 소망하며 이분이 쓴 시이다. 

제목: 영원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내일 죽을 것처럼 살길 연습하다가
메멘토 아이때르눔. 영원을 기억하라. 영원히 살 것처럼 살기를 연습합니다.
한 달을 사귀어도 평생 친구처럼 사귀기를.
일 년을 거주해도 평생 살 동네처럼 살기를
다시는 보기 싫어도 다시 만날 인연처럼 마주하길
질병이 죽음을 만나도 영원히 살 것처럼 죽기를
죽음이 이별을 만나도 다시 만날 것처럼 슬퍼하기를
무엇보다. 내 앞의 당신을. 영원처럼. 사랑하기를.


4. 친구: 그냥 별 할 말이나 일 없어도 시간 보내는 것 자체가 기쁨인 친구 


네 번째 이름표: 친구이다. 별 목적 없이 만나서, 얼굴 보고 싶었다. 잘 지내냐. 목소리 듣고 싶었다. 보니까 좋다. 밥이나 먹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환자 하나하나를 보기 전에 기도한다고 한다. 이 환자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평강이 임하기를.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친구이자 이 환자의 친구로서 이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사랑을 전하고 관계 자체를 기뻐하는 사람이란 걸 기억한다. 


이게 이분이 환자를 대하려 노력하는 마음가짐이고 본인의 역할 정의이다. 관계가 사무적이 되고 일이 되는 걸 경계하며 본인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친구라는 걸 각인하는. 아래는 관련하여 이분이 쓴 시이다. 

제목: 소명

내게 소명을 묻지 마세요. 아직 모르겠어요.
내게 비전을 묻지 마세요. 몰라도 잘 살고 있는걸요
내게 소명을 모른다고 다그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스트레스 많다고요.
내게 사명이라고 일 시키지 마세요. 하고 싶어야 하지요.
내 부르심이 뭐냐고요? 지나고 나면 알게 되겠죠.
다행히 한 가지는 알아요.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가 누구와 함께 하든지, 예수의 성품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내 욕심을 내 소명이라고 부르지만 않기를 원해요
생각합니다. 소명보다 생명을, 비전보다 일상을, 사명보다 사귐을
행복합니다. 예수와 사귐 덕분에, 이웃과 사귐 덕분에, 자연과 사귐 덕분에.


5. 증인: 주인공에게 공간을 내어드리고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목격하는 


다섯 번째 이름표: 증인이다. 주인공이 역사할 수 있게 공간을 만들고 내어드리고 옆에서 그 역사를 구경/목격하는 그런 증인.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소망을 품고 애쓰며 일하다 보면 지치는 사람을 많이 본다. 실망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이분은 그걸 경계하고 걱정했다. 어떻게 하면 계속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섬기고 헌신하고 자기 역할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답으로 본인의 역할을 증인으로 정의했다. 내가 하는 것은 기도하면서 공간을 내어드리는 것. 주인공은 내가 아닌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이다. 난 하는 일이 없다 - 공간을 만들어 내어 드리는 것 외에는. 지칠 일이 없다. 난 목격자이기에. 오히려 즐길 수 있다 관객으로서. 


이분은 성경에 나오는 떨기나무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고 불이 타는데 떨기나무가 재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됨)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성령의 불이 임할 때 우리는 계속 타도 재가 되지 않는다. 지치지 않는다. 성령의 불이 아닌 나의 불 (그게 내 욕심이든, 이고든, 무엇이든)이 탈 때 우리는 지치고 재가된다. 


6. 십자가에는 기적이 없다: 결국 모두는 죽는다. 그 죽음을 담대히 믿음으로 맞아들일 수 있는 게 진정한 기적이다. 


여섯 번째 이름표: 하늘의 상급을 바라고 믿고 보면서 자기 몫의 헌신을 하는 사람 


암환자들은 기적적인 회복을 구하고 기적적으로 회복되기도 한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기적을 바라며 회복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경우 말기암 환자는 죽는다. 그럼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결국 실패한 것인가? 


크리스천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 십자가를 지는 순간에는 심지어 하나님이신/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에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 흘리며 죽었다. 그걸 견뎌내고, 그 이후의 부활을 믿는 것이 기적이다. 


환자에게도, 의사로서 이분에게도, 우리가 세상에서 바라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 있다. 누구나 죽는다. 그렇다고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을 붙잡고,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다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리고 이 세상 너머. 천국과 하늘에 있는 상급을 믿고 붙잡는다. 그걸 믿고 즐거워하며 자기 몫의 헌신을 다하는 게 곧 이분이 정의하는 본인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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