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주 베를린 한국문화원 전시서문
하얀색 정육면체가 공간위에 둥둥 떠다닌다. 참 기이한 풍경이다. 눈에 띄게 드러나는 특별한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 듯한데, 하닐 없이 떠다니는 하얀색 정육면체.
부드럽게 부유하는 하얀색 정육면체를 보자마자, 문득 오래전 보았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셈 멘더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 너무 오래되어 줄거리도 가물가물하지만, 마지막 장면만은 생생하다. 영화 속 주인공 리키가 찍은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 장면. 그리고 이어지던 독백.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해.
이 세상엔 말야.
그걸 느끼면 참을 수 없어.
가슴이 움츠러들려고 하지”
사실 비닐봉지 하나쯤 바람에 날리는 일이야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일단 그것이 카메라 렌즈 안에 포착되고 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일상적이었던 것이 생경해지고, 심지어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아름다워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움직임에 빨려 들어간다.
하얀 정육면체가 무상하게 공중에 떠다는 이배경의 <메트포폴리스 메타포 metropolis metaphor>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낌이 딱 그랬다. 그저 흔한 하얀색 정육면체일 뿐인데, 떠다니는 이 녀석을 보고 있자니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같기도 하고, 그 움직임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급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무중력의 우주선 안에서 유영하는 우주인 같은 움직임. 어색하고 낯설어야 하는 하얀 정육면체의 유영이 어느덧 익숙해져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한 순간. 지금 바라보는 것은 하얀 색 정육면체의 오브제가 아닌, 바로 그 정육면체를 움직이게 하는 송풍기의 바람임을 깨닫게 된다.
송풍기와 초음파 센서가 장착된 에어모터 64개로 만들어진 <메트로폴리스 메타포>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지금까지 이배경이 주목해왔던 도시와 바람에 대한 이야기의 연장에 있다. 물론 ‘메트로폴리스’라는 용어를 떠올릴만한 그 어떤 밀집된 초고층 빌딩의 모형도 없고, 첨단 테크놀로지를 예상해볼 만한 거대한 장비들도 없다. 다만 송풍기와 하얀 정육면체가 있을 뿐이다. 마치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리키가 흩날리는 비닐봉지 자체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따라 흩날리게 한 바람과 비닐봉지의 움직임을 통해서 일상적인 것 안에서의 아름다움, 진정 소중한 가치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이배경도 도시에 대한 직접적인 시각적 재현이나 현란한 인터렉티브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극도로 절제된 미니멀한 흰색 정육면체의 움직임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지는 바람으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랬지만, 이배경의 작품 속에서 중요한 것은 오브제 자체가 아니라, 오브제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인 바람이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움직임의 동선이다. 어쩌면 오브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이번 작품에서 그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작가가 드러내고 싶었던 핵심요소는 바로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작가가 바라보는 도시와 자연을 아우르는 공통분모이다.
자연에서도 도시에서도 ‘바람’은 존재한다. 자연 속의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가르고 지나고, 꽃잎을 흔들고 지난다면, 도시 속의 바람은 사람과 빌딩 사이를 가르고 지난다. 자연 속 바람이 꽃과 나무를 숨 쉬게 한다면, 도시의 바람은 사람을 숨 쉬게 한다. 하지만, 과연 자연과 도시는 구분되는 것일까. 우리가 말하는 자연은 어떤 자연일까. 그리고 무슨 근거에서 자연은 도시와는 달리 우리에게 휴식과 안식을 준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은 휴식과 등치가 되고, 도시/인공과는 대척점을 이루게 되었다. 휴일이나 휴가철이면 막히는 도로를 무릎 쓰고 자연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인터넷과 핸드폰이 없는 ‘완벽한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은 과연 즐기고 휴식할 수 있을까. ‘도시’라는 돌아갈 곳이 있는 현대인에게 잠시 찾아가는 ‘자연’은 즐길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만일 돌아갈 곳이 없다면 이미 첨단 테크놀로지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자연은 더 이상 휴식과 안식의 로망은 아닐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배경은 자연은 더 이상 스스로 그러한, 안식과 평온을 주는 자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시의 소음과 고층빌딩 안에서 현대인을 안식을 느끼고, 그 안에서 인공화 된 자연이 존재한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좋다거나 하는 가치평가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렇게 되었을 뿐인데, 자꾸 자연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은 아니겠냐고 질문한다.
전시장에 설치된 64개의 송풍기는 마치 도시를 가득 메운 빌딩의 냉난방기 송풍기들을 닮아있다. 하지만, 그 송풍기들이 만들어내는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하얀색 정육면체는 일상적인 도시 이미지와 다르다. 아니 오히려 훨씬 ‘자연’스럽다. 바쁘지도 급하지도 빼곡하지도 않은 여유 있고 느슨한 평안함. 어느덧 현대인에게 도시는 그런 자연이 되어버렸다.
자연에 대한 이배경의 입장은 10sec 사진 시리즈에서도 나타난다. 아카시아, 당근, 싸리나무, 담쟁이와 같이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식물들을 찍은 사진들은 시간별로 나뉘고, 나눠진 시간대의 사진들이 한 화면에 담아 공존하도록 하였다. 한결 같다고 생각했던 자연을 분절시키고, 분절된 시간들을 한 폭에 담았다. 늘 그렇듯 이배경의 작품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란 쉽지 않다. 그가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상당히 섬세하고 간접적이기 때문이다. 사진 시리즈에서도 역시 작가는 조각난 식물의 이미지들을 병치시킴으로서 ‘자연’을 대하는 혹은 인식하는 방식이 과연 진짜 ‘자연’이냐고서 에둘러 묻고만 있는 것 같다.
송풍기와 하얀 색 정육면체를 통해서 그가 표현하려는 도시 은유(metropolis metaphor)는 그가 은유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그가 도시를 바라본 방식에 대해서, 그리고 그와 연결되어 있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분절화되고 병치된 사진 이미지 속 자연은 우리가 알고 이해하고, 대면하게 되는 자연의 본질을 새삼 되묻는다. 만일 누군가의 말처럼 현대예술이 보는 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고민하게 하고, 질문하게 하고 그가 살고 있는 일상을 낯설게 하는 것이라면, 이배경의 이번 작업들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연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도시 안에서 현대인에게 익숙해진 자연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그런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