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자신도 모르고 서로 손내밀줄도 모를뿐이지
'밝은 밤',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든 생각: 타인의 삶과 마음에 연결된다는 것에 대하여
1. 소설 『밝은 밤』을 우연히 접하고 단숨에 읽었다. 조정래의 장편소설을 연상케 하는, 몇 세대를 넘나드는 역사 속 인물들의 생생한 삶도 인상 깊었지만, 진짜 예술은 그들의 감정 묘사였다. 때론 짧은 대사 한 줄, 함축적 마무리, 또는 정제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전해지는 등장인물들의 마음—특히 고통과 아픔, 눈물 같은 것들—이 너무나도 고스란히 느껴져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2. 우리는 종종 생각을 통해 타인과 연결된다. 워런버핏의 투자철학을 따르며 그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는 사람을 종종 접한다. 페이스북/링크딘/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서 통찰력 넘치고 시의적절한 생각들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어떤 작가의 생각과 철학을 담은 책을 읽고 나면 마치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아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이 자라고 꿈도 자라난다.
3. 하지만 누군가의 고통, 아픔의 마음, 깊은 감정과 연결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공명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마음 - 질투, 후회, 슬픔, 분노, 트라우마, 설렘, 환희 등- 이 전해질 때, 꼭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이 반응한다. 우리 역시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이 연결되고 나면 이상하게도 힘이 난다.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주인공의 기억 구슬이 무의식 속에서 꺼내져 새로운 색을 입고 '핵심 기억(core memory)'이 되어 삶을 지탱해 주듯, 나도 몰랐던 내 감정들이 깨어나고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나며 우리는 또 살아갈 힘을 얻는다.
4. 누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다가오는 삶의 원리겠지만 감정의 공감과는 거리가 먼 대문자 "T"이자 앞만보고 달려온 나에겐 전혀 당연치 않은 깨달음이고 낯섬이다. 그래서인지 중년에 접어들면서 타인의 "생각" 보다는 "마음"에 더 관심이 가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잘 정리된 자기 계발서나 '라이프해킹' 콘텐츠보다, 덜 다듬어졌지만 진심 어린 삶의 이야기와 감정들이 훨씬 더 큰 울림을 준다. 그것이 소설이든 드라마든 혹은 누군가와의 깊은 대화이든. 그래서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생각' 이상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된다.
5. 남녀 얘기를 잠깐 해보자면 - 여성의 감정은 참 원래 섬세하기도 하겠거니와 이걸 묘사하는 여성 작가들도 뛰어나서 풍부한 콘텐츠로 이어진다. 여성 독자들도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더 뛰어난 편이어서 수요도 높다. 반면, 남성의 감정은 표현 방식도 투박하고, 이를 제대로 그려내는 작가도 드물다. 경쟁과 성취에 내몰린 남성들에게 감정을 이야기하는 일은 때론 사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남성의 외로움, 중독, 유혹, 패배감, 우울, 불안, 두려움 같은 내면의 이야기는 제대로 콘텐츠화조차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혼 이야기도 대부분의 서사가 여성 중심이고 여성화자이다. 남성은 그 흔한 피해자 코스프레도 할줄 모르기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여 있는 이런 복잡한 실타래같은 삶과 마음을 복기한 이야기는 눈을 씻고 봐도 잘 없다.
최은영 작가의 책도 온통 여성들의 마음과 삶 이야기다. 나는 끝까지 몰입해 보지도 못했지만 "폭삭 속았수다"의 주인공과 스토리도 여성중심이고 박보검은 순애보 남성으로, 나머지 남성들의 마음은 주로 악역으로 나온다 - 지극히 여성중심적인 콘텐츠가 아닌가 감히 생각해 본다. 김영하 작가의 '단 한 번의 삶'도 나쁘지 않았다. 한 남성의 성장 배경, 여러 아주 멋지지 만은 않은 마음과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드문 에세이이기에. 하지만 개인적으론 조금 아쉽고 최은영 작가의 소설처럼 몰입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이분의 가장 진한 감정 - 그것이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환희든 눈물이든을 충분히 못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6. 남성의 마음을 열어주고 살아갈 힘을 주는 날것의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된다. 여성의 감정이 섬세하고 말랑하다면, 남성의 감정은 투박하고 단순하지만, 한번 닫히면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본인도 알 수 없는 본인의 마음을 들여보고 내 안의 나와 화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들,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남성의 감정이 솔직하게 그려지는 콘텐츠들,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연결과 생명력이 일어나는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을 보고 싶다. 그럴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사랑과 용기가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말랑말랑해진 우리 마음이 더욱더 단단해지는 그런 모습들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