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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Apr 02. 2024

새로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아

영화 <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괴물>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미나토와 요리다. 두 아이의 이야기를 감독은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와 담임인 호리 선생의 시점을 경유해서 서술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1, 2부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단편적인 장면들을 끼워 맞춰 가며 ‘괴물 찾기’에 몰두했던 관객은 3부 미나토의 시선으로 사건을 따라가며 비로소 진실을 마주한다. 진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아이들 세상에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기에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 준다.     




   처음에 관객은 사오리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된다. 사오리는 미나토의 최근 이상행동에서 학교 폭력을 의심하고 가해자로 호리 선생을 지목한다. 학교에 이를 항의하기 위해 방문하지만, 교장 등 선생들의 대처 방식과 당사자인 호리 선생의 사과하는 태도는 의심만 키운다. 특히 교장은 최근에 손녀를 비극적인 사고로 잃었다고는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마트에서 뛰는 아이의 발을 걸기도 하고 학부모 자리에서 잘 보이도록 죽은 손녀의 사진을 세팅하기도 한다). 학교와 선생이 비인간적인 ‘괴물’ 같다는 사오리의 말에 관객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시점이 호리 선생으로 바뀌면, 의심의 화살도 방향을 튼다. 이제 ‘괴물’은 학부모인 것 같기도 하고(동료 선생은 교사 수난 시대라며 학부모를 “몬스터”라 칭한다) 아이들 같기도 하다.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힌다는 호리 선생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이고, 아무런 잘못이 없는 호리 선생을 거짓말로 무고하는 미나토와 요리가 수상쩍게 느껴진다.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들먹이며 호리 선생을 몰아세우는 사오리의 반응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들을 ‘골치 아픈 애’라며 ‘돼지 뇌’를 가진 ‘괴물’이라고 말하는 요리의 아빠는 진짜 ‘괴물’ 같다. 이 와중에 마냥 해맑은 요리도 살짝 무섭게 느껴질 지경이다.     



   이렇게 의심하다 보면 결국 괴물이 아닌 존재가 없는 듯한데, 마지막 3부에 이르면 이 모든 게 각자가 보고 들은 제한된 정보만으로 사건을 섣부르게 재구성한 결과라는 게 밝혀진다. 그리고 관객은 예상치 못했던 두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목격한다. 사실 요리는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미나토는 그런 요리가 염려되고 마음이 쓰였다. 미나토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우정 이상이라는 사실이 혼란스러웠고 엄마와 호리 선생이 무심코 뱉은 ‘평범함’과 ‘남자다움’을 요구하는 말에 상처를 입어왔다(“어디에나 있는 아주 평범한 가족이면 돼.” “남자는 꽃 이름 몰라야 인기가 있다고 엄마가 그랬어.” “그러고도 남자냐?” “남자답게 악수해”). 미나토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거짓말을 해왔던 거였다. 


     

   앞에서 불길하게 반복되었던 “괴물은 누구게?”라는 외침은 알고 보니 두 아이가 비밀 아지트(산속 버려진 기차)에서 즐기던 놀이였다. 이마에 댄 카드 속 그림을 맞히는 게임. 요리가 “당신은 적에게 공격당했을 때 온몸의 힘을 다 빼고 포기합니다.”라고 나무늘보를 설명하자, 미나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는 호시카와 요리입니까?”라고 답한다. 요리를 향한 미나토의 마음이 느껴져 울컥하게 되는 장면이다. 태풍이 몰아친 날, 미나토와 요리는 우주가 팽창하다 붕괴된다는 ‘빅 크런치’를 맞으러 아지트로 향한다. ‘빅 크런치’ 이후에는 시간이 거꾸로 흘러서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뒤늦게 빗줄기를 뚫고 사오리와 호리 선생이 산사태에 파묻힌 기차를 찾아오지만, 그곳에서 두 아이를 발견했는지 영화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미나토와 요리가 햇살을 받으며 풀밭을 질주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진흙을 잔뜩 묻힌 채 좁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미나토와 요리는 서로에게 말한다. “우리는 새로 태어난 걸까?”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아. 원래 그대로야.” “그래? 다행이네.” 그리곤 두 아이는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달린다. 숨통이 탁 트이는 이 장면을 위해 영화가 지금까지 재난 같은 시간을 보여줬나 싶다. 사건은 두 아이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거기에 불을 지르고 세찬 폭풍우를 들이부어 재난으로 키운 것은 어른들이다. 그리고 관객도 나의 기준에서 이해가 안 되는 인물을 ‘괴물’이라고 속단해 왔음을 부끄럽게 깨닫게 된다. 아이들을 한순간이라도 의심했었다는 사실이 미안해진다. 그래서 아이들이 마침내 도달한 저 자유가 마음 아리도록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 장면이 환상이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새로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비록 영화가 가리키는 게 아이들의 죽음일지라도.


<괴물>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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