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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Baek 백산 Apr 13. 2019

#5 집안대대로 내려온 가족, 국가, 남을 앞세우는 삶

탑건 교관, 애론 클라인의 삶과 철학 

아직도 "탑건" 비디오를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건 내가 태어나 처음 본 18금 영화였고,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보여준 첫 번째 영화였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이 기억을 새롭게 떠올리게 해 준 게, 바로 탑건 출신 파일럿, 전 해병대 장교 애론 클라인이었다. 대부분 나보다 어리거나 내 나이 또래였던 MBA 친구들에 비해 애론은 나보다 나이도 한두 살 많고, 벌써 결혼해서 애들도 있고, 무엇으로 보나 성숙함이 묻어 나왔다. 애론의 낮은 목소리는 항상 힘이 있고 신뢰감을 줬고, 애론의 큰 손과 꽉 찬 악수를 할 때면 왠지 나도 모르게 군인이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있었다. 


애론과 나는 터치 필리 (Interpersonal dynamics)란 수업을 들으며 같은 조에 배정되어 더욱 친해졌다. 서로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과 다양한 약점까지 속속들이 알게 된 후에, 애론에게 조심스레 책에 대한 말을 꺼냈고 인터뷰를 제안했다. 언제나처럼 애론은 쿨하게, 흔쾌히 자신의 시간을 내줬다. 아래 소개할 애론의 삶과 가치에서 나오겠지만, 애론은 자신의 시간보다 나의 프로젝트를 더 우선시 여겨줬고 늘 나를 배려해줬다. 그래서인지 애론과 함께하는 시간은 늘 기대되는 시간이었고, 애론은 마음이 힘들고 든든한 '어른'이 보고 싶을 때면 나에게나, 내 친구들에게나 늘 생각나는 맞형 같은 존재였다. 자 이제 그 삶의 비밀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정말 기대되네요. 먼저 성장배경에 대해 알려주시겠어요? 


저희 집은 백 년 넘은 군인집안이에요. 저희 할아버지는 1940년대에 미 공군을 섬기셨고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참전용사예요. 아버지는 미국 해병대에서 약 40년간 복무하셨어요. 이제는 은퇴하셔서 선장이 되셨고요. 그리고 몬터레이에 있는 해병대 전역병을 대상으로 한 대학원에서 오퍼레이션을 가르치고 계세요. 저희 어머니도 해병대 출신이세요. 미국 해병 역사상 처음으로 다이빙 학교를 나온 여성이죠. 해병대에서 9년간 복무하시고 나서 나중에 전업주부가 되셨어요. 물개와 돌고래를 조련하는 일을 하셨죠. 

할아버지 (왼쪽), 애론 (가운데), 그리고 애론의 아버지 (오른쪽)

이런 가정환경 덕분에 저는 계속 군부대에서 자랐어요. 항상 몇 년마다 새로운 부대로 갔고, 미국 서부와 동부를 왔다 갔다 했는데 제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떠나는 건 물론 늘 쉽지 않았지만, 새로운 세계를 향한 호기심도 있었고, 결과적으로 보면 정말 넓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매우 재밌고 좋은 사람이었요. 물론 가끔씩 엄청나게 화를 내는 템퍼도 있었지만요. 아버지는 한 번씩 집에 오랫동안 안 들어오셨고, 그게 당연한 환경이었지만, 집에 오시면 가족에게 정말 집중하셨어요. 어머니는 작은 마을에서 자란 매우 상냥하고 밝은 사람이었어요. 정말 바다를 좋아했죠. 해양과학을 공부했고, 동물 조련사로 일하셨다니까요. 


저희 부모님과 가정은 정말 근본가치를 강조했어요. 중학교 때 일이었죠. 여름방학을 할아버지네 집에서 보내게 됐어요. 할아버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세요. 제게 강조하셨죠.


“하나님, 가족, 국가, 이웃, 그리고 그다음이 너란다. 이 순서를 명심해.” 


할아버지는 이 순서를 정말 잘 지키셨죠. 한 번도 부자는 아니셨지만 전혀 개념치 않으셨어요. 너무 귀에 못이 박하게 들었고, 우리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정에서 당연하게 여겨졌고 늘 실천하시는 모습을 봤기에, 저도 어느 순간 이 가치들과 순서를 늘 가슴에 간직하게 되었어요. 


“넌 너 자신을 제일 나중에 둬야 하는 거야. 진짜 리더는 자신을 맨 마지막에 두지. 이걸 명심하고 지키면 넌 파워풀한 리더가 될 거야" 

정말 멋지네요. 그 긍지와 고귀한 정신이 전해지는 것 같아요. 어린이, 학생 애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전 오랫동안 하나에 집중 잘 못하는 집중력 장애가 좀 있는, 아주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늘 군부대 주위에 있는 국립학교를 다녔고 주로 군인 자녀들이 많았죠. 다들 친했고, 교우관계도 좋았어요. 고등학교 때 메릴랜드 주로 갔을 때, 처음으로 군인자녀가 많지 않은 학교를 가게 됐죠. 첫해는 좀 적응하는데 힘들었어요. 둘째 해부터 그럭저럭 적응해서 문제없이 지냈죠. 성적도 점점 더 낳아졌어요. 음악도 하고, 과학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아주 다양한 걸 했었죠. 


말썽도 은근히 피웠어요. 열한 살 때는 불꽃놀이와 불장난을 하다가 집을 거의 태워버릴 뻔한 적도 있었죠. 주로 친구들이 문제였어요. (Peer Pressure). 그래서인지 자라면서 점점더 독립적이 되어갔죠. 


전 정말 스스로 문제 해결하고 독립적으로 사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추구해 왔어요. 저는 첫째였고, 제 여동생은 저보다 여덜살이나 어리죠. 저희 부모님은 상당히 젊은 나이에 저를 가지셨고 무엇을 하셔도 저를 데리고 다니시며 어른 취급해 주셨어요. 전 고등학교 때부터 파트타임으로 일했고, 스스로 결정 내리는 걸 좋아했어요. 


그랬군요. 자라면서 장래희망 같은 게 있었나요? 


어릴 때 꿈은 공룡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는 거였어요. 전 정말 과학이 좋았고 과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군대가 어떤 건지, 군인으로서의 삶이 어떤 건지 조금씩 더 현실적으로 접하기 시작했죠. 군인 가정끼리는 정말 끈끈한 연대가 있었어요. 거의 매주 금요일 오후에는 누군가의 집에서 바베큐를 했죠. 거기서 만난 아버지 친구들이나 그 자녀들과 자연스럽게 군인 이야기를 나눴어요. 전 저희 아버지가 선장으로 있는 배에도 종종 가봤죠. 선원들을 만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이야기하면 그게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어요. 항공모함을 타보기도 했고, 다양한 경험을 했어요. 


무엇보다 제게 군인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건 제가 아버지를 거의 영웅시했기 때문이에요. 전 아버지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어요. 저희 부모님이나 할아버지나 누구도 제게 군인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죠. 전혀 그러시지 않았어요. 그냥 묵묵히 국가에 봉사하고 자기 자리에서 역할을 하며 모범을 보이셨어요. 전 그게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고 존경스러웠어요. 


그렇군요 그래서 바로 군인이 되었나요? 대학교를 갔나요? 


전 미국 남부에 있는 대학에 가서 학사장교를 통해 해병대가 되기로 마음먹었죠. 남부에는 할아버지가 계셨고, 전 남부 출신 사람이 좋았어요. 그 여유와 따뜻함에 끌렸죠. 해병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제가 워낙에 물과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남부에 있는 여러 대학에 지원했는데 앨라배마에 있는 어번 대학(Auburn university)에 합격해서 가게 됐어요.. 좋은 학사장교와 공과대학이 있는 학교였죠. 국공립학교였고 아이비리그 급은 아니었지만 공과대학만 놓고 보면 미국 30위 안에는 드는 좋은 학교예요. 


전 정말 학교와 분위기를 사랑했죠. 가족 같은 곳이었어요. 학사장교 그룹은 제 모든 것이었어요. 학교를 다니면서 ROTC로서 파트타임 군인이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은 유니폼을 입고, 한 시간은 미팅을 했죠.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운동하는 시간 (PT: Physical training) 이 있었고 매 쿼터당 정해진 수업을 들어야 했죠. 전 주로 저보다 경험도 많고 나이도 많은 사람들과 많이 어울렸어요.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스스로를 챌린지 하는 게 제겐 즐거움이었죠. 그러면서 스스로 성숙되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전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배운 제 가치를 늘 지켰어요. 제 친구들과는 달리 전 별로 불안한 게 (insecurity) 없었어요. 전 해병으로서 받는 도전을 즐겼죠. 


ROTC로서 첫 삼 년 동안 전 배도 타보고, 잠수함도 운전해보고, 비행기도 몰아봤어요. 그리고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어요. 저으기 고민했지만 전 항공 쪽을 선택했어요. 그쪽 사람들을 제일 좋아했기 때문이었죠. 제가 본 최고의 사람들이었어요: 가장 똑똑하고,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제가 지향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죠. 


그렇군요. 항공학교는 어땠나요? 


항공학교는 항상 에너지와 '재미'가 넘치는 곳이었어요. 파일럿이라는 게 워낙에 스트레스가 높은 직업이었기에, 그걸 웃음과 재미로 승화하는 분위기와 문화가 어디에나 녹아 있었죠. “재미를 추구하는 정신" (Spirit of Fun) 이 공식 용어였어요.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일해서 더 재미를 만들어냈죠. 모두가 매우 동기 부여되어 있었고, 항상 흥미와 활기로 넘쳤어요. 


하지만 전 처음에 정말 고생했어요.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멀미' 때문이었어요. 첫 3개월 동안은 지상에서 연습을 하고 그 이후엔 실제 비행 연습이 시작됐죠. 전 지상 연습에서도 늘 토했어요. 전투기를 조정하는 건 전혀 멋진 모습이 아니에요. 매우 덥고, 엔진 소리가 너무나 커서 매우 시끄럽죠. 항상 땀범벅이 돼요. 아주 약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 풀 하죠. 전혀 기분 좋은 상쾌한 그런 환경이 아니에요. 이걸 앞으로 십 년간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누구도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고 공포를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혼자 고민할 수밖에 없었어요. 비행훈련도 교관과 1:1로 전투기에서 하기에 저의 이런 공포와 멀미도 교관만 알고 있었죠. 어느 날 새벽 네댓 시에 깨서 세 시간이나 앉아서 천장보고 생각했어요. 다른 거 해야 되나. 그만둬야 되나. 이건 아닌 거 같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죠. “항공학교에 온건 아버지, 할아버지도 가지지 못한 기회다. 이렇게 빨리 그만둘 순 없다. 부모님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데. 가는 데까지 가보자" 


제 인생의 전환점 같은 순간이었어요. 끝까지 가보기로 한 게요. 지금까지 누구도 저의 등을 떠밀지 않았고 모든 게 제가 내린 결정이었죠. 제가 하고 싶어 한 거였기에 끝까지 가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이때 배운고 느낀 게 “준비하는 것의 가치" 에요. 전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요. 주중엔 부대를 벗어나지 않고 준비에만 전념했죠. 비행 훈련에 모든 걸 바쳤어요. 워낙에 수없이 실전 상황을 비주얼리 시뮬레이션하며 연습했기에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죠. 한 달쯤 이렇게 하자 토하는 게 줄어들었고 3개월 후에는 멀미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었어요. 


사실 중도 포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었어요. 포기하는 사람 외에도 2~3년의 비행 훈련 동안 15% 정도는 중도 탈락했죠. 그만큼 쉽지 않았어요. 우리 부대의 20명의 훈련 장교들은 플로리다와 텍사스를 격일마다 비행하며 훈련했죠. 비행훈련의 막바지 즈음에는 비행기끼리 부딪혀서 사람이 죽는 사고도 났어요. 제 친구의 형이었죠. 정말 실감 났죠. 비행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어요. 


그래도 훈련은 막바지로 가면서 좀 나아졌어요. 훈련의 막바지에는 캘리포니아로 옮겨서 조금 덜 딱딱한 환경에서 10명의 훈련 장교 생도들과 함께 훈련했죠. 그중 두 명은 나중에 같이 탑건으로 가기도 했어요. 이때 항공모함에 착륙하는 훈련을 했는데 진짜 무서웠어요. 특히 밤에 착륙하는 건 거의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같은 훈련이에요. 시속 수천 킬로미터로 항공을 비행하면서 항공모함을 보면 그건 밤하늘에 별을 보는 것 같은 손톱 크기도 안 되는 작은 불빛에 불과해요. 거기에 착륙을 해야 하는 거예요. 첫 밤 항공 착륙에 성공했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CvncJwCxxV0

항공모함에 밤에 착륙하는 파일럿 영상


멋지네요. 3년간의 파일럿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VFA-147 부대에서 약 1년을 보내셨다고요? 


비행훈련을 마치면 동료 파일럿들과 진정한 전우가 돼요. 진짜 재밌고 멋지죠. 마치 프로페셔널 운동선수가 되는 것 같달까죠? 사람들은 서로 어떻게 싸우는지 가르쳐주고, 서로의 전투력을 존중하며 전우애를 만들어가죠. 


VFA-147부대에 비행기 관리 (메인터넌스)를 담당하는 장교로 발령받았어요. 90명이 제게 리포트했죠. 갑자기 90명이나 되는 중대의 장이 된 거예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Sink or swim) 같은 환경이었죠. 제가 해야 했던 리더십은 늘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거였어요. 비행기를 관리하게 역할이었기에 늘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있었고, 전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만나고 이름들을 외우고 그랬죠. 대부분 저보다 나이가 많은, 30대 후반, 40대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전 겨우 20대 중반이었는데요. 그들은 강한 리더를 원하고 있었죠. 그냥 좋은 친구나 나이스 한 동료가 필요한 게 아니었죠. 이들의 존경을 사는 게 너무나 쉽지 않았던 일이었어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죠. 부대에서 늘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되는 상사가 하나 있었는데, 제가 어느 날 비행을 마치고 오는데 이 상사가 다른 사람 보는 앞에서 제게 호통을 치는 거예요. 제 실수를 지적하면서요. 물론 제가 실수를 하긴 했지만 도저히 그냥 가만히 넘길 순 없는 상황이었죠. 전 목소리를 크게 높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이야기했어요. “상사, 지금 당장 내게 하는 말을 중단하고 옆으로 물러서 있어. 아니면 군법에 따라 영창에 처넣겠어.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일대일로 신청하도록. 알겠나?” 상사는 놀라며 물러섰죠. 만약 제가 이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제 리더십은 땅바닥에 쳐졌을 거예요. 


대단한 리더십 경험이네요. 쉽지 않은 시간이셨겠어요.


정말 쉽지 않았던 시간이에요. 어찌 보면 제 군생활 동안 가장 어려웠던 기간 중 하나일 거예요. 비행하는 것도 늘 어려웠죠. 비행하는 건 늘 긴장되는 경험이에요. 언제나 실수를 저지르게 되죠. 한 전투기에 익숙해질 때쯤 되면 새로운 전투기로 연습하고 그럼 또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어요. 


그런데 거짓말처럼 어느 순간을 지나자 편해지고 재밌어지기 시작했어요. 몸이, 세포 하나하나가 아주 작은 것까지 기억하고 있어서 모든 게 자연스러워지고 새로운 비행기도 별 어려울 게 없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나자 비행이 너무 재밌어졌고 비행하는 게 기다려졌죠. 제가 스스로 어려운 과정을 다 이겨냈기에 이런 경지에 도 다른 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배웠어요. 쉽게 얻어지는 건 없다는 걸. 그리고 꼭 자기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걸. 전 나중에 교관이 돼서도 이 레슨을 늘 강조했어요. 


어느 임계점을 넘어야지만 즐길 수 있는 경지가 온다. 그리고 그건 그 누구도 대신 넘어줄 수 없다.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지 않는 게 상대방을 제일 위하는 것이다. 

1년쯤 지나서 제 앞에 몇 개의 선택지가 놓였어요. 스페인, 스위스 같은 해외로 나갈 수도 있었고, 탑건 교관 학교에 가서 항공 교관이 될 수도 있었죠. 전 탑건 출신 교관들을 늘 좋아했어요. 그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고 과정에서 재미를 누릴 줄 알았죠. 전 또 가르치는걸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탑건으로 가기로 했어요. 


드디어 말로만 듣던 탑건 학교가 등장하는군요. 그곳 경험을 더 알려주시겠어요?
설명: 탑건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 공군과 미 해군은 당시 기준으로 2 선급 전투기로 평가받던 MiG-15와 MiG-17을 보유한 북베트남 공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최신 전투기와 최신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당시 10:1의 격추 비율을 자랑했던 미 공군은 전쟁 초기 2:1이라는 격추 비율을 기록하더니 MiG-21이 등장한 이후에는 오히려 격추 비율이 역전돼 0.85:1이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문제점을 정밀 분석한 보고서가 작성됐고 다음과 같은 원인이 지적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조종사들의 세대교체가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충분한 공중전 훈련, 특히 근거리 접근전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실전에 투입됐다. 첨단 무기로 주목받던 공대공 미사일이 정작 실전에서는 기대 이하의 성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투 조종사들이 공대공 미사일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사정거리 밖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은 신무기 도입에 따라 전략 및 전술을 변경했지만 북베트남의 공중전은 미국의 의도와는 달리 재래식 전쟁 방법으로 전투가 전개돼 미국의 전략이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9년 11월 미 해군이 캘리포니아 ‘미라마’ 해군 항공기지 내에 창설한 새로운 개념의 공중전 교육기관이 바로 ‘탑건’(Top) 혹은 ‘탑건 스쿨’(Top Gun School)로 불리는 해군 전투기 병기 학교다. 원래 정식 명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졸업생들에게 수여되던 탑건이란 호칭이 결국 학교의 대외 명칭이 되어 버렸고 이후 같은 제목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영화에도 묘사된 것과 같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 교관들이 가상 적기 역할을 맡은 A-4 스카이호크 공격기를 몰고 철저한 실전 위주의 교육을 실시했고 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72년 북베트남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미 해군은 13.5:1이라는 놀라운 격추 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탑건 교육과정 출신 랜디 커닝햄 대위가 베트남 전쟁 최초의 에이스가 된 것이다.
탑건에서, 동료들과.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애론

탑건에 갈 당시 전 파일럿 생활과 해병대 생활을 정말 즐기고 있었어요. 아직 제대한다는 생각은 없었죠. 계속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볼 생각이었어요. 전투기를 조정하는 건 이제는 거의 운동경기를 즐기는 것 같았어요. 제일 재밌는 스포츠 같았죠. 


탑건엔 다양한 코스가 있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3개월간 진행되는 전술 교관 코스(Tactics Instructor course)를 수료했어요. 제가 했던 곳은 서부에 있는 탑건 학교예요. 제 동기 클래스는 총 10명이었고 8명의 파일럿과 2명의 무기 관련 장교가가 있었어요. 경쟁률은 그때그때 다른데 어떨 때는 정말 들어가기 어렵기도 하고, 어떨 때는 상대적으로 쉽기도 하죠. 3개월간 새벽 4시 반부터 밤 열 시까지 매일같이 훈련하는 타이트한 일정이었어요. 첫 3주간은 거의 비행은 안 하고 클래스만 들어요. 그리고는 비행을 병행하면서 다양한걸 배우죠. 처음엔 1대 1 배틀을 배워요. 꼭 농구에서 1:1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리고 폭탄 투여하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는 다른 비행기와 전술훈련을 배우죠. 나중에는 네 비행기가 같이 다양한 작전을 수행하는 걸 배우는데 너무나 시나리오가 다양하고 변화무쌍해서 정말 복잡해져요. 아주 힘든 일정이었지만 정말 재밌었어요. 같이하는 열명이 너무나 친해져서 거의 모든 걸 같이하고 주말도 같이 보냈죠. 


탑건의 전통이 있는데 졸업하는 전날 탑건 교관과 탑건 훈련생과 모의 전투를 벌여요. 실제 전투기는 아니고 훈련용 전투기로 하지만 실제 전투를 방불케 하는 게 그렇게 멋질 수가 없어요. 그러고 나서 그다음 날 가족들이 다 와서 하는 졸업식이죠. 끝나고 나면 배지를 받는데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어요.

졸업 전 모의전투 이후의 애론


탑건 이후의 군생활은 어땠나요? 


탑건 졸업하고 나서 전 웨폰 학교의 교관으로서 2년을 보냈어요. 이건 꼭 해병 파일럿의 컨설팅펌 같은 곳이에요. 다양한 부대의 파일럿들을 돌면서 일대일로 이들을 가르치고 비행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죠. 아주 힘들지도 않았고 즐기면서 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다시 오퍼레이션 하는 부대에 훈련 장교로 2년간 복무했어요. 이때에는 저도 꽤 짬이 차서 제 밑에 새끼 장교도 있었죠. 전 이때 결혼도 하고 제 아내가 임신도 하고 그랬어요. 이때가 처음으로 해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기예요. 국방예산이 삭감되면서 나이 많은 장교들은 늘 언제 예편될지 전전긍긍하는 게 보였고, 군인으로서의 제 인생도 정해진 것처럼 보였어요. 관료주의를 경험하기도 했고, 비행도 이제 슬슬 지루해져 가고 있었죠. 새로 배우는 게 별로 없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나가기로 결심했죠. 평생 전투기를 몰면서 살 생각은 없었어요. 보통 제대하면 군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건 전혀 끌리지 않았어요. 전 뭔가 큰 일을 여전히 꿈꾸고 있었고, 파일럿을 그만한다면 ‘경영’이 하고 싶었죠. 전 경영을 좋아했어요. MBA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 때문이었어요. 주위에 MBA 나온 사람도 없었고 막연한 개념이었지만 제겐 확신이 있었죠.


탑건이 제게 가르쳐 준건 “최고의 사람"과 함께 있는 가치였어요. 항상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고 더 나아지는 데에 목마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 저도 더 발전하고 제 한계가 계속 극복되는 걸 느꼈죠. 그건 매우 “자유로워지는 경험" 이였어요. 


스탠퍼드 MBA (GSB)는 어땠나요? 


MBA에 오게 될때, 전 가장 중요한 건 '여기서 만날 사람'과 '학교 수업'이라고 생각했어요. MBA에서 하는 경험, 특히나 대인관계/리더십 같은 부분은 별 기대하지 않았어요. 이미 전 해병대에서 마스터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어요. 실제론 MBA에서 한 다양한 경험들이 제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저의 가치를 바꿀 정도로 파워풀했어요. 


특히나 리더십 수업을 들을 때 전 좀 시니컬했죠. “난 수십 명의 선원도 리드해봤고, 정비공도 리드해봤어. 너네가 나한테 리더십을 가르친다고?” 이런 교만한 생각이 앞섰죠. 하지만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조금은 다른 리더십이 필요하단 걸 알게 됐고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저 스스로에 대해서도 더 알게 되고요. 


무엇보다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제가 비즈니스의 기초가 없어서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는 거였어요. 쉬운 길은 없었죠.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했고 그렇게 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전 아직 비즈니스 경험이 없기에 여름 인턴을 했던 메킨지에 가서 매니저로서 경험을 먼저 더 쌓을 생각이에요. 그리고 언젠가는 제 비즈니스를 스스로 하고 싶어요. 뭔가 제품을 직접 만드는 비즈니스를 하고 싶기도 하고, CEO로서 경영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전 책임을 지고 의사결정을 하는 거에 자신 있어요


만트라는요? 두려운 거가 있나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요?


만트라요? 


다른 사람을 저보다 우선시하는 거예요. 제가 삶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예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처럼 여기는 게 제 만트라예요. 상대방에게 이용당할 우려도 있지만 여전히 이 태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어요. 물론 너무 이용만 당하지 않도록 균형을 잘 유지해야겠지만요. 


또 하나는 판단하기보다는 “질문"하는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예요. 


일에 있어서 저의 가치는 ‘지금 하는 것, 지금 잘하는 것’을 진짜 잘하자는 거예요. 지금 가진 것, 할 수 있는 것에서 먼저 최고의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두려운 거요? 


전 아직 제가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두려움이 많죠. 그리고 편견이나 판단을 너무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좀 더 오픈된 자세로 살고 싶어요 (vulnerability). 


가장 행복한 시간이요? 


결혼했을 때. 두 애들이 나왔을 때. 탑건 학교를 졸업했을 때요. 


애론과 그의 아들, 딸

인터뷰를 마치고 애론은 또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힘차게 악수했다. "이제 된 거지? 파이팅 친구!" "Anything else? Good luck buddy". 애론은 겸손했지만 당당했고 누구보다도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산같이 흔들림 없고 바다같이 고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최고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더 발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주위를 늘 챙기며 정말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참 사람이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거야. 다시 태어나 여자로 태어나면 이런 친구랑 결혼하고 싶다 이런 별 이상한 생각을 다 들게 만들어주는 친구다. 목소리도 멋있고 눈빛도 멋있고 행동거지도 멋있고 생각하는 것도 멋있고 다 멋있고 간지가 줄줄 흘렀다. 


졸업하고 애론은 매킨지에서 약 1년을 보내고 핀터레스트로 옮겨서 약 1년간 일하다가 MBA 동기가 시작한 건축장비를 대여해주는 마켓플레이스를 만드는 스타트업 (Yard Club)에 COO로 합류했다. 사실 합류하기 전부터 창업자인 동기가 얼마나 애론과 같이 듬직한 리더십이 있는 리더를 COO로 모시기 위해서 삼고초려했는지 알고 있었고, 애론이 스타트업으로 조인하기까지의 과정도 옆에서 꽤나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합류한 후에는 애론이 COO로서 스타트업에서 한 일이 내가 한 일과 워낙 비슷한 게 많아서 서로 나눌게 갈수록 많아졌고 종종 샌프란에서 만나서 밥을 먹었다. 그럴 때마다 애론은 늘 내게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을 해줬다. 그래서 애론과의 만남은 언제나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산, 이번에 아기 낳았다고? 축하해. 30대 가장으로 스타트업에서 중역을 맡고 애기도 낳고 힘들지? 그게 당연한 거야. 30대 가장은 늘 쫓기며 살지. 가정에도 충분히 시간을 못 내서 미안하고 회사에도 못 내서 미안하고 자기를 돌볼 시간과 여력은 없고. 다 그런 거야. 그러려니 하고 힘내서 파이팅해봐. 넌 잘할 거야". 


스타트업이 큰 기업에 팔리고 나서 자신이 데리고 있던 사람 한 명 한 명이 다 어떻게든 엑싯을 하게 도와주고 나서야 애론은 자신의 길을 찾아 나왔다. 약 열명 정도 되는 작은 스텔스 사물인터넷 (IoT) 회사의 글로벌 파트너십 (BD) 헤드로서 세계를 누비며 파트너십을 맺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이 인터뷰를 발행하겠다고 연락하자 얼마든지 발행하라며 자신은 아내가 샌디에이고에 있는 병원에 좋은 포지션이 생겨서 가게 되면서 (애론의 아내는 의사다) 자기도 샌디에이고로 간다고 연락해왔다. 햇빛 + 해변 = 행복한 아내 & 행복한 삶 (Sunshine + beaches = happy Katrina and happier Aaron :)). 너무 많이 재지 않고 가슴이 가는대로 거침없이 걸음을 내딛는게, 과연 애론 다웠다. 


애론은 아내와 이런 약속을 했다고 한다. 10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1년은 전 세계를 여행 다니자. 그리고 그걸 지금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에서 한 단계라도 더 성장하고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나나, 내 주위 MBA 동기들이 보기엔 때론 머쓱해질 정도로 애론은 자신의 삶에 당당했고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자신의 주위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애론이 실리콘밸리를 떠난다니 많이 아쉽고 허전하다. 그냥 든든한 형 같은 사람 만나서 아무 이야기나 하고 싶을 때 이젠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나.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버거울 때면 가끔 애론을 생각한다. 그리고 애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해준 그 가치를 나도 더 생각해보고 더 살아보고 내 자녀들에게도 더 전해줄 날들을 그려본다.  

애론과 아내, 두 자녀들


0. 프롤로그: 기획의도 - 나는 아름답고 열정적인 삶을 꿈꾼다.

0. 목차 - 무엇이 이들을 만들어 왔는가

1. 절제, 가족과 신앙에 충실한 삶이 주는 자유 (카일런의 삶 이야기)

2.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법조계의 시마과장 (아츠시 마츠시다의 삶과 열정)

3. 가난과 배경을 뚫고 올라가는 개나리 같은 에너지 (쉐일리,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4. 부모님께 배운 사랑과 가치, 세상과 나누고 싶어요 (니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  

5.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족, 국가, 이웃을 앞세우는 삶 (탑건교관, 애론의 삶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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