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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Baek 백산 Apr 06. 2019

#4 부모님께 배운 사랑과 가치, 세상과 나누고 싶어요

타인을 사랑할 때 진짜 '사람'이 된 것을 느껴요. 니나 샌덜 슨

MBA때 만난 거의 400명 가까운 동기 중에, 유독 돋보이는, 거짓말같이 항상 따뜻하게 해바라기처럼 웃는 한 친구가 있었다. 항상, 무슨 일이 있어도 니나는 밝게 웃었고, 언제나 따뜻했고 언제나 겸손했다. 불평은커녕 부정적인 말이나 생각조차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늘 순수한 밟음의 에너지 그 자체였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저 웃음은, 저 따뜻함은 과연 진짤까? 혹시 조금이라도 가식이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진짜라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친구가 되어 알게 된 니나는 수줍음도 꽤 많고, 보통 MBA 미국 친구들만큼 대화를 주도하거나 (dominant) 외향적이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저 한결같았다. 엠비에이에서 대부분의 동기들이 신나고 흥미진진한, 더 풍요로운 커리어를 쫓거나, 코딩 같은 새로운 배움을 쫓을때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늘 친절했던 그녀에게 다가가 내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 (책을 써서 사람들의 삶을 알리는 것)를 이야기하자, 그녀는 기꺼이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오픈해줬다. 자 이제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의 삶과 내면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니나와 니나의 남편, 맷
산 - 본인 소개를 간단히 해주시겠어요? 성장배경 중심으로요.   


전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에서 자랐어요. 보수적인 남부 지역이고,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기독교인이죠. 작은 마을이었죠. 우리 부모님은 서로 많이 달랐지만 같이 좋아하시는 게 있었는데 여행이에요. 두 분은 유럽에서 여행을 하다가 만났죠. 원래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이셨는데, 더 넓은 세상을 실컷 경험하시고 나서 다시 고향으로 와서 정착하셨어요.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시다가 나중에 선생님이 되셨고 어머니는 유치원 미술 선생님이셨어요. 부자는 아니었지만 캠핑도 다니고 승마도 하고 자연에서 많이 놀았어요. 전 외동이었는데 매우 행복한 아이였어요. 저를 가졌을 때 어머니 나이가 36세 셨으니 부모님과 나이 차이도 꽤 있었지만 저와 부모님은 정말 사이가 가까웠죠. 전 항상 평화와 조화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전형적인 남부 꼬마 숙녀 여자였죠.


노스 캐롤라이나 전경


저희 부모님은 '믿음'으로 사시는 분들이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임신한 지 7개월 됐을 때, 출산을 얼마 남기지 않고 저희 부모님은 사시던 집에서 쫓겨나셨어요. 키우던 세라라는 개가 마침 같은 시기에 임신을 해서 5마리의 강아지를 낳았는데, 집주인이 강아지가 집을 어지럽히는 꼴을 보다 못해 개들을 다 계속 키우려면 나가라고 했다고 해요. 그렇지만 부모님은 우리 가족 같은 세라와 강아지들, 그리고 곧 태어날 저를 위해 집을 나가는 결정을 내렸죠.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었지만요. '믿음' 이 있었다고 해요. 믿음이 있고, 신념이 있고, 열심히 정도를 지키면 분명히 길이 있다고 늘 믿고 실천하며 사셨어요. 그리고 친구 부부가 부모님을 받아줬고, 두 분은 결국 시골마을에 완전히 버려진 집을 하나 찾아서 매일같이 밤에 가서 그 집을 개조하기 시작했죠. 그게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두 분이 저를 위해 희생하신 거죠.


저의 어린 시절은 항상 '가족들'에 둘러싸여 산 정말 행복 그 자체였어요.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모두가 가족이었죠. 제게는 크게 세 개의 가족이 있었어요. 첫째 가족은 부모님과 저, 그리고 강아지들이었고요. 둘째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수많은 친척들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열두 형제의 막내였는데 모든 형제들이 친척들이 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서, 작은 시골마을의 거의 절반은 제 직계 친척이었죠. 사실 나머지 절반도 워낙 가족같이 지내고 삼촌, 숙모라고 부르는 사이라 시골마을 전체가 가족 같았어요. 세 번째 가족은 저희 집으로 저희가 데리고 온 이웃들이에요. 제게 있어 가족이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공동체인데, 저희 집에는 부모님이 데려오는 이웃들이 늘 있었고 저희는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했거든요.


참 따뜻한 부모님이고 환경이네요. 마치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가장 아름답고 전형적인 미국 남부 가정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웃들을 늘 집으로 데려왔다고요?


네. 저희 부모님은 늘 두 가지 가치를 정말 강조하고 직접 모범을 보였어요.


첫째는 물질주의에, 세속주의에 대한 경계예요. (Anti materialism)

부모님은 돈을 정말 우선시하지 않았죠. 본인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걸 했어요. 물질은 우리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다고 늘 이야기했고 직접 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어요. 일례로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가족과의 시간을 더 중요시해서 기회를 고사했죠. 사회적 지위에 연연하지 않았어요.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돕는 삶이에요.

우리에게 집이 생기고 나서 우리 집에는 늘 누군가 드나들고 살기도 했어요. 제가 6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교회에 '디디'라는 새로운 여자가 하나 왔는데 갈 데가 없는 딱한 처지였어요. 결국 저희 집에서 1년간 살게 됐고, 전 제방을 내주고 마루 소파에서 1년간 잤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말도 마세요. 어느 날 엄마가 저한테 와서 이러는 거예요.


‘우리에게 누군가를 섬길 수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어. 너에게 이 누군가에게 축복을 주고 선물을 줄 기회가 있어. 택하겠니? 이 기회를 선택하겠니?”

마치 이게, 제게 주어진 아주 큰 기회이고 선물인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그랬고요, 어머니는 제게 물어보셨고 제 의견을 존중하셨어요. 제가 싫다고 하면 안 하셨을 거를 저는 알아요. 그래서 저는 더 기쁜 마음으로 제 방을 1년간 모르는 사람에게 내줄 수 있었어요. 한 번도 손해 본다거나 희생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죠. 한 번이 아니었어요. 저희 집에 있다간 사람이 참 많았죠. 다 부모님 덕분이에요. 부모님은 신앙생활, 인간관계, 주위 사람들과 사랑하며 사는 삶, 정말 이걸 우선시하셨어요.


거짓말 같은 이야기네요. 저라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돌아보게 되네요. 학교 생활은 어땠나요?


전 사립학교를 갔어요. 아주 사랑이 많고 서포티브 한 환경이었어요. 축복받았죠. 많이 놀고, 틀에 박히지 않은 교육환경이었어요. 주위 친구들은 다 여유 넘치고 좀 게으르기까지 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남부 사람 전형적인 모습이죠. 여자 친구들의 경우 대부분은 고향에 남아서, 선생님이 되거나 간호사가 될 생각을 하는, 여자는 다 좋은 남편 만나서 선생님/간호사 같은 일을 하며 애들을 잘 키우는 게 너무나 당연한, 주위에 그런 사람만 있는, 그런 곳이었어요.  


하지만 전 조금 달랐어요. 아주 의욕 넘치는 면이 있었죠. 제 스스로에게 높은 기준을 들이대고 그걸 달성하려 노력했죠. 이건 좀 천성이었던 거 같아요. 도전하고 극복하는 게 너무나 재밌었어요. 그렇지만 그걸 드러내는 게 불안했죠.


사실 전 두 삶을 살고 있었어요. 저희 부모님도 전형적인 남부 보수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죠. 저희 부모님은 채식주의자에, 명상을 좋아하고, 히피하게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었어요. 전 학교 친구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두려웠어요.


학교에 가면 늘 '착하고 순종적인 남부 숙녀 (Sweat Southern Nina)'를 연기했죠. '똑똑하고 도전하기 좋아하고 히피 기질 있는 니나 (Smart hippy Nena) '의 모습은 늘 숨겼어요. 그런 모습을 드러내면 왠지 미움받거나 배척받을 것 같아서 두려웠어요.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제가 채식주의자 인걸 친구들에게 숨긴 거예요. 남부에서 채식주의자는 거의 상상할 수 없어요. 모두가 정말 늘 고기를 달고 사는데 어느 날부터 소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채식주의가 되었는데, 괜히 주위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고 숨겼어요. 이런 식이 었어요. 햄버거가 나오면 햄버거를 먹는 척하다가 몰래 도망가서 햄버거 패티를 버리고 나머지만 먹는 그런 거죠.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수학을 친구들에 비해 너무 잘해서, 8학년 때 선생님이 10학년 수학을 듣게 해 줬죠. 고등학교 수학 수업을 듣고 오곤 했는데, 그걸 친구들에게 철저히 숨겼어요. 제가 똑똑한 게 알려지는걸 전혀 원하지 않았죠. 전 그런 성격이었어요.


전 사실 그냥 평생 그런 '착하고 순종적인 남부 숙녀'로 살 생각이었어요. 당시 데이트하는, 곧 해병대에 입대하는 남자 친구와 결혼해서,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교회에 다니며 아기 낳고 잘 키우며 남편과 애들을 보살피는 그런 삶을 살 계획이었죠. 그런데 부모님은 생각이 달랐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부모님이 제게 개입했어요. 그들은 제게 다른 모습이 있는 걸 알았죠. '똑똑하고 도전적이고 히피 한' 모습을요. 부모님이 제게 말씀하셨어요.


"니나야, 넌 한 번도 진짜 도전받아 본 적이 없잖아. 한번 도전해봐. 더 큰 세상을 보고 느껴봐. 분명 네가 모르는 세상이 열릴 거야"

부모님 등에 떠밀려서 지원한 곳이 듀크대학이에요. 전 제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안 했는데 덜커덕 합격했어요. 겁부터 났고 가기 싫었는데, 아버지가 딱 한 번만 자기를 믿고 캠퍼스에 가보자고 했죠. 그게 제 삶을 바꿨어요. 전 첫눈에 그곳이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제 첫 관문임을 느꼈어요.


채식주의자로서 한 번도 내색을 안 했다니, 정말 니나 답네요. 대학생활은 어땠나요?


듀크는 정말 눈이 번쩍 띄어지는, 삶이 바뀌는 경험이었어요. "똑똑하고 의욕 넘치는 히피 한 니나"가 마음껏 나오기 시작했죠. 이제 이걸 보여줘도 되는구나. 사람들이 그걸 챌린지 해주는구나. 거기서 만난 친구들은 이런 저의 모습을, 그리고 서로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응원해줬죠. 그리고 모두가 눈이 반짝반짝하며 삶에 대한 호기심과 의지, 열정으로 넘쳤어요. 매우 전염성 있었죠. 제 베스트 프렌드도 만들게 됐고 저의 멘토가 돼준 선생님도 만났어요. 저도 꿈꾸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나서야 제 주위에, 제 고향 친구들한테 숨겨뒀던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내가 듀크대학에 갔다고. 이때부터 저의 "엘리베이터" 타는 듯한 급성장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그래 갈 데까지 가보겠어, 이렇게 다짐했어요.


학교를 다니면서 한 단체를 친구들과 만들었어요. 기회가 충분치 않은 학생들을 도와주는 학교 같은 개념이었죠. 초등학생을 위한 과외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듀크대 학생들과 1:1 버디 시스템을 운영했어요. 너무나 즐거웠어요.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겼죠. 아 내가 무언가를 만들 수 있구나. 내가 사람들을 리드할 수 있구나. 그리고 그런 못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많이 가졌는지, 내 가정환경이 얼마나 복 받은 건지 다시 돌아보고 감사할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한 명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똑똑히 보고 느꼈어요.
정말 멋진 경험이었던 것 같네요. 첫 직장은 어떠셨나요?


전 세상을 누비며 멋진 일을 하는 커리어 우먼이 돼보고 싶었어요. 제가 뭘 잘하는지 세상에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고 새로운 도전을 찾고 있었죠. 비즈니스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했고요. 대학교 때 학자금 대출 빚이 워낙 많아서 빚도 갚아야 했죠. 그래서 찾게 된 직장이 보스턴 컨설팅 그룹 Boston Cusulting Group (BCG)이에요.


정말 좋았어요. 아주 많이 배웠어요. 진짜 처음으로 제 한계까지 간 것 같아요. 너무나 배울게 많고 너무나 요구되는 게 많았기에 더 많이 배우고 느꼈어요.


전 늘 미국 내에만 있었고 미국 문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더 큰 세계가 보고 싶었죠. 프로젝트 중에 두바이에 가는 게 있었는데 (신용카드 프로젝트였어요) 그때 처음으로 중동을 가봤어요. 새로운 눈이 뜨이는, 새로운 스스로를 만나는 경험이었어요. 처음엔 중동에 가면 여자로서 할 수 있는 게 매우 제한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왠 걸요, 전 살면서 처음으로 완전히 '자유'로워 진 것을 느꼈어요. 히잡도 안 쓰고, 남들보다 키도 큰 백인의 금발 여자로서 전 어딜 가나 완전히 눈에 뜨이는 존재였죠. 이때 깨달았어요.

아 난 평생 주위에 잘 스며들려고, 튀지 않으려고, 주위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가장 상황에 '적절한 행동'을 하려고 살아왔구나. 두바이에선 그런 역할을 하는 게 불가능했던 거예요. 그래서 제 진짜 생각을, 제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됐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오히려 저를 더 존중해주고 제 말을 더 귀 기울여 듣는 거예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기억이 있어요. 두바이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클라이언트가 '크리켓'을 같이 꼭 한번 하자고 권했죠. 전 운동 젬병이에요. 미국에서, 늘 얌전하고 조신하게 숙녀로서 행동하는 저로선 땀 흘리고 크리켓을 하며 망가지는 스스로를 상상할 수 없었죠. 하지만 두바이에서 전 있는 그대로 운동장을 뒹굴었어요. 새로운 눈이 뜨이고 새로운 자아가 열리는 경험이었어요.


그렇군요. 성장하는 게 느껴지네요. 또 어떤 것을 느끼셨나요?


BCG 덕분에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눈이 뜨이고, 저 스스로에 대해서도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들이 있었어요. 새로운 나라에 가서 혼자 호텔방에서 스스로를 돌아봤죠. 18년간 대학 가기 전까지, 제가 연기했던 그 순하고 따뜻한 남부 여성의 모습, 그리고 지금 세계를 누비며 컨설턴트로서 부모님 두 분이 버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는 제 모습. 이런 삶과 직업이 있는지도, 가능한지도 몰랐던 터라, 가끔씩 스스로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어요. 그리고 계속 이렇게 살 수도 있을 것 같았죠. 커리어우먼으로서 잘 해낼 자신도 있었어요.


하지만 왜? 무엇을 위해서? 가슴 깊숙한 곳에 공허함이 있었어요.

저는 한 번도 돈을 쫓아살아 본 적이 없어요. 부모님도 한 번도 그러시지 않았고요. 컨설턴트로서의 커리어에 돈 이상의 것이 분명 있었고 일도 정말 재미있었지만 뭔가가 빠져있다고 느껴졌어요.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본 가난한 사람들, 엄마들,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죠. 중동에서, 세상의 다양한 곳에서 전 정말 생생한 가난을 목격했어요. 전 컨설턴트로서 좋은 호텔에서 자고 좋은 차를 타고 멋진 곳으로 일하러 가고 있었는 제, 창밖에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먹을 것을 위해 극한의 환경에서 살고 있었죠. 아, 내가 있는 이 안락한 곳이 아니라 저들에게로 가고 싶다. 저들에게 가서 같이 지내면서 저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됐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더 명확해졌죠.


중동 프로젝트를 끝내고 미국에 다시 돌아왔는데 르완다에 꽤 장기로 갈 수 있는 국제개발 프로젝트 기회가 있었어요. 바로 지원했죠.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이때 전 대학 동기이자 같이 BCG에서 일하고 있던 맷과 데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중동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제가 또 기약도 없이 아프리카에 가겠다고 한 거예요. 전 당연히 헤어지자고 할 줄 았았는데 맷이 너무 잘됐다고, 같이 가자고 했죠. 그때 알았어요.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 이 사람이구나. 근데 이 둔한 남자가 프러포즈 하기까지 3년이나 걸린 것 있죠 (웃음)


르완다는 어떠셨나요?


르완다에 가자마자 제가 고향에 왔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자란 시골마을 같았죠. 커뮤니티, 모두가 이웃이고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고 챙기는 가족 같은 곳. 그런 곳이었어요. 모든 게 매우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곳이었죠. 고향을 떠나 제가 있었던 수많은 곳 중 여기가 가장 고향 같았어요.


제가 했던 일은 르완다 정부와 같이 일하면서 커피 비즈니스를 육성하는 걸 돕는 역할이었어요. 거기에 1년 있었어요. 르완다에는 아주 양질의 커피들이 있어요. 비즈니스만 잘 정착되면 많은 해외 자금이 몰려와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보였는데 현실은 엉망진창이었죠. 삼십만의 커피농장 농부들의 삶이 직결되어 있었죠. 그래서 진짜 열심히 일했어요. 저 혼자만 백인, 서양인이었고 나머진 다 로컬 사람들이었는데, 전 시작하자마자 엄청 큰 역할들을 맡았죠. 그만큼 인재가 없었고 정부에서도 인재에 목말라 있었어요. 르완다의 비료 정책을 만들기도 했고, 커피 비즈니스 전체 플랜을 짜기도 하고, 별의별 일을 다했어요. 처음엔 너무 재밌었는데 나중엔 걱정이 되기 시작했죠. 제가 입안한 비료정책 같은 게 바로 대통령 사인을 받고 실행되는 수준이었으니까요. 이제 갓 24살 먹은, 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제가 만든 정책이요. 마치 제가 수십만 명을 태우고 롤러코스터를 운전하고 있는, 운전면허도 없는 초보 운전자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운전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로 하고 전 돌아오기로 결정했죠. 제가 열심히 일한 덕인지, 조금씩 비즈니스도 더 잡혀가고 있었고, 르완다 정부에선 제가 더 있기를 바라서 아주 오래 있을 수 있는 오퍼를 줬지만 전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렇지만 제 심장은 거기 놔두고 온 것 같았어요. 그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니나가 르완다에서 만난 사람들

돌아와서 게이츠 재단 일도 하면서 MBA를 갈지, 행정학 쪽으로 공부를 더할지 고민하다가 MBA가 더 큰 변화로 가는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MBA를 가기로 결심했죠.


스탠퍼드 MBA (GSB) 경험은 어떠셨나요?  


솔직히 만만치 않았어요. 전 제가 잘못 왔다고까지 처음에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너무 돈을 흥청망청 쓰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어울리기 어렵다고 느꼈죠.


하지만 스스로를 발견하게 도와주고, 저의 리더십을 훈련시키는 부분은 정말 감사해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죠. 제가 가고 싶어 하는 방향도 더 명확해졌어요. 더 자신감이 생겼죠.


여름에 아큐먼 펀드와 함께 케냐, 르완다에 간 건 정말 잘한 결정이었어요. 가자마자 바로 집에, 고향에 온 게 느껴졌죠. 이걸 엄청 내가 그리워했구나. 이 사람들을 내가 진짜 사랑하고 그리워했구나를 느꼈어요.

이 블로그에 나와있는 농업 프로젝트를 온 힘을 다해서 했고 아주 행복한 채로 학교로 돌아왔죠. 거기서 만난 제러널 매니저 (General Manager)는 제가 만난 최고의 멘토 중 하나였어요. 세상에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게 다시 한번 느껴졌어요. 안타까운 마음도 더 커졌죠. 이미 다른 나라에서 다 성공한 비즈니스 모델이 있고 공식이 있는데 그걸 배울 생각을 안 하고 새로 또 다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는 거예요. 비즈니스 모델과 자본이 너무도 부족해서 이미 해결된 문제를 또 처음부터 접근하고 있는 게 (Reinventing the wheel) 가장 답답한 부분이었고 가장 풀고 싶은 문제기도 해요. 그걸 제2학년 때 전교생 앞에서 알리기도 했어요 (아래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VRXB8ESXJ8

니나가 전교생 앞에서 한 발표: 소셜 임팩트를 가속화시키는 새로운 접근


졸업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간다고 알고 있는데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없나요?


사실 전 정말 엄청나게 망설여지고 너무나 두려워요. 돈을 못 벌까 봐 두려운 건 아니에요. 돈은 제게 한 번도 문제가 아니었어요. "거리"가 문제죠.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버지에게 갑자기 문자가 온 거예요. "니나야, 문자를 보면 전화 좀 다오. 급한 일이 있다. 사랑한다. ". 평소에 이런 문자를 하시는 분이 아니기에 무슨 일이 생긴 걸 알았죠. 떨리는 마음으로 조용한 곳에 가서 아버지께 전화했어요. 아버지는 말씀하셨죠. "엄마가 쓰러져서 앰뷸런스에 실려갔었고 많이 놀랬는데 이제 괜찮아. 입원해 계셔. 내일 수술할 거야. 너무 큰 수술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렴. " 그리고 어머니와도 통화했는데 제게 뭔가 다 말을 안 하는 것 같았고, 그냥 엄마 옆으로 가고 싶었죠. 아프리카고 MBA고 뭐고 부모님 옆에 가고 싶었어요. 바로 비행기를 타고 부모님을 보러 갔죠. 다행히 엄마가 수술하기 직전에 도착했고, 엄마도 제가 갑자기 나타나자 너무나 놀랐어요. 그리고 우린 다시 가족으로서 하나가 됐죠.


엄마의 수술은 잘 됐어요. 전 며칠 동안 엄마 옆을 지켰죠. 엄마를 돌보면서요. 전 부모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스탠퍼드로 돌아오는 것은 그렇다 치고 아프리카로 간다는 건 정말 무서워졌죠. 만약 이런 전화를 못 받게 되면? 아니 받아도 아프리카에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과 멀리 떨어진다는 것에 더해 제게는 또 하나의 두려움이 있어요. 우리 부모님, 특히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못될까 봐 두려웠죠. 커리어 우먼으로서 아프리카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돕다가 제 가정은 제대로 꾸리지 못하지 않을까, 앞으로 태어날 내 아들 딸에게 우리 엄마가 한 것처럼 할 수 있을까. 부모님과 이런 두려움들을 이야기했어요.


"엄마, 아빠, 나 진짜 아프리카 가야 할까? 전화 못 받으면 어떻게 해? 내 애들은? 나 BCG로 돌아가면 고장 난 할아버지'세탁기' '건조기' 도 갈아드리고, 우리 부모님 멋진 휴가도 더 보내드릴 수 있을 텐데, 그게 더 맞는 게 아닐까?"


우리 부모님은 저를 듀크대학에 보냈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멋지게 더 성숙한 모습으로 제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셨어요.


엄마: "니나야,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 내가 쓰러지고 앰뷸런스가 왔을 때, 난 이게 하나님이 날 부르시는 거면 정말 아무런 후회 없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주님 곁으로 간다고 기도했어. 내가 걱정됐던 건 오직 너와 니 아버지였지. 그게 너무 걱정됐어. 하지만 난 두렵지 않아. 너도 두려워하지 마. 넌 뭐든 할 수 있어. 가서 뭐든 하렴. "


아빠: "니나야, 난 너의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앞으로 네가 할 일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건 너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가서 해. 우리 걱정은 하지 마. 우린 언제나 여기 있을 테니까."


부모님 덕분에 다시 용기가 생겼고 결심을 굳힐 수 있었어요.

네, 저도 부모님이 가신 길을, 믿음으로 한 발자국 안 보이는 걸음을 내딛는 그 길을 따라가 보려 해요. 아직 커리어냐, 가족이냐, 미국이냐 아프리카냐, 이런 걸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기로 했어요. 제가 이 발자국을 내딛으면, 삶이 제가 상상한 것보다 더 아름답고, 더 충만한 무언가를 제게 보여줄 거라고. 물론, 실패할 수도 있죠. 하지만 실패해도 저를 따뜻하게 받아줄 집이 있고 고향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건 정말 큰 축복이고 은혜라고 느껴요.
아버지와 니나, MBA 건물을 배경으로
분명 그런 삶이 있을 거예요. 제가 많이 감동받고 용기를 얻네요. 앞으로 뭐하고 싶은지, 어떤 만트라가 있는지, 어떤 불안감 (insecurity)이 있는지, 한국 독자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이 있는지, 궁금해요.


결국 앞으로 하고 싶은게 뭐냐고요?


전 직접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요. 제 회사를 언젠가는 시작할 생각이에요.


만트라요?  

저의 만트라는 ‘Compassion’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에요. 우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커넥 하라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을 임파워 (empower) 해줄 때 제안의 인간성이 살아나는 걸 느껴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 사람들을 생각할 때 제가 진짜 ‘사람'이 됐다고 느껴요.


아직 불안하고 해결 안 된 거요?


너무 많죠. 우리 어머니가 제게 기대하는 것과, 제가 하고 싶은 게 다르고, 스스로 얼마나 이쁜지, 얼마나 능력 있는지, 이런 거에 대한 불안감들이 많아요. 살 빼고 싶어서 매우 정신건강에 안 좋게 다이어트한 적도 있죠. 문제 많은 사람이에요.


한국 독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요?

우리의 삶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다는 것. 영감을 주는 대화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들, 아름다운 자연들 같은 것들. 행복은 이런 순간들을 기억하고 누리고 간직하면서 나오지, 이걸 뒤로하고 무언가를 쫓는데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꼭 더 누벼 보세요. 세상 저편에는 아주 다른 삶들이 있으니까요.




니나가 자신의 삶을 엠비에이 동기들과 나누는 자리에서 니나의 베스트 프렌드 '사라'는 니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이타적인 사람", 그리고 "나한테만 이타적인 게 아니라 전 세계 전 인류에게 모두 이타적인 사람". 그래. 그녀의 웃음은, 친절은 포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밝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건 그녀 그 자체였다. 주위에 순응하며 따뜻하고 순종적인 남부 숙녀, 똑똑하고 의욕 넘치고 히피 한 커리어우먼, 그 모든 게 아프리카란 새로운 땅에서 하나 되고 있었다. 니나는 그렇게 묵묵히,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새로운 그녀의 가족을,  더 큰 가족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졸업 후 아프리카로 간 니나는 딸도 낳고, 탄자니아에 있다가 케냐로 최근에 옮겨서, 태양열 발전 등의 다양한 사업을 하는 M-KOPA라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Microsoft의 2018 annual shareholder letter 첫 부분에 노출될 정도 (전문 링크) 케냐 수십만 사람의 가정에 전기를 공급하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기업을 알고 있다. 그녀는 종종 자신의 삶을 본인 블로그에 쓰기도 한다.


니나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며 문득 생각했다. 과연 난, 이렇게 은혜받은 마음을 늘 날마다 누리며, 내가 얼마나 많은걸 받았는지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주위에 베풀며 살 수 있을까. 과연 난 얼마만큼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과연 난 얼마나 큰 가족,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과연 난 우리 아들, 딸한테 이런 교육을 해줄 수 있을까. 삶이 어렵고 숨이 턱턱 막힐 때면, 니나의 웃음과 따뜻함이 가끔 그립다. 그녀의 사랑이, 그 온기가 그립다. 부드럽지만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삶에서 도전받고, 메마른 나의 삶에도 그런 사랑과 온기가 조금은 더 생기기를 기도해본다.



0. 프롤로그: 기획의도 - 나는 아름답고 열정적인 삶을 꿈꾼다.

0. 목차 - 무엇이 이들을 만들어 왔는가

1. 절제, 가족과 신앙에 충실한 삶이 주는 자유 (카일런의 삶 이야기)

2.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법조계의 시마과장 (아츠시 마츠시다의 삶과 열정)

3. 가난과 배경을 뚫고 올라가는 개나리 같은 에너지 (쉐일리,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4. 부모님께 배운 사랑과 가치, 세상과 나누고 싶어요 (니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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