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그는 천재
가을이 되면 듣는 노래가 있어요. R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그는 제자였던 아내와 결혼할 때도 가곡 네 곡을 써서 선물했는데, 여든 살이 넘은 노 부부의 건강이 나빠져 스위스로 간 뒤 전범 혐의로 쫓기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가곡을 쓰고 있었어요. 이동 제한, 계좌 동결, 미래 로열티까지 묶인 상태로 지내다가 거듭된 전범 재판 끝에 무혐의 판결을 받던 때에도 그가 쓰던 곡이 <네 개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다행히 일은 잘 마무리되었지만, 큰 수술 받고 가르미슈로 돌아온 뒤 이듬해 세상을 떠나게 되죠. 85세까지 살았으니 장수했지요. 젊어서부터 누린 영광과 부에 비해 말년은 다소 힘들었던 거 같습니다.
(전주만 들어도,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고, 해가 뉘엿뉘엿해질 것 같은, 본격, 가을철 해질녘 음악입니다. 처음 들으신다면, 제2곡 '9월'부터 들으면 좋아요~ 호른 후주~ 크으~!)
마지막 제4곡 ‘저녁놀’은 이런 가사예요. (아이헨도르프의 시)
“우리는 손을 맞잡고 고난과 기쁨을 지나왔네,
조용한 땅을 지나 이제는 방랑에서 쉬네.
사방에 계곡이 가라앉고 하늘은 벌써 어둑해지는데,
두 마리 종달새 꿈꾸듯 향기 속으로 날아오르네.
오 드넓고 고요한 평화여! 저녁놀 속에 가라앉는구나,
우리는 방랑에 얼마나 지쳤는지 어쩌면 이런 것이 죽음일까?“
어쩌면...이런 것이 죽음일까?
Ist dies etwa der Tod?
사실, 이 질문은 그가 젊어서부터 품고 있던 겁니다. 스물다섯 살, <돈 후안>을 써서 이미 이름을 알렸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뜬금 없이 <죽음과 변용>이란 교향시를 썼습니다. 이후 한동안 교향시를 쓰지 않는 걸 보면 뭔가, 하고 싶던 말은 다 했다, 이런 느낌인데... 그에게는 평생 죽음과 그 이후라는 주제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중요했다고 하네요. 또 당시 궁정 호른 주자였던 슈트라우스 아버지가 바그너 음악을 접하지 못하게 해서 아들은 몰래 악보를 찾아보면서 완전 빠져있었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오는 '사랑의 죽음'처럼, 죽음으로써 정화되고 완성되는 어떤 그런 것...!(아...이걸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그러니 변화가 아니고 변용일텐데...)에 대한 생각들을, 관현악곡으로 펼친 거지요.
여기에는 각 부분에 맞춘 줄거리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그냥 들어도, 참 좋습니다. 소음 차단 이어폰을 꼽고 이 곡을 듣는데, 순간순간이 참 좋고, 삶의 희노애락이 다 담긴 것 같습니다. 이게 천재지, 이런 곡을 스물다섯 살에 썼으니..싶어져요. 그리고 그 영감이 60년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뎌지지 않고 빛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곡을 쓴 뒤 60년 뒤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이 곡은 더 특별한 의미를 입게 되지요. 20분 남짓한 연주시간에, 처음엔 듣기를 망설였는데... 어느덧 20분이 훅~ 지나가 있는 경험, 음악 들을 때 가장 짜릿한 순간 중 하나죠.
KBS 클래식 FM(수도권 93.1 MHz), <출발 FM과 함께>, 이번주 일요일(17일) 아침 8시 '음악이 머무는 곳' 코너에서 <네 개의 마지막 노래>에 대한 이야기, 다음주 토요일(23일) 아침 8시 즈음, '다만 말없이 감상하소서' 코너에서 <죽음과 변용>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