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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현 Jan 16. 2024

할 말이 없다는 착각

  첫 문장을 쓰기까지 무던히 머뭇거렸다.

  내놓지 못해 꼬여버린 생각을 풀기 위해 수첩을 들고 다닌 적이 있다. 발화하지 못한 생각을 물리적으로 어딘가에 새기고 싶었다. 펜으로 꾹꾹 눌러쓴 획이 모여 음절이 되고 단어가 되어 문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남모르게 소리치는 일에 가까웠다. 지하철에서, 놀이터 벤치에서, 오랜만에 갔던 모교 분수대 앞에서 나는 침잠하는 감정의 시작점을 찾기 위해 거슬러 올랐다. 그러다 끝내 무용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곤 수첩을 덮길 반복했다.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쓰기로 했다. 여러 가지를 배우고 이루어낸 게 많았던 작년이었고, 덕분에 예전보다는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낙관은 삶의 의미를 무용으로부터 비껴가게 했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걸 왜 좋아하는지 곱씹기만 해도 나를 다른 결론으로 이끌지 않을까. 고통스러울 때만 글을 써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를 피하고 있었다. 마음의 무게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먼저 내려놓으려 한다.


  올해로 트랜지션에 들어선 지 1년째가 되었다.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나의 몸은 서서히 변해왔다. 질감과 향, 미묘한 형태의 변화는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다. 돌이킬 수 없기에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그리고 정말 당연하게도 내가 나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절대적인 육체를 완전히 바꿀 수 없더라도 괜찮다. 과거를 품은 육체를 현재의 선택으로 희석해간다면 분명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나서던 첫날의 해방감을 나는 기억한다. 끊임없는 질문과 부정, 그리고 인정 끝에서야 비로소 내 몸속에 올바른 것이 흐르고 있다고 느꼈다. 그 뜨거운 안도감은 내가 얻은 새로운 낙관이었다.


  초점이 나간 사진처럼 내가 나를 바라보던 시간은 저물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나의 좋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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