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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Baek 백산 Mar 07. 2019

#1 절제, 가족과 신앙에 충실한 삶이 주는 자유

카일런 (Kylan Lundeen)의 삶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 - 모든 탐욕으로부터의 절제, 가족과 신앙에 충실한 삶이 주는 자유를 이야기한다. 카일런 룬딘(Kylan Lundeen). 카일런과는 1학년때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 이쁜 딸 둘과 아내가 있는 몰몬 친구인 정도로만 알았지 특별히 친해질 일이 없었다. 그러던게 2학년이 되면서 같이 수영도 하고 테니스 수업도 듣고 하면서 점점 친해졌고, 카일런이 나를 집으로 초대하면서 우리관계는 더 돈독해졌다. 가까이서 본 카일런은 정말 완벽그 자체였다. 이 잘생긴 놈은 나이도 나랑 거의 동갑인데 벌써 거의 초등학교 갈것 처럼 보이는 이쁜 딸 둘과, 이쁜 아내와, 신앙도 가지고 있고, 인생의 거의 모든걸 다 결론내고 안것 같은 프레젼스를 풍기고 있었다. 묻는것마다 대답이 있었고 본인 철학이 있었다. 운동은 또 어쩜 이렇게 잘하는지, 1번도로로 자전거 타고 LA까지 가는 수백킬로미터의 여정을 친구들을 데리고 떠나고, 철인삼종경기도 풀코스로 완주한 경험도 있었다. 나의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수 없었다. 넌 애들 교육을 어떻게 하니? 넌 몰몬교가 뭐가 좋니? 넌 전에는 뭐했고 앞으론 뭐할거니? 연신 질문을 퍼붓다가 결국 이 시간없는 애의 시간을 2시간씩 두번이나 빌려서 심층 인터뷰를 했다. 내게 지금도 너무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는 내 친구 카일런의 삶을 이제 자신있게 더 많은 분들께 소개한다.  

Kylan 가족사진. 지금은 여기에 막내아들이 하나 더 있다.

1. 성장배경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어요?


전 피닉스 애리조나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여섯 형제의 셋째로 자랐지요 (저희는 몰몬 가정이라 형제가 많아요 웃음). 위에 누나 둘, 아래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가 있어요. 대단히 더운 동네였는데, 전 늘 밖을 뛰놀면서 지냈습니다. 아빠는 항상 바빴고 엄마는 여섯 형제를 키우느라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상당히 힘들어했죠. 그래도 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늘 뭔가를 만들고, 부수고, 밖에서 놀고.   


저희는 상당히 가난했어요. 블루칼라 삶이었다고 보시면 돼요. 똑같은 집에서, 잘 못 사는 동네에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있었죠. 중학교 갈 때 가정형편이 좀 나아져서 더 나은 곳으로 이사했어요. 하지만 잘 못 사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요. 고등학교에 갔을 때, 처음으로 갈등이 시작됐어요. 가장 옷 잘 입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패션과 브랜드에 빠졌어요. 가난이 싫어졌죠. 브랜드 제품만 샀고 그걸 있고 싶었어요. 그걸 살 수 없는 집안 상황과 스스로가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 패션을 아예 거부하기로 작정했죠. 그때부터 항상 브랜드 없는 중고 마트에서만 물건을 사기 시작했어요. 브랜드만을 원했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져서 내린 결정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 거의 브랜드 옷을 입지 않고 있어요.   


2. 부모님은 어떠셨나요?


아버지는 물리치료사셨는데, 크게 돈을 잘 번질 못했죠. 하지만 열심히 해서 나중에 충분한 신뢰를 쌓아서 5개 프랜차이즈를 열고, 두 병원과 파트너십도 맺었어요. 어머니는 대학교에 갔지만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전업 가정주부가 됐죠. 아버지는 만만치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어요. 완전 보스 기질이 많았죠. 감정적으로 어머니를 학대했어요. 어머니는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죠. 자신감이 너무 떨어져서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늘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어요. 어찌 보면 그래서 어머니는 더 저는 자신감을 갖고 성장하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늘 저를 세워주고 제가 뭐든 할 수 있다고 늘 인정해주고 북돋아 줬거든요.


3. 몰몬으로 자란 건 어땠나요?


음. 일단 일요일에는 늘 교회에 가요. 주중에는 교회에 대해 별 생각 안 하고 살죠. 그리고 나쁜 말을 쓰지 않아요. 성인용 영화를 보지 않고, 16살이 될까지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지 않는 게 룰이었어요. 13살, 14살 때 어떤 여자애를 너무 좋아하게 됐는데, 내면의 갈등이 많이 있었죠. 몰몬교로서 스스로의 신념에 대해서 처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는 무서워서 데이트를 못한 것 같아요. 혼전순결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16살 전 데이트는 금기이기에, 만약 발각되면 교회에서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찍히는 거였으니까요. 음. 그리고 술먹거나 담배 안 피고요. 그리고 스카우트를 해요. 거의 80%는 보이스카웃을 합니다. 캠핑 가고, 스카우트 활동하는 거 저 정말 즐겼어요. 다른 건 할만했는데 성욕을 억제하는 게, 데이트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교회에서는 혼전순결을 늘 정말 강조했죠.    


친구들도 거의 대부분 몰몬이었어요. 우리 부모님은 늘 우리 집을 친구들에게 오픈해서 우리 집이 아지트 같았죠. 친구들이 와서 놀고 자고 그러면 엄마는 엄청 푸짐한 아침을 만들어졌어요. 15명쯤 되는 친구 그룹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결국 마약에 빠졌어요. 우리들이 주로 노는 마구간 아지트가 하나 있었어요. 거기서 저는 맥가이버로서 다양한 걸 만들었고, 깜깜할 때 제가 만든 불빛에서 파티를 하는데 제 제일 친한 친구 중 하나가 마약을 하는 거였어요. 브랜든, 너 뭐 하는 거야? 숨이 멎는 것 같았죠. 너무 무서웠고 다시는 그 친구를 보지 않았어요. 교회의 비숍한테 가서 그 이야기를 했어요. 탈선하는 친구들과 노는 게 무서웠죠.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게 제게는 가장 큰 두려움이 었어요. 한 2년 동안 다양한 탈선을 했는데, 한 번도 걸리지 않았죠. 부모님은 늘 제가 그런 거 안 한다고 생각하고 아주 모범적이라며 자랑스러워했어요. 걸리지 않은 게 축복이었죠.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서 더 실망시키지 않고 싶었던 거 같아요. 만약 걸렸더라면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더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 것 같아요. 이제 부모가 돼보니 그때 부모님이 진짜 몰랐던 건가도 의심스럽고, 애들이 잘못했을 때 이걸 모르는 척해줘야 하나 고민이 되네요 하하.   


몰몬교는 모든 ‘중독'에 대해 극도로 경계해요. 그걸 꼭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는 건 아니에요. 이건 저희 아버지도 확실히 가르쳐 줬어요. 실수해도 다그치거나 겁주거나 하지 않고 괜찮다고 해줬죠. 두려워서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이 있기 때문에, 중독을 피해야 하는 것이라는 걸 몰몬교와 저희 아버지가 알려줬어요. 12살 땐가, 처음 야한 잡지를 보게 됐죠. 친구가 본인 삼촌한테서 훔쳐온 걸 보여줬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뭔가 매우 불편했고 죄지은 것 같았고 제 안의 어두운 면을 느끼게 됐죠. 피하고 싶었어요. 마약 같이 나쁜 거라고 생각하게 됐죠. 교회에서 배운 게 도움이 됐어요. 네가 보는 포르노나 잡지 속 야한 여자는 진짜가 아니다. 드라마 같은 거다. 너를 속 익고 너를 노리는 상술이다. 결국 그거에 빠지면 너의 진짜 관계가 힘들어질 거고, 넌 함정에 빠질 거다 라는 메시지가 머릿속에 박혀있었고 그 믿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자위행위에 대해서도 좋게 보지 않아요. 중독이 되면 그건 정말 경계해야 하는 거고, 만약 자위를 하면 비숍한테 가서 털어놓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죠. 전 몰몬교의 이런 ‘중독'에 대한 엄청난 경계를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철저히 지키려 하고 있어요. 음식이 제일 어렵죠. 음식에 대해서 철저히 관리하는 건 요새도 참 어려운 거예요. 하하   


4. 코스타리카 미션을 가셨다고요?


저는 다른 몰몬교처럼 대학교에 가자마자 2년의 미션을 떠났아요. 전 코스타리카로 갔고 스페인어를 배우며, 일본인 몰몬교와 파트너가 되었죠. 그 친구는 정말 멋진 친구였어요. 전 그 친구를 닮고 싶었죠. 미션 중에 전 그 친구가 다니는 BYU로 편입했어요. 편입과정이 아주 쉽지는 않았지만 노력했고 결국 들어갈 수 있었죠. 정말 축복이었어요 제게는.   


미션 동안 하는 건 남들에게 봉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늘 파트너와 함께 있고요. 코스타리카에서 정말 많은 망가진 가정을 봤고, 정말 많은 경우 남편이, 가장이 그 문제의 중심에 있는 걸 봤어요. 전 제 인생의 우선순위를 이때 세웠죠. 정말 좋은 남편이 되겠다, 내 아내가 최우선이고 그다음이 내 아이들이다. 

미션에서 돌아오고 나서 제 친구들이 여자를 ‘섹시하다’ 이런 말을 하며 물건 취급할 때 전 매우 불편해졌어요. 전 좋은 것만 보고 싶어 졌고 좋은 것만 이야기하고 싶어 졌어요.   


또 배운 거요? 남들을 저보다 먼저 두는 거요. 제가 6개월간 캐어하던 스페인 슬랭을 쓰는 할렘가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가장 기억나요. 정말 그들을 사랑했죠. 남들을 나보다 먼저 두는 걸 배웠고 이건 계속해서 제 DNA에 남게 됐어요. 제 아들 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강력히 권고할 거예요. 전 완전 다른 사람이 됐죠. 상대방을 저보다 우선시하는 걸 슬럼에 살면서 배웠으니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요.   


5. 그렇군요.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군요. 전 군대에서 2년을 보냈는데, 솔직히 카일런님의 미션 경험만큼 삶을 송두리째 바꿨는지는 모르겠어요. 미션을 다녀와 셔는 어땠나요? 미션 중에 BYU 대학으로 편입하셨다고요?


네, 저희 동네에선 아이비리그는 거의 넘사벽이었고, 저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우리 큰누나가 BYU를 갔는데, 전 동네에 있는 Rick’s college에 그냥 갔어요. 그러다가 미션 때 제 파트너를 만나서 더 좋은 학교에서 더 좋은 환경에 가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해 BYU로 편입한 거죠. 전 새 출발이 하고 싶어서 고등학교 때의 저를 아는 친구들을 은근히 멀리했어요. 미션을 갔다 오고 나서, 더 밝고 더 나은 삶에 대한 저의 열망은 매우 확실해졌고, 전 제 과거 친구들을 잘라내야 한다는 걸 느꼈어요. 


제 선교 멘토는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 성실한 일, 좋은 것만 이야기했어요. 항상 제게 아주 큰 기대를 가져줬고 전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어요. 그 사람과 있으면 저 자신에 대해 더 기분이 좋아졌죠. 그런 사람들만 주위에 두려고, 제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만 주위에 두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어요.   

BYU는 정말 좋았어요. 아주 범생이 같은 곳이에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으니 전미에서 가장 ‘깨어있는 (Sober)?’ 학교일 거예요. 주말은 주로 야외활동이죠. 데이트도 다 야외 하이킹, 운동하는 그런 것들이었어요. 같이 호수에 가는 것 - 이게 데이트예요. 서로 전혀 육체적인 접촉도 없이요. BYU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있는데, 전 학교가 매치메이킹하는 데이트 학교 같아요 어떤 면에선. 혼전순결이 당연시되고 육체 접촉이 금기시되기 때문에 젊은 혈기를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남자들은 선교를 다녀온 20대 초중반에, 여자들은 대학교에 입학한 20대 초반에 만나서 많이 결혼하죠. 그리고 서로 몰몬교 파트너를 원하기 때문에 학교 전체가 결혼을 위한 짝짓기 같은 면이 있어요. 이번 주엔 이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다음 주엔 다른 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그게 일종의 불문율이라 서로 다 허용해주죠.   


6. 그렇군요. 그 데이트 과정을 거쳐 지금의 아내, Jen을 만나셨나요?


네. 전 선교를 다녀온 후에 이제 스페인 언어권으로 선교를 갈 후배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누가 저한테 Jen이란 친구를 소개해주게 됐고 처음 그녀를 보자마자 반하게 됐죠. 전 6번이나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했어요. 그때 Jen은 엄청 잘생긴 남자를 만나고 있었고 전 위축되기도 했지만 용기를 내서 계속 데이트 신청을 했죠. 첫 데이트는 커플 자전거 타기였어요. 그다음 날 전 다른 친구와 데이트를 나갔지만, 계속 Jen이 생각났죠. 아주 특별한 여자였어요. 자신감에 가득했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았어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본인의 자신감을 인정해주고 그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전 그렇게 자신감이 많지 않았어요. 자신감 많은 척했죠. 항상 친구들과 부모님과 주위에서 인정받아 왔기에,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겉으로는 자신감 넘치는 척했지만 속으론 불안도 많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도 많았어요. 항상 쿨한 사람이 되고자, 그룹에 끼고자 했던 저는 그녀의 그 자신감에 끌렸죠.   

결혼까지 가는 건 쉽지 않았어요. 그녀는 우리 사이를 연인 사이로 규정하기를 상당히 오래 거부했고, 전 관계에 불안감을 느꼈죠. 그게 너무 힘들어서 한번 헤어지자고 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 우리는 1년 반여의 연애 끝에 2004년 결혼에 골인했죠. 정말 큰 축복이에요.   


7. 첫 직장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만드는 걸 좋아했던 저는 건축 관리를 공부하고 있었어요. 전 늘 부동산 디벨로퍼가 되고 싶었어요. 친구들 사이에선 제가 맥가이버였고요. 애리조나에선 건축사업이 매우 각광받았어요. 건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큰돈을 버는걸 많이 봤죠. 전 돈이 없었기에 바로 디벨로퍼가 될 수는 없었고 부동산 개발을 하는 회사에 취직해야 했죠. 2007년 졸업하고 부동산 관리하는 회사의 부동산 디벨로퍼로 일하게 됐죠. 그때 부동산 붐이었어요. 유타에 큰 포르젝트가 많았어요. 사실 전 대학교를 졸업할 때 BYU에서 하는 MBA 프로그램에 갈까 고민 많이 했죠. 거의 학비도 면제됐고 들어가기도 쉬웠거든요. 그때 친구들이 만류했어요. 열심히 일하고 최고의 비즈니스 스쿨을 가라는 조언에 따라서 전 BYU MBA를 가지 않고 바로 일에 뛰어들었죠.   


유타 시에서 하는 큰 프로젝트 - 5000억짜리 프로젝트에 투입되었어요. 처음부터 문제가 많은 프로젝트였죠. 개발하는 회사에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했어요.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이 프로젝트는 말도 안 된다고 제 상사에게 이야기했죠. 2007년 초에 시작했는데 2007년 말이 되자 서서히 문제가 수면 위에 드러나기 시작했고, 많은 관계자들이 손을 빼기 시잭했어요. 하청업자도 발을 뺐고 투자자들도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건축은 중단됐죠. 전 3년 동안 이 프로젝트 하나에 매진했어요. 결국 모든 걸 정상화시켰죠. 은행을 설득했고,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에 임대계약을 다 따냈고, 거기서 생긴 신뢰를 바탕으로 추가 자금조달을 해서 공사를 완공시켰죠.   


일하면서 큰 실수를 하나 범했어요. 프로젝트 시작한 지 1년쯤 지났을 땐가, 프로젝트의 이인자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총책임자에게 있는 대로 사실을 다 보고 안 한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죠. 매춘도 하고 매우 의뭉스러운 사람이었어요. 전 제 상사와 이걸 상의했고, 이인자 몰래 총책임자에게 이 문제를 직접 가지고 갔죠. 그리고 그 이인자는 바로 해고됐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이인자가 돈까지 빼돌리고 있었던 거예요. 


실수가 뭐냐고요? 제가 그 이인자에게 직접 이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았던 거요. 직접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그에게 기회를 줬어야 했어요. 그는 지금까지 저를 증오하고 원망하고 있을 거예요.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문제를 일으킨 직접 당사자와 꼭 먼저 담판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하나 일하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저의 ‘인간관계 능력', ‘평화지킴이' 실력이에요. 제가 집에서 그 ‘수호자'역할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전 사람들의 감정을 읽는데 본능적으로 능하고, 뭔가가 잘못되고 있으면 그걸 바로 캐치하는 것이 몸에 베여있었던 것 같아요. 공사감독 총책임자가 처음엔 하청업자에게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는데, 저와 일하고 나서는 아주 스마일 가이로 바뀌었어요. 제가 그와 담판을 지었거든요. 기분 나쁘지 않게, 하지만 매우 직접적으로, 그 눈을 보고요. 마치 어렸을 때 제가 아버지에게 하듯이. 전 그 역할을 하는 게 참 즐거웠어요.   


8. 스탠퍼드 MBA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고, 학교생활은 어떠신가요?

 

Kim Clark라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학장이 몰몬교예요. 전 그에게 콜드 이메일을 보냈고, 정말 감사하게도 그는 제 이메일에 답해주는 건 물론 상당히 많은 시간을 저와 보내줬어요. 그 과정에서 스탠퍼드 MBA가 제 꿈의 학교라는 걸 알게 됐죠. 전 정말 만드는 걸 좋아하고 창의적인걸 좋아하는데, 스탠퍼드에는 IDEO 같은 회사가, D school 같은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재미로 하는 이런 걸 업으로 하는 데가 있다는 게 꿈만 같았죠. 그래서 스탠퍼드에 합격했을 때 꿈만 같았어요. 합격하고 나서 전 사모펀드에서도 잠깐 일하게 되고, 훈련해서 철인 삼종도 하고, 엄청 기쁘고 꿈에 부풀어서 학교에 왔죠.   


첫 학기는 정말 힘들었어요. 모두가 너무 잘났고 똑똑한 거예요. 전 왠지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몇 개의 재무 관련 수업을 들었는데, 친구들이 진짜 진짜 진짜 똑똑하다는 걸 느꼈죠. 작아졌어요. 뭔가 스스로를 잘하는 걸 하고 싶었고, 다시 자신감을 찾고 싶었죠.   


제 멘토는 늘 제게 ‘네가 좋아하는 걸 해 그럼 넌 성공할 거야’라고 이야기해줬어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뭐지? 저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내와 함께 이 질문을 열심히 묻기 시작했어요. 내가 몇 시간이고 하는 게 뭘까. 그리고 깨달았죠. 얼마나 내가 창의적인 것을 좋아하고 만들기를 좋아하는지. 겨울학기부터 그런 수업을 찾아 듣기 시작했고, 점점 학교가 재밌어졌어요. 여름 인턴으로는 유타에 있는 Qualtrics란 회사에서 일했죠. 온라인으로 서베이와 마케팅을 하는 회사인데, 제가 테크 업계로 오는 첫 번째 회사로는 최고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유타에서 몰몬들이 주로 있는 회사라 문화적으로도 저와 잘 맞고요.   


학교에서 친구들과 친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가정을 병행하는 것도 쉽지 않았죠. 그래서 룰을 만들었어요. 제가 나가서 술먹거나 파티에 안 가는 대신 일주일에 이틀에서 사흘은 집으로 사람을 초대하기로. 그래서 15명 정도 정말 친구들을 만들었고, 매우 기쁘고 만족해요. 저의 전략이 먹힌 거죠.   


전 결국에는 제 비즈니스를 하고 싶어요. 아마 유타에서? 유타엔, 선교로 훈련된 몰몬들이 많아요. 세일즈를 아주 잘하고 아주 열심히 일하고 아주 야망 있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과 제 비즈니스를 만드는 게 제 지금 꿈이에요.   


9.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고 왜 그러신가요? (What matters most to you and why: WMMW), 그리고 당신에게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WMMW질문에 전 '가족, 그리고 솔직해지는 것'이라고 했어요. 상당히 진부한 답변이죠? 왜냐고요? 2004년 황소들과 함께 달리기 하는 것에 나간 적이 있어요. 전 전략이 있었죠. 안쪽에서 뛰는 거고 2번째로 뛰는 거예요. 바깥쪽에서 뛰면 황소들이 돌다가 칠 위험이 더 높다고 판단했고, 선두로 뛰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고 제 전략은 집중했어요. 


이건 제 전략이에요. 가정을 가장 우선시하고 솔직하게 사는 것이 결국 제게 충만한 삶을 가져올 것이라는 제 판단을 저는 믿어요. 이 전략이, 황소에게서 그날 저를 보호해준 것처럼, 세상에서 저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걸.    

저에게 몰몬교와 신념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에요. 몰몬교는 제게 우리 모두는 ‘생산자'라는 걸 가르쳐줬죠.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5일 동안 모든 세상을 만드시고 하루 동안 우리를 만드셨어요. 우리도 그를 닮아 생산자인 거죠 무언가를 만드는. 전 제 가정을 열심히 만들어가고 있어요.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거죠. 지금 제 딸들과도 열심히 시간을 보내지만 무엇보다도 제 아내가 제게는 제일 중요해요. 우리의 우정과 로맨스 가요. 우리는 매주 데이트 나잇을 갖고 우리 둘이 본딩 하죠. 우리는 같이 설거지를 하면서 1:1시간을 가져요. 절대 그걸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전 가정을 꾸리기 위해 정말 노력해요. 가정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상한 영화, 포르노, 술, 담배, 폭력, 이런 걸 절대 허용하지 않고 앞으로도 않을 거예요. 저희 아버지는 늘 꼼수가 있었어요. 늘 룰을 어겼죠. 특히 돈 앞에서는요. 전 100% 정직이 99% 정직보다 쉽다는 걸 배웠어요. 룰을 100% 지키는 건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고 저의 전략이에요.   


제 신념은 여전히 진행형이에요. 몰몬교의 약점 중 하나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물어서는 안 된다는 문화가 있어요. 모두가 완벽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 물어볼 수가 없죠. 이젠 제 딸들이, 저한테 아주 근본적인 질문들을 하는데 저도 대답을 다 가지고 있지 않아요. 동성애는 정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스스로 답을 아직 못 내리겠어요.   


10. 요샌 어떤 불안들이 있나요?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요? 삶의 만트라가 있는지요?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불안감이요? 아직 많죠.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게 여전히 무서워요.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뿌리 깊은 자신감이 없어요. 커리어 적으로도 아직 자신감이 많이 없어요.   


가장 행복했었던 기억이요? 2003년 밸런타인데이 때, 젠이 저를 사랑한다고 해줬을 때요.   

  

만트라요? 목적, 계획, 우선순위 (Purpose, plan, priority) 에요.   


한국 독자들에게요? 전 이제야 삶을 좀 즐기고 누리게 되는 법을 배우는 거 같아요. 너무 많은 것을 놓쳐왔죠. 도전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배우는 것 같아요. 고통 속에 있어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에게 좋다는 걸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아요. 그걸 겪고 나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도 우리는 조금씩 더 공감하고 연민을 가질 수 있고,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을 테니까요.   


2012년 카일런네 집에서, 카이런의 두 딸과 함께

아직도 카일런이 초대해준 첫 번째 저녁이 기억난다. 카일런이 어떻게 딸들과 대화했는지, 어떻게 아내와 대화했는지. 카일런은 내게 자신의 삶을 나눠주면서 포르노를 내 삶에서 도려내라고 피를 토하며 이야기했다. “잘라내, 도려내, 그건 니 삶과 니 결혼생활을 통째로 잡아먹을 거야. 내가 이런 이야기 너한테 한 거 알면 우리 아내가 안 좋아하겠지만 난 아직도 아주 만족한 성생활을 누리고 있어. 난 어떻게 하면 그녀가 완전히 뿅 가는지 알고 있고, 내 아내도 내가 뿅 가는 포인트를 알고 있고 우리는 서로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며 같이 놀고 기뻐하고 그래. 앞으로도 그럴 거야. 절대 속지 마. 그건 널 속이는 세상의 유혹이야. 절대 자만하지 마. 그건 널 잡아먹을 거야 (it will eat you alive).”. 내 삶에서 포르노를 도려내는 건 정말 뼈를 깎는 아픔(?)과 실패의 반복이었지만 그래도 내게 Kylan 같은 친구가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Kylan을 따라서 몰몬 교회도 가봤다. 몰몬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이들이 사는 모습은 정말 멋졌다. 서로서로 돕고 봉사하면서 가정에 정말 충실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매우 건강했다. (몰몬교들의 삶의 자세와 지혜가 궁금하신 분은 제 과거 포스팅 - 어떻게 살 것인가, 몰몬교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 일독을 권합니다)      


카일런은 그 후 거짓말처럼 성공가도를 달려가고 있다. 애 둘을 더 나아서 나와 동갑인데 벌써 네 아이 (딸 둘 아들 둘)의 아빠가 되었다. Jen은 네 번째 아이를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을 정도로 엄청난 여인이 되었다. Qualtrics에서도 승승장구하여 Head of Marketing으로서 인수과정에 참여했고, 유타에서 자연환경을 만 끼하며 거짓말 같은 사진들을 Instagram에 올리고 살고 있다. 서핑도 하고 하면서. 물론 겉으로 보이는게 다가 아니리라. 어찌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며 성공을 논하겠는가. 그래도 카일런 이라면 철저한 전략과 자기 관리로 위기를 잘 헤쳐나가며 가족과 직장, 교회 에서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한다.


철저한 관리가 자신의 전략이라고. 자신은 그런 전략을 갖고 살 거라는 카일런이 앞으로도 너무나 잘 살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또 카일런과 함께 운동도 하고, 농담 따먹기도 하고, 같이 가족끼리 시간도 보내며, 더 나은 삶과 더 숭고한 의미와 더 멋진 전략을 의논하기를 기대하고 소망한다.   


백산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시리즈 


1. 절제, 가족과 신앙에 충실한 삶이 주는 자유 (카일런 (Kylan Lundeen)의 삶 이야기)

2.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법조계의 시마과장 (아츠시 마츠시다의 삶과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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