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일리 (Shalie)의 삶,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내가 쉐일리를 알게 된 것은 2학년때 데이터 분석 수업을 같이 듣고 한팀이 되면서부터이다. 다른 예쁘장한 백인 여성과는 다른 털털함과 거침없는 성격 탓인지 우리는 곧 친한 친구가 되어 서로 막말(?)도 하고 어깨도 툭툭 치고받는 부담 없는 사이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Shalie는 MBA에서 만난 여자들 중 유일하게 나랑 서로를 어이친구(Dude)라고 부르는 사이로 남아있다. 그녀의 에너지와 밝음은 왕궁 정원에서 핀 꽃 같은 느낌이 아니라 길거리 모퉁이에서 핀 개나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2013년 봄 내가 기획한 한국 트립에 참석해서 한국에서 즐거운 시간을 같이 보내기도 했다. 알면 알수록 더욱 그녀의 삶이 궁금해지던 나의 호기심은 책을 쓴다는 핑계로 드디어 충족될 수 있었다. 자 이제 그녀의 삶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산 – 본인 소개를 간단히 해주시겠어요? 성장배경 같은 것 중심으로요.
전 캔저스(Kansas)라는 미국 정 중부에 위치한 인구 약 3백만의 그다지 번잡하지 않는 주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부모님은 모두 캔저스 출신이었고 친척들도 마찬가지예요. 부모님은 아주 작은 마을에서 자랐는데 캔자스 주 주립대학에서 만나서 결혼했어요. 결혼 후에 아버지의 부모님이 계신 Dodge라는 도시로 이사오셔서 거기서 쭉 사셨죠. 제가 자란 곳이 바로 그곳이에요. 아버지는 집을 설계해주는 일을 하셨어요. 어느 회사를 다니신 게 아니라 프로젝트가 있으면 일하는 프리랜서였죠. 아버지는 그 일을 정말 좋아하셨고 열심히 하셨어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집도 아버지가 디자인 한 집이었어요.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셨죠.
어렸을 때 전 탤런트 쇼에 나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도시에서 우승해서 주로 가고 나중에 전국 대회에 나가기도 했죠. “Some where over the rainbow” 이 노래를 불렀어요. 500명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죠. 주 대회를 우승해서 Miss Kansas가 됐는데 그 이상은 못 갔죠. 엄청 실망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진짜 재밌었던 추억이에요. 제게 자신감을 심어줬죠.
전 매우 와일드한 여자였어요. 운동을 엄청 많이 했죠. 최초의 미식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여자들보다는 남자들과 주로 어울리는 터프한 편에 속했죠. 네 살 어린 여동생과도 친구처럼 늘 잘 지냈고요.
제가 8학년 때, 경제가 전체적으로 매우 안 좋아졌어요. 아버지의 비즈니스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죠. 처음엔 몰랐어요. 아버지는 철저히 집에서는 일 이야기하지 않고 밝은 모습이셨으니까요. 하루는 학교에 갔는데 친구가 ‘너희 아버지 비즈니스가 완전히 망했다며?” 이러는 거예요. 너무 충격받아서 집에 와서 아버지한테 이야기하자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정말 미안하구나. 마음이 너무 아프구나. 네가 알면 안 되는 건데.’ 그래도 부모님은 늘 밝은 모습을 유지하셨어요. 바보 같은 노래를 마당에서 부르고, 도넛 숍을 열고 그래 가면서요. 최선을 다해서 저희를 안심시키고 즐겁게 해주시려고 하는게 늘 느껴졌죠.
전혀 몰랐어요. 그런 어려운 일이 있었군요. 매우 힘드셨겠어요.
고등학교에 갔을 때, 우리 집이 완전 부도난 게 매우 명백해졌죠. 전 여름마다 치어리더 유니폼을 입고 여기저기서 일했어요. 네, 치어리더 유니폼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돈을 벌어야 했죠. 전 절대 이걸 집에 알리지 않았어요. 제 친구들도 아무도 몰랐어요.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죠.
엄마는 끝까지 일하지 않았어요. 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죠. 그렇게 상황이 어려웠는데요. 저흰 한 번도 휴가를 간 적이 없어요. 외식을 한적도 없죠. 그렇지만 아버지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뭐든지 했죠.
전 정말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아버지와 정말 단단하고 강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요. 특히 “모든 것에는 때가 있으니 너무 안되는 거 되게 하려고 용쓰지 말고 매 순간을 즐겨라"라는 철학을 가르쳐 주셨죠. 제가 6살 때, 레모네이드 스탠드를 열어서 $20를 벌었어요. 그걸 가지고 제가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자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모든 것에는 때가 있어 쉐일리. 조금만 기다리자꾸나.” 고등학교 때, 제가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우리 가족 모두가 힘들 때도 저와 단둘이 있을 때 말씀하셨어요. “힘들지? 조금만 참자꾸나. 모든 것엔 때가 있지 않니. 고맙다 딸아.” 대학교에 갔을 때, 저를 기숙사에 내려주면서도 말씀하셨죠. 이건 지금도 제 만트라예요.
“모든 계절엔 그때가 있단다. 너무 애쓰지 말렴. 순간을 즐겨. 지금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즐기지 않으면 그걸 놓쳐버린단다.”
대단하네요 존경스럽습니다. 대학교에 가서는 뭐가 바뀌었나요?
전 정말 독립하고 싶었어요. 일단 집을 벗어나 떠난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대학교를 가면서 독립했죠. 집은 여전히 어려웠어요. 하루는 집에 전화했는데 동생이 없는 거예요. 할머니 집에 샤워하러 갔다는 걸 알게 됐죠. 집에 전기와 난방이 끊겼던 거예요. 누구도 저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았죠.
전 학비를 벌기 위해 엄청나게 많이 일했어요. 주말엔 조교를 했죠. 주중엔 야구장을 청소하고, 박물관에서 춤을 추기도 했어요. 저녁 8시부터 새벽 3시까지는 바에서 일했어요. 그리고 씹는담배 광고모델을 한적도 있어요. 엄청 짧은 청바지를 입고 카우보이 걸처럼 입고 광고도 찍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케터로서 활동했죠. 불평할 럭셔리도 없었어요. 힘들거나 지칠 때면 스스로 되뇌었죠. "평생 이렇지는 않을 거야. 이 또한 지나갈 거야. 여기서 분명 배울 게 있을 거야. 즐기자."
대학교 때 처음으로 조금 더 ‘여성’적이 되었어요. 여자들이 들어가는 기숙사 (Sorority) 에도 들어갔죠. 여자가 된다는 것의 느낌과 가치를 처음으로 느꼈어요. 기숙사에서 만난 여자 친구들이 어떻게 ‘여성'이 되는지 가르쳐줬죠. 전 마케팅을 공부했어요. 스포츠 마케팅이 아주 재밌게 느껴졌죠. 사람들이 재밌고 에너지도 많고요. 그러다가 재무 쪽으로 전공을 바꿨어요. 마케팅은 솔직히 저에게 별로 도전이 되지 못했어요. 졸업하는 즈음에 GMAT 시험을 미리 봐 놓자는 생각이 들었죠. 처음 성적은 별로였어요 시험 이틀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전 너무 슬퍼서 시험을 망쳤어요. 두 번째에서야 만족할만한 성적을 얻을 수 있었죠.
대학교 때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교수님들이에요. 전 늘 독립적이었죠. 뭔가를 강요받아서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알아서 했지. 영문학 교수님 중 하나가 저한테 그런 말을 해줬죠. 너한텐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에 대한 투지와 태도가 느껴진다고. 그 말씀이 많이 위로가 되고 감사했어요. 재무 교수님 중에 한 분은 저보고 박사과정을 권하셨죠. 전 그분을 참 존경했고, 지적인 도전도 흥미가 생기고 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하지만 고민 끝에 세상에 더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박사과정에 대한 마음을 접었죠.
그렇군요. 첫 직장은 어땠나요?
전 제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몰랐어요. 그냥 일단 무조건 캔자스를 벗어나고 싶었죠. 나머지 세상에 대해서 너무 몰랐기에 그냥 뿌옇게 느껴졌어요. 저한테 더 큰 세상을 보여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스스로 생각했어요. 그래 이제 때가 됐어. 더 큰 세상으로 가자.
제 친구 중 하나가 Sabre란 회사에서 일했는데 거길 좋아했어요. 그래서 면접을 봤죠.
전 저녁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바에서 일하고, 아침 6시 반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면접을 봤어요. 산전수전 다 겪었던 터라 긴장도 하나도 안됐어요.
합격통보를 받고 Sabre에서 일하러 달라스로 갔어요. Sabre의 재무 팀에서 일했죠.
설명: Sabre 란 회사는 항공권 예약서비스 카약에 검색엔진을 제공하는 등, 항공/숙박 업계에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이다.
Sabre는 만 오천 명 있는 큰 조직이었지만 전 곧 인정받고 CEO/CFO와 매우 가까이 일했어요. 운이 좋았죠. CEO가 저희 대학 출신이었고, 제가 팀에서 거의 유일한 여자였던 게 저를 unique 하게 만들어줬죠. 제가 엄청 열정적이고 열심히 일했것도 한몫했던 것 같아요. 전 하나의 팀과 컬처를 만들어가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전혀 두렵지도 않았고 아주 재밌었죠.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아요. 재무팀에 “기부 이벤트"를 기획하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회사 사회참여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차원이었고 직원들에게 자원봉사 기회를 주는 거였는데 제가 기획하고 총괄했죠. CFO가 리더십 디벨롭먼트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도 같이했어요. 재무팀과 인사팀과 같이 만들었죠.
몇 년 일하다 보니 MBA가 가고 싶어 졌어요. 더 큰 세상이 보고 싶고 더 도전하고 싶었죠. 제가 워낙에 열심히 일했고 CEO와도 업무 외적으로도 친했기 때문에 흔쾌히 추천서를 써줬어요. 그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렇게 MBA를 오게 된 거군요.
여러 학교에 넣었는데 스탠퍼드와 하버드는 진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넣어봤어요. GMAT 점수도 괜찮고 저희 대표한테 추천사도 받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제가 스탠퍼드와 하버드MBA에 동시에 합격한 거에요. 믿을 수가 없었죠. 상상해본 적도 없어요. 제 한계 밖이라고 생각했죠. 제 주위 누구도 이런 걸 보여준 적이 없어요. 제가 이야기했을 때도 아무도 안 믿었죠. 실제 제가 나온 캔저스 주립대에서 스탠퍼드와 하버드 MBA에 다 붙은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희 대학은 전미순위 100위권 밖이었으니까요. 제가 합격하고 스탠퍼드에 가는게 확정되자 캔저스 주립대학의 펀드에서 장학금을 일부 지급하기로 했어요. 그만큼 캔저스 대학에서도 엄청난 소식이었죠. 저희 부모님은 스탠퍼드까지 왔어요 학교를 보고 싶어서요. 가족 모두에게, 친척일가에 다 밑기지 않는 소식이었죠. 정말 엄청 났어요.
학교 입학처에서 제 가능성을 봐준 것 같아요. 전 분명히 불우한 환경에 있었죠. 전 에세이 컨설턴트 같은 게 있는 줄도 몰랐다니까요.
하지만 전 달랐어요. 전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죠. 전 솔직하고 당당하고 에너지 넘쳤어요. 그걸 그들이 봐준 거라고 믿어요.
합격하고 나서 다짐했어요. 여기까지 올 수 있게, 꿈꿨던 것 이상을 경험하게 해 준 것들을 잊지 말자. 나한테 5분, 10분 투자해준 사람을 잊지 말자.
나도 5분씩만 다른사람들에게 투자해서 그 사람들을 스페셜하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다짐했어요.
MBA생활은 어떠셨는지요?
전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지만 사실 내향적인 (Intravert) 면이 많은 사람이에요. 혼자 있는 시간에 에너지를 얻고 하죠.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고 이야기를 해야 하고 하는 환경이 숨 막힐 때도 많았어요. 재밌는 것 많고 좋은 친구들 만나는 건 참 좋지만요. 전 정말 깊은 인간관계를 갈망하는 거 같아요.
그 전엔 전 제 사적인, 개인적인 삶과 직장에서의 삶을 철저히 분리하며 살아왔어요. 직장이나 학교에서는 저희 집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몰랐고, 저희 집에선 제가 회사나 학교에서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돈을 벌고 사는지 전혀 몰랐죠. GSB때는 그런 경계가 허물어지는 게 느껴졌어요. 많이 자유로워지는 걸 느꼈죠.
그렇지만 친구들과 진짜 친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어요. 정작 가장 큰 걸림돌은 제 자신에게 있었죠.
너무 멋지고 잘난, 다 아이비리그(Ivy league) 나오고 집안도 좋은 친구들 보면서 제 출신이 부끄러웠던 거예요.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어요. 제 과거와 제 출신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니까요.
그걸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었나요?
터치 필리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됐어요.
아. 내가 그렇게 나의 속마음을, 나의 부끄러운 마음을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았구나. 난 그다지 Vulnerable하지 않았구나.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친구들로 하여금 나에게 다가오길 어렵게 만들고 있구나.
또 하나 깨달은 건 저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저마다 문제가 다 있었죠. 그걸 알고 나자 제 상처가 치유되는 게 느껴졌어요. 자유로워지는 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나선 정말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고, 제 과거도 친구들에게 편안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더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죠.
설명: 터치필리 (본 이름: Interpersonal Dynamics) 수업은 스탠퍼드 MBA의 가장 대표적인 수업중에 하나로 거의 모두가 듣는다. 약 12명의 그룹과 2명의 전문트레이닝 받은 사회자로 구성되어 1주일에 6시간씩 특별한 주제 없이 본인의 감정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대화 중심 세미나이다. (한 주말에는 주말 내내, 즉 약 20시간 동안 이걸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은 그 안에서만 이야기하도록 하는게 보통이며 그런 환경조성과 세팅의 특수성으로 도저히 평소에는 하지 않는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들이 오간다. "What women want" 에서 맬 깁슨이 상대방 마음을 읽었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마음과 감정이 다 드러나는 수업이랄까. 더 자세한건 이글 참고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정말. 이제 무얼 하고 싶으신가요?
전 장기적으론 COO가 되고 싶어요. 전 사람들과 일하는 게 좋아요. 다른 사람들이 좋은 시간을 갖게 하는 게 제 꿈이에요. 제가 5분 더 투자해서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본인의 일을 즐길 수 있다면 저한테 그만한 보람은 잘 없는 것 같아요.
전 일할 거예요. 열심히 일할 거예요. 전 열심히 일한 다는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I'm proud of being a hard worker) 저희 집에 일어났던 일을, 지긋지긋한 그 가난을 전 평생 잊을 수 없어요. 누군가에게 의존적이 되지 않는 게 저에겐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전 엄마가 되고 싶어요.
당장은 테크 기업에서 전략적인 일을 해보고 싶어요. 뭔가 도전적이고 발전적이고 새로운 일들을요. 전 별로 계획을 만들지 않아요. 계획되고 된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계획 같은 거 잘 안 믿어요.
인생에서 실패라고 생각되는 게 있나요?
전 모든 걸 되게 만들려는, 모든걸 정상 상태로 관리하고 유지하려는 경향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어있어요. 가난한 집에서 첫째로 자라면서 아버지의 아픔을 너무나 느꼈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사실 정상적이지도 평화롭지 않았어요. 전 제 동생을 충분히 보호하지 않았어요. 그냥 떠났죠. 저부터 살고 싶었으니까요. 제 동생은 저와 달리 그다지 독립적이지 않았어요. 그게 지금도 너무 마음이 아파요.
또 제가 스스로를 너무 궁지로 몰아가고 너무 몰아치면 약해지는 걸 느껴요. 전 싫다고, 어렵다고, 괜찮으니 됐다고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에요. 그렇다 보니 거절을 못해서 궁지에 몰릴 때가 종종 있었죠.
만트라가 있나요?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그냥 순간을 즐기자.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 모든 걸 다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걸 다 한꺼번에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 이 아버지의 가르침이 제 만트라이자 제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이 가르침이 있었기에 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수 있었죠. 이 만트라가 제 삶에 ‘이야깃거리'를 줬어요.
한국이요? 한국은 직접 와서 보니 너무너무 멋진 나라예요. 선배가 후배한테 밥 사 주고 술 사주는 이런 거 전 처음 봤어요. 로열티, 너무 멋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MBA졸업, 그후 6년
쉐일리의 삶을 듣고 나니 왜 그녀가 편했는지 알수 있었다. 난 MBA기간 중 수많은 인종/성별의 조합중 백인 여성에게 서스름없이 다가가고 친해지는게 참 어려웠는데, 이유인즉슨 왠지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을것 같다는 나의 열등감 (insecurity) 때문이었다. 하지만 쉐일리에게선 그런 아우라를 조금도 느낄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린 금방 친해졌다. 서로에게서 비슷한 색을 느꼈달까. 두려움 없는 저돌성, 밝은 생기, 그리고 성장을 향한 뿌리깊은 욕구와 에너지, 이런 것들을.
졸업후 쉐일리는 거짓말처럼 본인이 말한걸 다 이뤄가고 있다. MBA 인턴을 했던 Box에 들어가서 Sr. Manager, Director. Sr. Director으로 고속 승진해가고 있고.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나아서 일하면서 씩씩하게 아기도 키우고 있다. 서로 바쁘고 소셜 서클과 일하는 반경이 다르다 보니 맘처럼 쉐일리를 잘 보지는 못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만났다. 만나자마자 서로 수다가 터져서 실컷 이야기했다. 난 Box가 성장하면서 쉐일리가 한 일들이 많이 궁금해서 많이 물어봤다.
"처음엔 재무팀에 있었어. 계속 숫자를 보면서 이런저런 역할을 했지. 열심히 했어 알잖아 내 스타일. 그래서 회사가 성장하면서 계속 승진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지금은 CEO Aaron의 Chief of staff 이자 Business Operations의 헤드로 일하고 있어. 너도 이런 역할 너무 잘 어울리는데. 내가 하는 게 뭐냐고? 크게 세가 지야. 첫째, 회사 전체의 KPI와 루틴을 만들어서 비즈니스가 잘 굴러갈 수 있게, 어떤 숫자를 보고 어떤 미팅을 해서 문제 상황을 그때그때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거지. COO와도 같이 많이 일했어 이걸 세팅하기 위해. 처음엔 많이 안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한 90% 된 것 같아. 둘째, 스페셜 프로젝트를 해. 예를들면 얼마전에 한 컨퍼런스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리드한거였어. 마지막으로, CEO와 다른 리더십 팀 및 다른 팀들을 연결하는 역할 맡아. 모두가 대표와 이야기하기 어려워하는데, 그럴때 나를 통하지. 대표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려우면 나한테 이야기하고, 나한테 피드백을 물어보고 그래. 알잖아 내가 이런거 좀 하는거 (웃음).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어. 이젠 좀더 고객을 상대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 그게 다음 해보고 싶은 일이야."
그래 오랜만에 만난 쉐일리에게 또 많이 배웠다. 5분 투자해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게 아니라 내게는 한 시간 가까이 열변을 토하며 도와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리고 정말 쉐일리 답게 일하고 있다는게 느껴져서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아래는 쉐일리의 동료가 쉐일리 링크딘에 남긴 추천사이다.
전 쉐일리와 Box에서 여러가지 일을 같이 했어요. 처음엔 쉐일리가 재무분석을 할 때였고, 두번째는 Chief of staff (대표 수석)을 할 때였죠. 전 쉐일리랑 일할때 늘 감탄했어요. 누구보다 빨리 일을 습득하고, 똑똑하고, 정말 열심히 일하고, 드라마가 없어요. 쉐일리는 매우 자기고집과 주관이 강한 임원진과 일하면서 거의 큰 문제 없이 모든일들을 조율했죠. 엄청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I've worked with Shalie in several roles at Box, first when she was in SP&A as an analyst and second as Chief of Staff. I've always been very impressed. Shalie is an incredibly quick learner, very intelligent, extremely high work ethic, and low drama. She handles tough situations and ambiguous situations with a great deal of thoughtfulness and grace. In her CoS role, she added a huge dose of operational discipline and order to a typically high energy and strong willed executive group, with very little friction or disagreement. Very well rounded and competent individual.)
그녀의 부모님은, 특히 그녀의 아버님은 얼마나 그녀를 자랑스러워 하실까. 딸가진 부모로서, 우리 딸이 쉐일리 처럼 당차게, 거침없이, 그렇지만 따뜻하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본다. 그녀의 삶을 진심으로 기대하고 응원한다. 잘 자란 장미가 아니라, 온실에서 자란 화초가 아니라, 정적인 정원의 난이 아니라, 그녀는 정말 들판에 핀 개나리 같다. 특별한 개나리. 본인의 한계를 끊임없이 뛰어넘는. 그러면서도 조급해하지 않고 늘 순간을 즐기는. 이렇게 또 서로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다가 만나서 "어이 친구 (Dude)"를 불러가며, 어깨 툭툭 쳐가며 삶의 진짜 이야기들을 또 나눌 것을 기대해본다.
백산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시리즈
1. 절제, 가족과 신앙에 충실한 삶이 주는 자유 (카일런 (Kylan Lundeen)의 삶 이야기)
2.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법조계의 시마과장 (아츠시 마츠시다의 삶과 열정)
3. 가난과 배경을 뚫고 올라가는 개나리같은 에너지 (쉐일리,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