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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Mar 13. 2024

여기에 없는 사람,
그를 현실로 부르는 목소리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린 램지, 2017)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암전된 화면에 숫자를 거꾸로 세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중간중간 어른 남성의 분노에 찬 고함이 끼어든다. 장면이 바뀌면, 비닐을 얼굴에 뒤집어쓴 조(호아킨 피닉스)의 모습이 보인다. 들숨과 날숨이 힘겹게 이어질 때마다 비닐이 얼굴에 달라붙어 질식할 것만 같다. 생명을 왜 다른 말로 ‘목숨’이라고 하는지, 죽음을 ‘목숨이 끊어지다’라고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되는 이 장면이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린 램지, 2017)의 오프닝 시퀀스다.     




   처음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알고 보면 이것은 조의 빈번한 자살 시도 중 하나다. 바로 앞에 나온 장면은 파편적으로 떠올라 그를 괴롭히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그럴 때마다 조는 옷장에 숨어 숨을 죽인 채 숫자를 셈했다. 조는 또한 전쟁에 참전했다가 끔찍한 장면을 무수히 목격했다. 그는 유년기의 가정 폭력과 참혹한 전장의 이중 PTSD(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다. 조는 지금 여기에 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과거에 갇힌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폭력의 트라우마를 겪는 이의 직업이 살인 청부업자인 것은 아이러니다. 그것도 무자비한 걸로 명성이 높다. 조는 어쩌면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물리적인 힘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자살 충동을 느끼면서도 조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어머니다. 조는 자살을 시도하다가도 어머니가 부르면 달려가 노쇠한 그녀를 살뜰하게 챙긴다.     


   그러던 어느 날 조에게 위험한 의뢰가 들어온다. 한 상원 의원의 딸이 성매매 조직에 납치되었는데 그녀를 구출하고 피의 복수를 해달라는 것. 조는 의원의 딸 니나를 조직에서 빼내오는 데 성공하지만, 곧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니나의 아버지는 미심쩍은 죽임을 당하고 니나는 다시 납치된다. 그리고 조의 연락책은 물론 어머니까지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어머니가 죽자 조는 삶을 이어갈 이유를 잃는다. 어머니의 시체를 안고 강으로 걸어 들어가는 조의 모습은 역할이 뒤바뀐 ‘피에타’를 연상시킨다. 고요한 물속에서 숨을 멈춘 채 부유하는 인물은 경건한 인상마저 풍긴다. 하지만 그때 조의 눈앞에 익사하는 니나의 환상이 보인다. 니나를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조를 괴롭힌 것이다. 결국 조는 주머니를 채웠던 돌을 꺼내고 물 위로 떠 오른다. 이때 니나의 환상도 방향을 틀어 수면으로 부상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다시금 폭력이 난무하는 구출 작전이 시작된다. 감독은 조가 저택에 들어가 니나를 구해서 나오기까지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을 흑백의 CCTV 화면으로 대체했다. 액션 신은 스펙터클하기보단 빠르게 지나가고, 폭력의 두 피해자 조와 니나가 조우하는 장면에 집중한다. 바로 직전 “나는 나약해, 나는 나약해.”라며 오열한 조에게 니나는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충격적이면서도 여운이 오래 남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두 사람은 식당에 앉아있다. 니나는 조에게 이제 우린 어디로 가냐고 묻고, 조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답한다. 조의 어머니도, 니나의 아버지도 죽은 상황에서 두 사람은 이제 갈 곳이 없다. 그리고 니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조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다. 테이블 위로 엎어진 조의 머리에서 찐득한 피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상하다. 주위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의 피가 튀었는데도 점원은 웃으며 테이블에 영수증을 두고 간다. 이때 자리로 돌아온 니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 일어나요. (Wake up! Joe.)”   

  

   니나의 호명이 조를 현실로 부른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어머니가 "조"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를 각성시키고 삶에 붙들어 놓는 건, 그를 필요로 하는 그보다 나약한 존재들의 목소리였다. 호명이 그에겐 소명으로 작동한다. 니나의 마지막 말, “아름다운 날이에요. (It’s a beautiful day.)”는 이 영화의 추악하고 잔혹한 측면을 상쇄시킨다. 희망적이라고까진 할 수 없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비극적인 운명을 극복할 가능성을 보게 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떠나고 빈 테이블을 카메라가 오래 비춘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영화의 제목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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