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홍택의 '그건 부당합니다!'를 읽고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신이 3루타를 친 줄 안다." (Some people are born on the third base and go through life thinking they hit a triple. - Barry Switzer)
자본주의(정확히는 수정 자본주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전성시대는 세계적으로 1980년대 까지라고 한다. 이후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서 신자유주의가 관심을 받으며 공동체보다는 개인에 초점을 맞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는 기업에 대한 족쇄를 푸는 단초가 되며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들의 등장을 앞당겼다.
그리고 본격적인 빈부 격차가 발생하였다.
즉, 지금의 청년세대의 공정에 대한 그리고 불합리하고 불공정해 보이는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는 갑작스러운 빈부 격차의 발생 원인과 과정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에는 빈부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미국, 영국을 비롯한 일본 등의 나라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이후 그리고 우리나라 또한 자본력을 앞세운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신흥 갑부들의 득세를 목도하게 되었다. 노력으로 극복가능했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자본력 앞에서는 출발선이 달라진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개천에서 용 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시험능력주의’의 저자 ‘김동춘’ 교수는 위와 같은 배경으로 인해 배경도, 자본도 없는 청년층들은 무엇보다도 좁아진 계층 사다리를 중요시하게 되었고 그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수단인 공정한 시험이야말로 만병통치약이며, 흔들 수 없는 확고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공정한) 시험 합격[대입 - 학력 - 능력 - 차별적 대우와 보상(이건 당연히 누릴 전리품이다.) - 공정 - 정의]이라는 도식을 예시로 들며 시험에 의한 능력주의는 도덕성까지 우월하게 만들어 주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이해하면 ‘인국공’ 사태나, 조국 딸인 ‘조민’에 대한 대학생들의 분노, 그리고 서울캠퍼스의 지방캠퍼스에 대한 비난, 그리고 인서울 대학과 지거국이라는 낯 뜨거운 이분법적 구분 짓기 갈등도 이해할 수 있다. 능력이야말로 공정한 것이며 쟁취해야 할 목표를 거머쥐는데 필요한 자질이기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비난받아도 마땅한 존재가 되어버리며 이를 거스르는 자들은 규탄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황금기인 90년대에 꿀 빨다가 쉽게 취직해서 적당한 아파트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오손도손 사는 무능력해 보이는 우리 시대의 과장님, 부장님들을 이들이 무시하고 힐난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들 기성세대가 하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게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능력주의가 가장 공정하다는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며 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자본력을 쥔 채 태어나는 능력 있는 집안의 자녀들이 쉽게 빠지기 쉬운 착각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실은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서 우수한 대학과 기업에 들어갔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우연히 그러한 부를 지닌 가정에서 태어났을 뿐임을 잊고 있음을 지적한다.
대니얼 마코비츠 교수도 그의 베스트셀러인 ‘엘리트 세습’에서 ‘meritocracy’라는 말을 유행시켰는데 - 이는 미국의 능력주의로 해석될 수 있다 - 미국에서 금융자본주의가 팽배하면서 극상층과 중산층 사이의 빈부격차가 벌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중산층이 해체되고 엘리트들은 초과근무를 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노동을 해야 하는 사회가 되면서 승자와 패자 모두가 함정(trap)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대 미국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김동춘 교수도 다음과 같은 노자의 말(임지치민상도)을 인용하며 시험만능주의를 경계하였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 세상일을 맡기면 세상을 속이는 최고의 도둑이 된다.
명문대 출신 고시 출신 엘리트 등 지식과 재능이 많은 이기적 시험형 인간이 권력자나 재력가에 붙어서 더 큰 도둑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즉 우리는 최고의 시험인 고시 패스형 인물들에게 무한한 권력을 주고 그들이 하는 일에는 최고의 능력과 도덕적 완벽함도 부여하면서 맹목적인 존경까지 보여주고 있는 현실이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 시험을 통과한 자들(특히 수능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는 "자~ 고생했어! 이제부터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철저한 구분 짓기를 통해 엘리트 사회로 가려는 몸부림을 치면서 능력만 있다면 피라미드의 꼭대기까지는 아니어도 그 언저리에 있을 수만이라도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기처럼 노력을 못한 사람들에 대해 비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자기 대신 피라미드에 올라간 사람들에 대해서 비난은커녕 존경의 시선을 보이기도 한다. (대기업 회장들에 대한 동경심과 뛰어난 학벌의 소유자에 대한 존경심 같은 마음들)
작년 말에 읽은 책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기성세대인 내가 소위 MZ 세대를 이해해 보고자 쉽게 접근해서 읽었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던 책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나 역시 그들의 이유 없는 분노와 불만 등에 대해 어린 청년들의 앙탈로 치부하였고 철없는 행동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왜 평창올림픽에서의 남북단일팀 구성을 이해하지 못할까? 왜 인국공 사태의 본질을 몰라볼까? 왜 조국 사태의 이면을 못 보는 걸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경쟁이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 놓고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여유는 사치이며 경쟁에서 도태되어 능력 없는 사람으로 매도되는 것이 현실임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노력을 부당하게 취급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를 제쳐 앞서가는 사람들은 불공정한 행태를 부리는 사람들이며 부당하다고 외칠 수밖에 없다.
교육,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요소들이 중첩되어 여러 복합적인 측면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문제이기에 특정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본다. 다만 청년세대에 대해서 우리 기준이 아닌 그들의 입장과 기준에서 보다 깊은 이해와 공감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들이 갖고 있는 욕망을 하나의 창구로만 해소시키지 말고 다양한 창구를 개발해서 병목현상을 없애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사회적 성공과 행복의 기준이 반드시 공부능력 - 대학 - 취업 - 명성과 차별적 대우라는 단일선상의 기준을 제시한 기성세대의 사회 구조적 문제를 바로 잡고 다양한 성공기준과 행복 기준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하나인 고속도로 상황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의 행복에 대한 기준은 톨게이트 하나만큼 지나치게 협소하다. 보다 많은 톨게이트가 생기면 차들은 상쾌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출구를 더 넓혀보면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게 달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