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뉴스, 신문 기사 등을 보면 고위층 및 재벌 2-3세 자녀들의 일탈에 관한 내용을 접할 수 있다. 특히 마약, 성문제, 경제 사기, 폭력 등의 중범죄가 많은 편인데 ‘왜 돈도 많은데 저럴까?‘ 싶을 때가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누구는 하루 만원을 아끼려고 아등바등 사는데 그들에게는 하루 만원이 아니라 천만 원이 생겨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경제적 부와 지위를 지녔는데도 그런 일탈적 행위를 저지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정답은?
심심해서……?!!
자신들만의 재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고 싶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본능을 지니고 있다. 물론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되지만…... 잘 알다시피, 행복이란 감정은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주로 지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도파민만 분배되면 행복감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데, 이 호르몬은 나오고 싶어서 나오는 물질이 아니라 평범함과 익숙함에서 좀 더 벗어났을 때, 즉 색다른 경험을 할 때, 그리고 신선한 자극을 받을 때 분비된다.
위에서 예를 든 재벌집 자녀분들 혹은 고위층 분들의 일탈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경제적 지위 등을 이미 일상 속에서 실현하고 있기에 삶에서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돈 1억은 그냥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닐까?) 그렇기에 마약, 그것도 점점 자극적이고 센 효과를 지닌 마약 혹은 동등한 행복 도파민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전에 교육에서의 '행복'의 기준부터 알아봐야겠지만 워낙 제각각의 정의와 철학적인 기준이 있기에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모두들 자기만의 행복의 정의가 있고 그것을 찾아 나서고 있을 테니까.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수업받는 학생들, 시험을 치르고 있는 학생들, 점심시간 및 쉬는 시간에 뛰노는 학생들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학교에 있는 하루 일과 중 언제가 가장 행복하니?
"점심 먹을 때요!"
그렇다! 물론 맛있는 메뉴가 나오면 더 좋고, 친한 친구들과 같이 먹으면 금상첨화이다. 즉, 그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만약 집에서 먹는 점심이라면?
학교보다는 맛없어요! 학교에서 먹을 때가 제일 맛있어요!
메뉴의 문제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학교라는 힘든 공간 속에서 점심시간은 그것도 예상치 못한 특별한 메뉴가 있는 날은 한줄기 빛과 도파민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교육에서의 행복은 위의 부잣집 자녀들처럼 학교에서의 수업이라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건을 맛보아야 느낄 수 있는 것이며 무료하고 평범한 일상, 때로는 그 무료함에서 나오는 약간의 고통(?)-여기서는 수업이나 시험이겠지만-이라는 마이너스적인 요소와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을 없애면 행복이 오지 않을까? 즉, 시험이 없으면, 수업을 안 받으면 행복할까? 혹은 핸드폰 하거나 노트북, 태블릿을 이용해 유튜브 영상 시청 혹은 게임하는 학생들은 행복한 걸까?
그건 그냥 ‘무(없음)‘인 것이다.
고통이라는 ‘ 마이너스’를 없애면 행복이라는 ‘플러스’가 아니라 그냥 ‘무(제로)’인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든 누구든 핸드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보면 ‘무’력감이 느껴지나 보다. 시험이 애초부터 없다면 학생들은 또 하나의 무료함이 가득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지, 그 자체가 플러스 요소인 행복이라는 도파민을 뿜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학생들은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름 ‘마이너스’를 없애려고 하는 행동이기에.
수학적으로 따져보면 ‘마이너스’인 상태에서 ‘제로’로 가는 행위 자체도 ‘플러스’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확실한 ‘플러스’가 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행위가 필요해 보인다. 예를 들어 ‘시험’이라는 마이너스를 없애면 바로 절로 웃음이 나오는 행복감을 잠시 느끼겠지만 그것은 환경의 변화-여기서는 시험이 없다는 환경-로 발생하는 수동적인 감정일 뿐이고 거기서 절로 함박웃음이 나올 수 있는 ‘행복’은 나의 능동적인 행동-시험공부를 위한 노력과 같은 행동-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능동적인 몸부림과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고 그것이 행복에서의 '플러스'적인 요소라고 본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첫걸음을 떼기 위해서는 수많은 뒤집기와 기어가기 등의 적극적 행동과 넘어짐이라는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드디어 첫걸음을 내딛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손을 치켜들기도 한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수없이 지켜봐 왔던 부모님의 얼굴도 환한 행복의 웃음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아기이지만 스스로 플러스적인 노력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지 않을까?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 마음은 지난 3년간의 고생 끝에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 기쁨, 그리고 행복감이 무엇보다도 클 것이다(물론 슬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이라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능 행사장을 나올 때는 마치 귀찮은 것이 끝났다는 수동적인 감정만 밀려올 뿐이다. 이것을 행복한 감정으로 부르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러므로 결국 행복은 각자의 출발점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 행동이 수반된다. 그 출발점은 누구에게는 재산 100억이 될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영어 점수 20점이 되기도 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학교 등교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재벌 3세 등의 일탈은 이미 출발점(부의 기준으로만 본다면)이 평범한 우리들보다 훨씬 앞서 있기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있는 플러스적인 요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마약과 같은 일탈적 행동에 쉽게 빠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읍면지역의 고등학교로 발령 나서 처음 만난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여태까지 내가 가르친 학생들 중 출발점이 비교적 낮은 편에 속한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매일 놀라움과 기쁨, 행복, 때로는 실망과 좌절도 안겨준 녀석들이기도 하다.
요리사가 꿈인 친구, 배를 타고 싶다는 친구, 전문대라도 합격하길 바라는 친구,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만 벗어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친구, 4년제 대학만 가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친구에 이르기까지 전에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던 일들을 일상처럼 얘기하는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에게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니어도 그들은 무척 감사해했고 졸업 후에도 만날 수 있는 관계가 되기도 하였다.
그렇다.
모든 사람들의 꿈이, 최종 목적이 다 같지 않은 것처럼, 출발점 또한 다 다르고 그 길 위에서의 과정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늦게 출발해도, 천천히 걸어가도 길가에 핀 꽃에서 행복을 느낄 수만 있다면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가면 어떤가? 학교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