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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영호 Sep 18. 2023

말이 칼이 될 때

갈라 치기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지난 7월  일에 있었던 서울 한 초등학교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두고 여전히 논란(?)들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다음 기사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9/0005162606?sid=102

그리고 이에 대한 댓글들을 살펴보았다.(사실성을 위해 맞춤법이 틀렸다 할지라도 그대로 지면에 옮겨 적었다.)

ㅋㅋㅋㅋ 좌파는 진실에 분노하고 우파는 거짓에 분노한다는 게 맞는 말이네. 여러분은 맞말에 발끈하는 좌파를 보고 계십니다.

애도가 먼저 맞죠. 근데.. 플래카드 노래 구호 율동 집회가 일사천리로 먼저니까.. 시체팔이 아니냐는 말을 하는 거 아닐까요? 그거 다 개인의 애도적 마음이라고 말한다면 말이 안 되죠.. 개개인이 나와서 그런 단체행동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건 본인이 이상한 거 아닐까요?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교육현장의 교권을 짓밟아 버린 좌파 교육감들과 전교조 노동자 선생들의 만행을 강력히 규탄합니다!! 문천식 씨도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심한 말들이 많지만 글을 읽는 우리 눈과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 더럽혀질까 봐 차마 더 옮기지는 못하겠다. 위의 댓글들의 논리면 이렇게 정리될 수 있겠다.

초등교사의 죽음을 애도 = 정치행위 = 그중에서 좌파 패거리들의 짓 = 대통령의 의중과 기독교의 교리에 어긋남
초등교사 죽음의 원인 = 좌파(좌파 교육감, 전교조)들의 학생인권조례 = 교권회복의 길은 결국 과거로의 회귀(우파 지상주의)


하지만 지금의 사안은 누군가를 탓하기보다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진단과 예방 대책”을 논하는 사안이어야 한다.
학부모와 교사의 갈라 치기
정치권에 의한 여당과 야당의 갈라 치기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갈라 치기
좌파와 우파의 갈라 치기
전교조와 비전교조 교사의 갈라 치기


우리는 갈라 치기를 하며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를 키우고 있다.


특별한 교육적, 행정적, 법적 조치를 취해서 누군가를 배제시키고 갈라 치기 함으로써 손쉽게 해결될 일이면 그전에 이미 해결되었다.  전교조가 문제라고? 전교조 교사가 있기 전에도 그런 학생과 학부모들은 있었다. 오히려 전교조는 교권의 지위 확보를 위한 정책을 지지해 왔다.(전교조 정책을 살펴보시길…) 학생인권조례가 문제라고? 인권조례가 없는 지역에서도 위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기에 이는 문제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인권조례를 이 기회에 읽어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지향해야 할 덕목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 체벌하자고? 체벌과 폭력의 경계선은 무엇이며, 체벌로 인한 더 큰 문제 발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체벌하지 않고 교육을 잘 이끌어가고 있는 스웨덴과 핀란드 등의 국가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러면 좌파, 주사파의 짓이라고?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인가? 답할 가치도 없다. 끝으로 생활기록부에 기재하자고? 지금도 학폭관련해서 생활기록부 기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감소는커녕 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더 교묘해지고 있고 기재에 따른 법적 다툼이 증가하고 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사람들은 혐오의 표현을 그렇게 해댈까? 그들은 혐오와 증오를 하며 웃고 있겠지만 정작 그에 따른 엔도르핀과 도파민 같은 행복감은 증가하고 있을까? 남을 헐뜯으면 나의 행복감이 올라갈까? 남의 슬픔과 고통과 나의 행복은 서로의 여집합인 것 마냥 그렇게 집요하게 타인을 헐뜯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타인을 비난하면서 나의 기분이 좋아지는지를, 그리고 타인의 배제는 나의 자존감 및 행복감 상승으로 이어지는지 말이다. 간혹 남을 헐뜯을 때 희열을 느낄 때가 있다.(나 역시 그러하다.) 그렇지만 순간의  욕을 통한 배설의 기쁨을 느낄 뿐 이후에는 주워 담지도 못할 말로 인한 두려움과 본인 역시 누군가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칠 때도 있다.


처음으로 학년부장이 되었을 때 전임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신신당부하신 말씀이 있었다.
절대 동료 교사들을 헐뜯지 말고 그들의 편에 서야 한다! 힘든 것은 너 하나로 족하다!


물론 이를 지키며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 자신에게 과부하가 몰려왔고, 결국 타인에게 동료교사로 인해 힘들다고 토로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임부장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하며 때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라고  항변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절대 혐오하거나 갈라 치기는 하지 말자는 신념을 지키고 있다. 왜? 언젠가는 그들과 다시 만날 것이며 그들의 도움 없이는 내 일을 할 수  없을뿐더러 결국 함께 해야 하는 운명의 공동체이며 서로의 여집합이 아닌 교집합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생각의 차이, 신념의 차이, 행동 및 태도의 차이는 당연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혐오와 욕설로 그들과 갈라치는 순간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며 그들뿐만 아니라 나 역시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된다.


지금의 교육 상황도 그러하다. 교육은 전국적인 이슈이다. 교사, 학부모, 학생, 교육행정, 심지어 정치권까지 얽혀 있기에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지금의 사태는 다시 잊힐 것이고 문제는 되풀이될 것이다. 누군가를, 특정 집단을 배척해서 성취할 영역이었으면 진작 교육혁신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결국 지금의 문제는 구체적 규정 적용 이전에 이러한 사태를 바라보는 철학의 문제이다. 교사를 학부모, 학생의 보조원으로 바라볼 것이냐, 교육적 행위를 수행하는 능동적, 자율적 주체로 바라볼 것이냐이다. 교육의 자율권을 교사에게 줄 것이냐, 교육부의 지시, 학부모의 지시, 학생의 지시를 처리만 하는 수동적 존재로 격하시킬 것이냐이며, 대한민국 교육 및 사회가 과거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지금의 위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갈 것이냐이다.


지금처럼 특정 소수만을 위한 교육정책이 아닌 공동체 다수의 행복을 생각하는 교육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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