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내가 받아들여질때 비로소 안식이 찾아온다
나라가 온통 어수선하다. 안그래도 밖에서 오는 자극으로 안을 들여다볼수 없게 만드는게 한국사회일진대, 올해는 유독 심한것 같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는, 한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기에 내 안에, 우리 안에 안식이 있는가? 평안이 있는가? 쉼이 있는가? 그걸 돌아보며 써봤다.
미국에 와서 오랜만에 정말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화는 자연스럽게 한국과 미국의 육아 차이로 흘러갔다. 그러던 중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한국 부모들은 아이 자존감에 정말 목숨을 거는 것 같아.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거든. 그냥 좀 더 방임하는 느낌이야. 아이들이 겪을 건 겪게 내버려 두고, 스스로 자존감을 만들어 갈 기회를 주는 게 한국보다 훨씬 큰 것 같아.
이 말을 듣는 순간, 올해 우리 둘째와 관련해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인 하율이에게 그 당시 학교생활의 핵심은 단연 "축구"였다. 쉬는 시간 운동장에서 남자아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그룹이 형성되었고, 그 그룹 안에서는 축구 실력으로 서열이 매겨졌다. 하율이 친구들은 대부분 애가 하나 아니면 많으면 둘인 집에, 우리 집보다 경제적으로도 더 여유 있었고 애가 운동을 좋아하면 다양한 축구교실부터 하키까지 시키는 게 하나의 문화였다. 그렇게 빌드업된 탄탄한 실력에 애들의 "에고"까지 더해지니 하율이 같이 말도 좀 어눌하고 축구실력도 어중간한 애가 얘들 사이에서 자존감을 지키는 건 참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애가 끼고 싶은 그룹에 끼지 못하고 스스로 축구를 못한다고 하면서 풀에 죽어있고 한두 번 친구한테 맞고 오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나랑 아내랑 다 난리가 났다. 애가 완전 풀 죽어 있는 모습 (우리끼리 말로 거의 "쭈글이"가 되어있는 느낌이었다.)은 참 견디기 어려웠다. 애는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말도 안 되는 생떼와 동생, 누나 괴롭히기로 풀었고 집안에선 늘 막장드라마가 펼쳐지는 듯했다. 안 그래도 쪼그라들어 있는 애를 기어코 소리 지르고 혼내고 나면 그렇게 맘이 괴로울 수가 없었다.
부랴부랴 나도 축구 코치를 하면서 애를 자세히 봤고 기회가 있으면 축구를 시켜주면서 애가 좀 더 잘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도왔다 (그래봤자 다른 학부모들의 열성을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는 거 같아서 맘이 놓이지만 또 이런 일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긴장시킨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도 자존감에 목숨을 거는 한국식 육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내에게 친구와의 대화를 이야기하니 아내가 대뜸 이러더라.
"그럴 수밖에 없지. 모든 사회가 아이들의 자존감을 찍어 누르는데, 성적, 운동, 비교로 끊임없이 평가하잖아. 부모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 말을 듣고 나니, 나 역시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러면서 생각이 더 깊어졌다. "나는 나의 자존감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자기 가치감(self-worth) 과 자기 효능감(self-efficacy) 구성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건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관리하고 가꿔야 하는 것이며 우리가 세상에 맞서는 힘이자,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라고 한다. 그토록 중요한 나의 자존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곰곰이 돌아보니 내 자존감의 출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세상이 보는 나의 모습 (커리어, 물질적 안정, 주위와의 비교)
내가 보는 나의 모습 (스스로 나답다고 느끼는 경험)
신앙에서 정한 기준 (율법)
1) 세상이 보는 나의 모습
나이가 들수록, 특히 한국에서 살면서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걸 느낀다. 사회와 주변 모두가 비교와 경쟁으로 개인의 위치를 판단하는 환경에서 내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 같다. 내 통장 잔고는 얼마인지, 사회적 지위는 어떤지, 나는 평균 이상인지, 상위 몇 퍼센트인지. 한국 부모들이 아이 성적보다 성적의 백분율에 더 집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경쟁에 익숙하고 비교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나 역시 은근한 비교와 경쟁 속에서 자존감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2) 내가 보는 나의 모습
이 부분은 좀 더 내재적인 영역이다. 나의 경우, 주로 일과 관련된 경험에서 자존감을 충전받는다. 대학에서 강의하며 스스로 나답다고 느꼈던 순간,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을 때, 동시통역을 하며 내 능력이 쓸모 있다고 느꼈을 때.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그들이 거기서 가치를 얻는 모습을 볼 때,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이는 걸 볼 때. 이런 경험들이 내 자존감에 커다란 힘이 되어준다.
3) 신앙에서 정한 기준
신앙은 나에게 큰 축복이지만 때로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끊임없이 죄를 짓고 넘어지는 나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고 구제불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일까?"라는 자책이 들 때, 그 기준들이 내 자존감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물론 건강한 자기 성찰로 이어질 때도 있지만, 때로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돌아보니 내 자존감도 결코 안녕하지 않다는걸 알게됐다. 나의 지금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잘했다 잘하고 있다고 다독이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 에너지를 내고 스스로를 지키기가 만만치가 않다. 마치 온 사회의 무게를 지켜내야 하는것 같은 힘겨운 방어 싸움같기도 하다.
스스로 납득과 용납이 되지 않는데 안식이 있을리 없다. 기껏해야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 이부분은 좀 괜찮다 수준이다. 하릴없이 도파민을 얻으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게 내 쉼의 수준일 때가 많다.
얼마전 기도하는데 이런 기도제목이 있었다.
"혹시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용서하고 용납해 보세요." .
한참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나를 용납하고 있는가. 내가 생각한 기준에 한참 못 미치고 여러모로 부족하며 여러모로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나를.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려고 해도 부족함이 많이 보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나를 보려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내가 정한 기준이나 신앙 안에서의 율법에 비춰봐도 도무지 용납하기 어려운 모습이 많다. 남들보단 나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엄격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스스로의 부족함과 약점을 속속들이 아는 나로선 내 현재의 모습이 마냥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앞으로가 불안하기도 하고 현재가 못마땅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하율이가 그랬던 것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분출하기도 하고 악순환에 빠지기도 했다. 점점 더 위축되고 동굴에 들어가고 그런 식으로.
전에는 아버지의 나를 보는 눈빛에서 자존감과 안정감을 찾았다. 나를, 나의 성취를 기뻐하시는 그 모습에서. 나중엔 사람들의 찬사와 사랑에서 그걸 찾았다. 나 스스로의 노력해서 그걸 찾기도 했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꾸준히 운동하고 노력하는 나의 모습에서 안정감을 찾았다. 힘들 때면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웠다. 내가 최고라고, 할 수 있다고. 주위의 멋진 사람들에게서 영감과 에너지를 받고 노력과 성취로 자존감을 채웠다. 그게 나의 아이덴티티가 됐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것들이 참 약하다는 걸 느낀다. 사람들의 눈빛과 반응도 약하고 나의 의지도 약하고 노력과 성취의 연결고리도 약하고 (운과 타이밍이 작용하는 영역이 너무 큼) 성취와 평안의 연결고리도 약하다.
결국 전에 이글에서 썼던 것처럼 내가 찾은 정답은 은혜/은총이다. 내 존재자체로 오는 용납. 나의 행동/삶에 기반한 게 아닌 이미 주어진 선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세상에서 내가 너무 작아 보일 때, 심지어는 신앙에서 정한 기준에도 내가 한참 못 미치는 걸 새삼 깨달았을 때 그때 비로소 피부로 느껴지는 이 용납의 역설. 다시 한번 쉽게 믿겨지지 않는 그 사랑과 인정을 이 연말에 받는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는다. 그래 난 잘 살고 있다. 내 삶은 괜찮다. 이렇게. 내가 뭘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분이 나를 용납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받아들이시고 나를 기뻐하시기에.
"산아, 잘살고 있다. 너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것 자체가 대견하다. 지금 잘 돼지 않는것들고 차차 더 잘하면 되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렴. "
내 마음이 온전히 안정을 찾을 때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평안한 쉼. 게임이나 넷플릭스로 머리 식히는 거나 쇼핑으로 스트레스 푸는 것과는 전혀 다른 평안함. 며칠 남지 않는 연말에 나도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그 안식에 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올해 전교인 수련회에서 썼던 "천국에서 쓰는 편지"를 나누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천국을 상상하고 거기서 현세를 지금을 사는 나에게 쓰는 편지였는데 처음엔 잘 써지지 않다가 마지막에 한달음에 썼다. 그래 이게 나에 대한 그분의 마음이고 목소리의 일부분이 아닐까. 그렇게 믿어본다.
"산아, 열심히 살고 있구나.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네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짠하네.
산아, 여긴 정말 좋아. 네가 좋아하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들로 가득해. 아주 찐하고 진한 것들로 넘쳐나지. 울고 웃을 일들이 끊이지 않단다.
산아, 너에겐 남들보다 더 빨리 가고 더 잘하는 게 참 중요했지. 하지만 여기선 그런 것들이 필요 없어. 모든 게 하나의 놀이 같은 거라, 이겨도 좋고 져도 좋아. 그냥 모든 걸 즐기면 돼. 결국 중요한 건 얼마나 더 사랑하고, 사랑받고, 웃고 울며 살아가느냐야.
산아, 내가 너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어. 니가 제일 불안해하던 거 말이야. 너의 남은 삶이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니? 너는 그저 그런 삶을 가장 두려워했잖아. 쉽지 않은 질문이지? 하지만 내가 한 가지 말해줄게. 걱정하지 마라. 네가 어떻게 느끼든, 너의 삶은 이미 특별해. 아주 Spectacular해. 여기 모든 게 다 있어. 지금 내가 다 설명해줘도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 안심해. 너는 곧 깜짝 놀랄 거야. 얼마나 반짝이는 것들이 많은지.
산아,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궁금하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건 이야기하지 않을게. 너의 삶은 너의 몫이니까. 다만 한 가지는 말해줄게. 너는 잘 살아냈고, 잘 이겨냈어. 네 몫의 경주를 다한 거야. 물론 더 잘할 수 있는 여지가 언제나 있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괜찮아. 이미 그분이 승리한 싸움이니, 넌 그저 네 몫을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넌 잘 해냈어.
산아, 백산. 기억해. 세상이 뭐라고 하든, 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넌 최고로 멋진 왕 같은 제사장이자 거룩한 전사야.
마지막으로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받으렴. 그러면 너의 남은 삶도, 천국에서의 삶도 더 풍성해질 거야.
산아, 사랑한다. 축복한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지금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모두 설명되고, 희미했던 것들이 명확해지며,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고, 네가 온전히 너 자신이 되는 날이 곧 올 거야. 그 까불거리던 소년으로 돌아가는 그날을 기대해. 정말 재미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