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 Baek 백산 Mar 16. 2019

#2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법조계의 시마과장

아츠시 마츠시다의 삶과 열정

두 번째 이야기, 아츠시 마츠시다.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법조계의 시마과장. 아츠시와 나는 바로 친해졌다. 한국에 있을 때는 너무 멀게 느껴지지만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과 일본이 얼마나 가까운 나라인지 바로 알게 된다. 400명 정도의 동기 중에 한국사람은 나 혼자였고, 일본 사람은 세명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난 아츠시와 죽이 가장 잘 맞았다. 처음 집 구할 때 아츠시 방 소파에서 며칠 얹혀 지내기도 하고, 같이 데이트 경매에 나가서 우승하기도 하고, Japan night를 조직할 때 같이 일도 해보고, 축구도 같이 많이 하고, 그렇게 우리는 참 친하게 지냈다. 


늘 원하는 게 많고 욕심은 많은데 시간은 없고 가진 게 없어서 여유 없게 살았던, 그리고 그게 온몸으로 내비쳐졌던 나와는 달리 아츠시는 여유가 있었다. 늘 웃고 있었고, 호탕하게 미국애들도 잘 휘어잡았고, 놀 땐 확 놀아버리고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엄청 많았다. 모든 걸 다 가져서가 아니었다. 공부도 상당히 허덕이면서 쫓아갔고, 1학년 마치고 남들은 다 멋진 인턴 할 때 혼자 앱 만들고 스타트업 한다고 별의별 삽질(?)도 다 하는 걸 내가 다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아츠시는 흔들리지 않았다. 했던 스타트업이 잘 안되고, 일들이 잘 안 풀리는 상황에도 아츠시에게는 대인배의 기상과 담대함과 여유와 웃음이 항상 있었다. 본인의 실수나 어려움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예의 바르고 삶의 자세가 정돈되어 있었다. 과연 무엇이 이 친구를 이렇게 단단하게 하는가? 자 이제 그의 이야기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사카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자랐어요. 아주 일반적인 일본 중산층 가정이었죠.  아버지는 부띠끄 로펌의 변호사였어요. 매우 엄격한 사람 었죠. ‘예의', ‘염치' 이런 거에 정말 엄격했어요. 많이 맞기도 했죠. 화도 잘 내고요. 엄청 무서웠어요. 원래 철학자였어요. 독서를 정말 좋아했죠. 집에 잡지와 시집과 책들이 넘쳐났고 로맨틱한 면도 있는 멋진 사람이었어요.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집안의 장녀로 매우 에너지 넘치고 활발한 사람이었어요. 제가 낳고 2년 후에 선생님을 그만두고 나서, 다양한 비영리 단체에서 일했죠. 번역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람이었어요. 엄마는 늘 논리로 절 이겼죠. 전 엄마한테 못하는 말이 없었지만 논리로 엄마를 이길 수 없었어요. 할아버지는 미츠비시를 평생 동안 (40년) 다닌 엔지니어였어요. 실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그 가치를 늘 이야기하셨죠. 할머니는 아주 일반적인 가정주부였어요. 할머니는 흥이 많은 사람이었고 늘 밝고 웃겼어요. 농담을 좋아했죠.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 코미디도 좋아했어요. 제가 사람들 앞에서 ‘연극'하고 사람들 웃기고, 사람들의 시선을 좋아하는 건 제 할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의 전 아주 나대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소위 말하는 밥맛이었어요. 친구들에 비해 운동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죠. 아직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부모님과 레스토랑에서 밥 먹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아이가 우는 거예요. 그 아이 부모가 ‘그만 울어, 너 자꾸 이런 데서 울면 사람들 웃음거리가 된다.’ 이러는데 진짜 웃음거리가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그래서 아주 큰소리로 웃기 시작하다가 아버지한테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혼난 기억이 있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래도 전 계속 나댔어요. 남들보다 키도 크고 운동도 공부도 잘해서 어딜 가나 인기 있고 주목받았죠. 어른들은 저를 칭찬하면서도 제가 너무 거만하다고 나무라기도 했어요. 3학년 때, 제가 누군가를 왕따를 만들었었죠. 그런데 4학년 때는 저보다 더 힘센 아이가 나타나 저를 왕따 시킨 거예요. 5학년 때는 저를 진짜 싫어하는 친구도 하나 나타났어요. 전 처음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죠.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제 오만불손한 성격이 원인인걸 알게 됐어요. 그때 처음 알았죠. 아 내가 아주 오만한 나쁜 놈이었구나. 하지만 바뀌는 건 참 쉽지 않았죠.   


초등학교 때 일중에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10살 때, 3학년 때 만난 선생님이 제게 ‘1등’의 중요성을 처음 각인시켜 줬어요. 최고가 돼야 한다는 걸. 그것이 공부든, 운동이든, 심지어는 게임이나 취미 활동이든. 그때 이후로 모든 것에 매우 경쟁적이 됐어요. 전 최선을 다하는 것의 기쁨과 중요성을 배웠죠.   

2. 하하 그렇군요. 왠지 어땠을지 딱 알 것 같아요. 정말 많이 들어본 엄한 일본 아버지 밑에서 자라셨네요 어머님이 아주 글로벌하고 활달하신 분이었던 것 같고요. 중고등학교 때는 어땠나요?  


중고등학교는 교토에서 나왔어요. 편도로 2시간 가까이 버스와 기차를 타야 하는 등하교였죠. 축구에 미쳐 살았어요. 거의 축구만 했죠. 공부도 잘했어요. 전 모든 숙제와 공부를 학교에서 다 끝냈죠. 학교 끝나고 공부하는걸 매우 싫어했어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주 최선을 다해 매우 효율적인 방법으로 거의 모든 걸 다 학교에서 했어요. 사실 선생님들은 제가 성적은 좋아도 워낙 말썽도 부리고 해서 절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친구들한텐 늘 인기 만점이었죠.   


중3 끝날 때 2주간 호주에서 홈스테이를 한 경험이 있어요. 라이프 체인징한 순간이었어요. 일본 밖에서 처음으로 가족 없이 지내본 경험이었어요. 세상에 다른 삶이 있다는 걸 보고 느꼈죠. 시야가 확 넓어졌어요. 모두에게 각자의 문제가 있구나. 삶은 정말 다양하구나. 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갈증을 줬죠.   


고등학교에 가서는 운동을 줄이고 여자애들과도 어울리기 시작했어요. 여자 친구도 많이 바꿨고, 나름의 탈선도 해보고 외박도 했어요. 부모님은 이런 거에 상당히 관대했고 저를 매우 독립적으로 키우셨죠. 학교 성적도 늘 좋았기에 큰 문제는 없었어요. 그러다가 한번 제대로 곤란을 겪고 혼난적도 있어요. 제게 좋은 경고가 됐죠. 그다음부터는 확실히 좀 더 몸가짐을 조심하게 됐어요.   


공부하고 생각하고 할수록 최고가 되고 싶고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갈수록 굳어져 갔어요. 아버지를 보면서 변호사의 꿈을 굳혔죠. 그래서 동경대 법대에 진학하게 됐어요.  


3. 저와 비슷한 게 참 많네요. 저도 중학교 때 미국에 가서 홈스테이하고 나서 세상이 너무 넓다는 걸 느끼고 시야가 엄청나게 넓어졌던 기억이 있어요. 저도 중학교 때 나쁜 짓하고 한번 제대로 잡혔던 게 좋은 경고가 되기도 했고요. 전 그래도 고등학교 때 학원 많이 다녔는데 그건 다르네요. (웃음). 대학교 시절은 어땠나요? 


1학년 때는 정말 많이 놀았어요. 원 없이 파티를 한 것 같아요. 2학년 때부터 맘 독하게 먹고 고시, 변호사 시험 준비에 들어갔어요. 보통사람들은 7년씩 걸리는데, 전 누구보다 빨리 붙고 싶었어요. 그래서 미친 듯이 공부했죠. 까맣던 얼굴이 햇빛을 못 봐서 하얘졌고, 그 당시에 저를 사람들이 백혈병 환자 같다고 할 정도였어요. 워낙 신나게 놀아본 덕분에 노는데 유혹받지 않고 최선을 다해 공부할 수 있었죠. 그래서 최연소로 1년 반 만에 3학년 때 합격할 수 있었어요.   


고시 합격하고 나서 나머지 학교생활은 매우 순조롭고 여유로웠어요. 도요타와 함께 자동차 모터쇼를 조직하는 이벤트 일을 해보기도 했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이런 이벤트가 제 성격과 잘 맞더라고요. 전 세계를 도는 배낭여행도 하고, 100~200명씩 부르는 파티도 종종 열었어요. 전 진짜 이런 이벤트 하는 걸 너무 좋아해요. 시야가 넓어지는 게 느껴지는 걸 즐겨요. 고시 후배들 과외를 해서 돈을 마련하고 계속 이런 행사들을 벌였죠. 저의 오만함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여전했어요. 특히 고시 공부할 때는 너무 스스로와 주위에 스트레스를 줘서 너무 싫었죠. 붙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서 조금씩 나아졌어요. 


4. 고시공부를 한 것 까지 저와 비슷하네요. 첫 직장은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정말 다양한 고민을 했어요. 전 M&A를 하고 싶었어요. M&A는 필수적으로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는데, 그게 제가 좋아하는 큰 그룹을 조직하고 매니징 하는 것과 참 비슷한 면이 많다고 생각했고 정말 다이내믹해 보였거든요. 투자은행이나 컨설팅에 지원할까도 고민했는데 배낭여행에 몰두하느라 그러지도 못해서 결국 BCG만 지원하게 됐어요. BCG 지원하고 면접 보면서 비즈니스를 만들고 분석하고 하는 게 엄청 재밌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하지만 더 많은 고민과 BCG 파트너, 로펌 파트너 등 수많은 멘토와의 상담 끝에, 로펌에 가기로 했어요. 

결국 제 꿈은 변호사가 되는 거였고, 법의 근간이 되는 ‘정의/공정'이라는 가치가 더 사회에 근본적인 가치처럼 여겨졌어요.   


제게는 멘토가 돼준 교수님이 있었어요. 상아탑에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는 분이었고 정부 자문도 해주시는 분이었는데 늘 저에게 비즈니스/법/정치의 다양한 역학관계를 설명해주고, 사람을 소개해주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힘 역학관계가 있는지 알려줬어요. 이 교수님을 통해 지금 로펌의 파트너를 알게 됐고, 그분이 저를 뽑았죠. 아주 유명한 M&A 변호사였어요. 2019년에 일본 대법원 재판관이 된 사람이에요. 진짜 똑똑한 사람이었죠. 어떤 의미에선 예술가적 기질이 있는, 너무 똑똑해서 사람들이 선뜻 가까이하기 어려워할 때도 있는 사람이었어요. 다행이게도 전 이런 나이 든 사람과 잘 지내는 재주가 있었어요. 이분은 저에게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줬죠. 아버지를 상대하면서 배웠고, 멘토 교수님도 제게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어떻게 어른들과 관계를 맺는지 알려줬어요. 이 당시 첫 직장에 들어갈 즈음에 전 아주 친한 10명 정도의 친구를 만들게 됐고 그들이 지금까지도 저의 제일 친한 친구 그룹 중 하나로 남아 있어요.   


5. 그렇군요. 변호사 시험에 되고 컨설팅 갈 생각을 했다니 역시 괜히 지금 MBA에 와 있는 게 아니군요 (웃음). 로펌에서의 시간들은 어땠나요? 


1년 반은 트레이닝 기간이었어요. 전 아주 인기 만점이었죠. 파티를 많이 열었어요. 검사와도 알게 됐고 다양한 로비스트도 알게 됐죠. 저희 로펌은 그해 1000명의 지원자 중 27명을 뽑았는데, 전 공채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들어온 아주 운 좋은 케이스였죠.   


전 스스로에게 미션을 줬어요. 아주 높은 목표를. 최고의 변호사가 되겠다. 3년 만에 딜 팀의 리더가 되는 것이 제 목표였어요. 보통은 빨라야 5년, 8년은 걸리는 과정이었죠. 약 네 가지 정도의 구체적인 전략을 세웠어요.   

- 첫째, 스스로를 알리기 - 전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게 만들고자 했고, 유명해지기로 했어요. 많은 파티를 열고, 이벤트를 열고, 인기를 얻어갔죠. 매우 예의 바르고, 매우 열심히 일하면서, 아주 웃기는 사람이 돼갔어요. 전 코미디 좋아하고 사람들 웃기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전 정말 유명해졌어요. 
- 둘째, 진짜 열심히 일하기 - 한 달에 300시간 이상씩 일했어요. 따로 개인 삶이 없었죠. 
- 셋째, 주요 사람들과 관계 맺기 - 뱅커들, 다른 변호사들, 사모펀드 투자자들, 큰 회사의 사업개발 담당자들 등과 관계를 맺었어요. 
- 넷째, 자신을 좋은 트랙과 환경으로 몰아가기 - 1년 차 변호사는 매우 작은 일밖에 못 맡아요. 그렇지만 파트너의 사건을 맡거나 거절하거나 할 수 있죠. 전 일부러 팀 리더가 매우 바쁜 사건만 골랐어요. 그래서 아주 초반부터 프로젝트의 중요한 역할들을 맡을 수 있었죠.


그래서 3년 차에, 전 진짜 딜 팀의 리더가 됐어요. 그러고 나서 정말 많은 딜들을 리드했죠. 아주 좋은 리더십 훈련이었어요. 돌이켜 보면 잘했던 것과 못했던 게 극명하게 나뉘어요. 잘했던 건 전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고, 열심히 일하고, 명확하게 일했죠. 하지만 못했던 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와 같은 잣대를 들이대며 몰아붙이고 그들을 믿었다는 거예요. 제 기대치가 너무 높았고, 자율을 줬지만 사람들이 못 따라왔을 때 좌절했어요. 전 모두를 똑같이 대했는데, 리더로서 중요한 덕목은 사람들에 자신을 맞출 줄 아는 거라는 걸 깨달았죠.   


저의 취미는 코미디 쇼였어요. 크리스마스 파티 같은 때에 전 코미디언이 되었죠. 대학교 때부터 갈고닦았던 거예요. 일본 전통극인 “교겐 Kyogen” 이 제 주특기였어요. 코미디는 정말 어려워요. 자신의 관객을 아주 잘 알아야 하죠. 언제 펀치를 날릴지, 언제 쉴지 알아야 해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아주 디테일에 신경 써야 하지만 전 코미디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이 과정에서 제 아내도 만났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같은 로펌에서 만났는데, 아주 조신한 처자예요. 그녀의 서포트로, 전 제 커리어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어요. 겸손하고, 이해심 많고, 사랑 많은 그녀한테서 지금도 많이 배워요. 그리고 대학원에서 강의도 했고 책도 공동저자가 돼서 써보기도 하고 비즈니스 세미나를 열기도 하고 다양한 경험들을 이 시기에 많이 했어요.   


6. 정말 대단하네요. 그래서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이 들던가요? 


파트너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어요. 보통 500명쯤 되는 펌에서 70명 정도가 파트너가 돼요. 전 파트너가 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고 최연소 파트너가 될 목표를 세웠어요. 순조롭게 커리어가 빌딩 되고 있었죠. 하지만 모든 게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에요. 사실 전 많은 것에 저으기 좌절하고 분노하고 있었어요.   

- 첫째, 회사가 고객을 변호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게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회사 운영의 비효율 같은 것도 불만이었던 부분이었고요.    

- 둘째, 수많은 정부 규제와 원시적인 벤처 생태계가 불만이었어요. 일본은 진짜 느려요.     

- 셋째, 일본 회사가 얼마나 세계시장에서 우물 한 개구리인지 일본 회사를 대표해 M&A를 하면서 깨달았어요. 정말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게 제 목표가 됐죠. 국제 비즈니스를 하자. 경영을 하고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를 만들자. 그걸 이해하려면 MBA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건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죠. 로펌에서 MBA를 가는 케이스가 너무 없다 보니 이게 현실 적안 생각인지, 이게 커리어에 도움이 되고 말이 되는지도 불명확했고, 아내의 커리어와 맞추는 것도 어려웠어요. 제 멘토들과 이야기했고 일본의 아주 유명한 기업가들과도 이야기했죠. MBA를 나온 사람, 미국 로스쿨을 나온 사람과 다 이야기해봤어요.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MBA를 가보라고 응원해줬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회의적이었요. 결국은 MBA를 가기로 결단했어요. 도전이 해보고 싶었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보고 싶었죠. 


7. 그렇군요. MBA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전 사람들을 많이 알고자, 의미 있는 관계를 많이 만들고자 했어요. 실제 얼굴 보는 모임을 많이 만들었죠. 1대 1로 얼굴을 보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법,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그걸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그전엔 제 감정을 들여다보고 이야기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해 정말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배웠고요. 디자인 띵킹, 빠른 프로토타이핑, 이런 것도 배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 사람이 다른 미국 사람이나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배웠어요. 일본 사람들은 콤플렉스가 많아요. '우리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못해. 우리는 발표를 못해. ' 하지만 제가 MBA에서 배운건 일본 사람이 특별히 뭘 잘하고 못하고 가 아니라 사람들은 다양하며 다 각자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게 있다는 단순한 진리예요. 이게 저를 모티 베잇 시켜줬어요. 이제는 일본 사람이라서 이런저런 거 못한다는 핑계 따위는 대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일본을 대표해서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졌죠.   


8. 앞으로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요? 


스스로 회사를 해봤다가 망했어요. 정말 어려웠죠. 그만하기로 했어요. 제 친구가 회사를 시작하면서 아이디어와 프로토타입이 있는데 자문을 요청해서 그걸 수락했죠. 2013년에, 노인을 위한 이동수단을 만드는 회사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어요. (WHILL이란 회사에요) 전 결국 로펌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제가 기업가정신, 스타트업에 매우 관심이 많지만, 전 로펌과 일본의 법조계에 또 매우 열정이 있었고 결국 제 고향 같은, 제 첫사랑 같은 곳이니까요. 

오히려 스타트업을 해봤기 때문에 제 법조계에 대한 열정이 더 확실해지고 견고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 우리 회사와 일본 법조계를 뒤흔들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어요. 현존하는 비효율을 없애고, 새로운 서비스 프랙티스를 만들고 회사 경영을 다음 차원으로 업그레이드시키고 싶었죠.   


중기적으론 제 로펌에서 파트너를 달고 이 로펌을 변화시키는 게 목표예요. 아시아의 법조계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장기적으론 제 회사를 하거나 어느 조직의 경영 역할을 맡고 싶어요. 뭔가 거시적이고 국제적인 일을 하는 게 목표예요.   


9. 멘토가 있는지요?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고 왜 그런가요 (What matters most to you and why: WMMW)? 만트라가 있다면? 아직까지 어려운 것은 어떤 부분인가요?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멘토요? 제 멘토는 지로 시라 슈지로라는 사람이에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경제부총리로 일본 경제를 다시 일궈낸 사람이죠. 영국에서 공부했어요 그리고 삶의 ‘원칙'의 중요성을 설파했지요. 전 정말 이 분을 존경하고 저 자신만의 ‘원칙'을 늘 가슴에 새기려 해요.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왜 - WMMW? - 사회에 다시 무언가를 환원하는 거예요. 전 정말 많은걸 받았어요. 가족, 주위 사람 할 것 없이요. 거기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고 만들 수 있는 것까지 만들어서 주위에 더 나누고 싶어요.

 

만트라요? 부시도, 사무라이 정신이에요. Integrity. 항상 자긍심을 가진다. 항상 한결같이 산다. 다른 사람에게 다 이야기할 수 없는 건 절대 하지 않는다. 배고파도 밥을 굶어도 절대 티를 내지 않는다. 이런 거예요. 너무 자부심이 넘치면 오만할 수 있지만, 일단 스스로를 존경하고 존중해야 다른 사람들도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어려운 거요? 여전히 오만함이 어려워요. 아직 일적으로 자신감 없는 것도 많아요. 갈길이 멀어요.   


가장 행복했건 기억이요? 음 몇 개가 있어요. 1. 제 아내 미와가 웃는 걸 보는 거 2.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햇살이 아름답게 빛나는 날 보는 것, 3. 코미디나, 강연이나, 발표를 멋지게 마쳤을 때 4. 사랑하는 친한 친구들과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 마시고 놀 때.    


10. 한국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는 더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세상의 독트린을 만들고 세상을 선도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전 뭔가 새롭고 큰 거를 꿈꿔요. 중국이 부상하고 있는 21세기에, 모든 게 바뀔 거예요. 우리 같이 꿈꾸고 뭔가 같이 해봤으면 해요. 우린 진짜 닮은 것도 많고, 다른 것도 많고, 같이할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아츠시와 나, 2019년 2월 도쿄

아츠시의 삶을 듣고 나니 이 친구가 더 느껴졌다. 아, 아버지의 엄함과, 어머니의 따뜻함/활달함과, 할아버지의 한결같음과, 할머니의 흥까지 이 친구에게 다 있구나. 어려서 1등이 되는것의 중요성을 배우고, 호주에 가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꿈을 키우고, 멘토에게서 호기심의 중요성을 배우고, 일하면서 리더십을 배우고, 코미디를 하면서 관객을 휘어잡고 상대방을 만족시키는걸 배우고, MBA 때 일본인으로서의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스스로에 대해 더 단단해지고, 그렇게 성장하고 있구나. 너무나 똑똑하고 잘나서 거만함이 늘 힘들다는성공을 위해 늘 전략적으로 움직이던 그가 이제는 본인의 감정도 더 알고 공유할수도 있고,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타인도 더 아우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구나. 지로 시라 슈지로 같은 멘토와 부시도 정신이 아츠시를 지탱시키고 있구나. 이런것들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졸업하고 나는 종종 아츠시를 만났다. 친구 결혼식에서, 서로 샌프란 베이 지역에 오거나 내가 아시아에 갈 일이 있을 때. 최근 2019년 2월 일본을 방문한 나를 아주 멋진 식당으로 초대해준 아츠시를 만났다. 아츠시는 원했던 대로 로펌의 최연소 변호사가 되어, 아직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불모지로 여겨지고 있는 테크, 스타트업 쪽 비즈니스 영역을 본인의 스페셜티 중 하나로 가져가고 있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일본에서 만난 다른 테크회사 관계자나 스타트업 사람들과도 다 교류하며 내 눈에는 너무나 멋지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목마르다고. 더 빨리 성장하고 싶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여전히 아츠시는 본인의 약점이나 어려움을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지만 변치 않는 '그만의 단단함'을 풍기고 있었다. 무사도. 배고파도 밥을 굶어도 절대 티를 내지 않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긍지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선뜻 버릴 수 있는 그 사무라이 정신, 여기에 본인과 상대방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인지하고 공감하고 자신의 약함마저 서슴없이 드러내는 Vulnerability/Authenticity 가 더해져, 정말 외유내강의 새로운 일본형 무사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난 언제 이 친구와 한번 신나게 일해볼 수 있을까. 나는 우리는 언제 이 정말 배울 거 많고 깊이로 따지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 민족과 힘을 합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서로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그래 그러면 너무 재미있겠다. 


백산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시리즈 


0. 프롤로그: 기획의도

1. 절제, 가족과 신앙에 충실한 삶이 주는 자유 (카일런 (Kylan Lundeen)의 삶 이야기)

2.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법조계의 시마과장 (아츠시 마츠시다의 삶과 열정) 

3. 가난과 배경을 뚫고 올라가는 개나리같은 에너지 (쉐일리,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1 절제, 가족과 신앙에 충실한 삶이 주는 자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