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공법이 통한 이유
"네가 직접 봤어? 누구한테 확인한 거야, 취재 어떻게 했어?"
"아, 그게..."
"야!! EC .. XYZ #$%^~~!!"
현장에 가보지 않은 수습기자의 보고는 금방 탄로 난다. 거짓말은 말할 것도 없고 취재가 부실해도 당연히 바로 티가 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내가 기자로 입사했던 2008년만 해도 —라떼는— 아직 우리나라 대부분 언론사가 이른바 '하리꼬미'라는 경찰서 밤샘 뺑뺑이를 돌리며 수습기자를 교육하던 때였다. 교육을 빙자한 매우 비인간적인 노동으로, 진즉에 사라졌어야 할 낡은 교육 방식이자 전형적인 구습이었다. 그렇게 안 해도 얼마든지 취재하고 기사 쓰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어쨌든 고된 5개월의 수습 기간을 거치며 배운 건 현장에 늘 답이 있다는, 어찌 보면 뻔한 사실이었다. 어떤 사안을 정확히 아는 사람을 취재하는 게 중요한데, 그 사람은 어디 있을까? 당연히 사건이든 사고든 또는 집회든 논란이든 새로운 트렌드든 현장에 있다. 가서 직접 보고 물어서 들은 다음 쓰지 않은 기사는 단순히 현장감이 떨어져서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기자의 머릿속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고 쓰여서 문제다. 좋은 기사를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이유도 이거 아닐까? 그렇다고 기자들을 향한 도 넘은 비난에 말을 보탤 생각은 없다. 오히려 기자들을 변호하고 싶을 때가 훨씬 더 많다. 내 정체성을 여전히 기자 혹은 이야기꾼(storyteller)에서 찾다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수준 떨어지는 기사를 욕하는 데 힘을 낭비하기보다 좋은 기사를 발견하면 그걸 비판적으로 읽는 데 품을 들이고 그를 통해 새로운 걸 배우는 편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게 조디 칸터(Jodi Kantor)와 캐런 와이스(Karen Weise) 두 기자가 쓴 아마존 노동조합 기사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수작이었다.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고, 읽고 나니 새삼 깨달은 것도 많았다.
"너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어?"
"너희 몇 명이서 감당할 문제가 아니야."
"베시머 결과 봤지? 아마존은 노동조합이 발 붙일 수 없는 기업이야. 아니, 아마존만 그럴까? 미국이 원래 다 그래."
크리스 스몰스가 지난 2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JFK8 노동자 가운데 절반을 너끈히 넘는 다수가 노동조합을 세워야 한다고 표를 던진 결과가 나온 지금도 끝내 노조는 아마존의 벽을 넘지는 못할 거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하다.
분명 아마존은 노동조합을 막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 거다. 미국 언론을 직접 매수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여론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돌릴 권능이 있는 아마존이다. 제프 베조스는 워싱턴포스트의 사주이기도 하다. 아마존은 노조를 저지하고 파괴하는 데 필요한 변호인단, 컨설턴트로 드림팀을 만들 수 있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럴수록 지금은 스몰스가 여기까지 온 비결을 알아보고 싶었다. 이때 내가 기자라면 당연히 스몰스를 만나야 한다. 스몰스의 이야기를 충분히 담지 못한 기사는 지금 시점에선 업계 용어로 "물 먹은 기사"나 다름없다. 그런데 돈키호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이었고, 심지어 전직 래퍼에 패션 감각까지 뛰어나서 주목받는 유명인사가 된 스몰스를 이제 와서 부랴부랴 섭외하려고 하면 제대로 된 인터뷰가 가능할 리 없다. 원래 사회적으로 이미 마이크를 쥐고 있는 사람은 기자가 열심히 찾지 않아도 자기 할 말을 다 한다. 세상을 향해 간절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마이크가 주어지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잘 찾아서 얘기를 들어보고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마이크를 쥐어주는 게 기자의 일이다. 그렇게 쌓은 취재원과의 신뢰는 (매번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언젠가 빛을 발하곤 한다.
뉴욕타임스는 스몰스가 조업 중단을 벌였다가 해고당한 직후부터 꾸준히 스몰스와 아마존 노동조합의 여정을 취재해 왔다.
2020년 여름부터 이 문제를 취재하기 시작한 칸터와 와이스 기자는 아마존, 노동조합이라는 키워드만 넣어도 이미 책 한 권은 너끈히 쓸 수 있는 분량의 취재를 바탕으로 기사를 써왔다. 현장을 취재해 쌓은 자료와 내공으로 쓴 기사는 단연 돋보인다. 아마존 내부 문서나 자료를 인용해 설명하는 지점에선 소름이 돋을 정도다. 기자와 취재원 사이의 신뢰가 있었기에 스몰스와 팔머는 팟캐스트에도 흔쾌히 출연했으리라. 덕분에 텍스트로 읽는 것보다 오디오로 듣는 쪽을 더 좋아하는 나도 스몰스가 해온 싸움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브런치에 소개할 수 있게 됐다.
지난 2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강은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다. 한국 언론에도 기사가 많이 났다.
오늘 JFK8 마지막 글에선 마이클 바바로 기자가 진행하는 뉴욕타임스 데일리 팟캐스트에 출연한 스몰스와 팔머, 그리고 칸터 기자의 말 가운데 인상적인 부분, 또 재밌던 내용을 번역해 소개한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도대체, 어떻게 아마존에서 노조를 결성할 수 있었던 걸까요? 오늘 데일리에는 그 주역인 크리스 스몰스와 데릭 팔머 두 노동자를 모셨습니다. 조디 칸터 기자도 함께합니다. - 바바로
Against All Odds. 마이클 바바로가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힘을 줘 말했다. 저 말을 들으면 필 콜린스가 부른 띵곡의 제목을 먼저 떠올리는 분 많으실 거다. 조금 어려 보이고 싶어서 굳이 TMI를 보태자면, 나는 웨스트라이프와 머라이어 캐리가 같이 부른 버전을 먼저 들었고, 1984년에 발표된 원곡의 존재는 나중에 알았다. 아무튼 저 표현은 "모든 가능성에 맞서", 즉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이뤄낸 무언가를 지칭할 때 쓰인다. 아마존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된 일을 두고 쓰기 딱 좋은 말이다.
아마존은 매년 놀라운 속도로 성장을 거듭했고, 물류창고 수요도 계속 커졌다. JFK8은 2018년에 문을 열었다. 2015년부터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일한 6년 차 숙련 노동자 스몰스는 몇 차례 승진해서 어느덧 물류창고 안에선 중간 관리자가 됐다. 새로 들어온 노동자에게 일을 가르치고 이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물류창고를 짓고 나면 거기서 일할 노동자를 새로 뽑기도 하지만, 기존 아마존 직원 가운데도 누군가 가서 업무를 지시하고 시스템을 관리해야 했다. 스몰스는 그 일도 자원해 총 세 군데 물류창고를 여는 데 관여했고, JFK8은 그중에 세 번째 물류창고였다. 물류창고 업무에 관해선 잔뼈가 굵은 스몰스였지만, 빡빡한 교대 근무 일정표 탓에 처음에는 원하는 시간에 일할 수 없었다.
아마존은 제게 목, 금, 토 각각 12시간 일하는 근무를 배정했어요. 주말을 다 잡아먹는 일정이었죠. 저는 뉴저지에 살았는데, 그때는 차가 없었거든요. 그 말은 JFK8까지 출퇴근이 편도로만 2시간 반에서 3시간씩 걸린다는 거예요. - 스몰스
맨하탄 야경 맛집이 바로 강 건너 뉴저지에 있고, 뉴저지에서 스테이튼 아일랜드까지 차로 가면 10km 남짓한 거리밖에 안 될 텐데 2시간 반이 웬 말이냐고 생각하시는 분 계실 거다. 그래서 금요일(15일) 오후 2시 현재 기준으로 구글맵으로 길 찾기를 해봤다. 스몰스가 뉴저지 어디 살았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므로, 뉴욕에 가까운 지역 가운데 서민층이 많이 모여 사는 뉴왁(Newark)을 출발지로 설정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보시는 대로다. 대중(大衆)이라는 이름이 붙은 수많은 제도 가운데 미국의 대중교통만큼 대중을 철저히 외면하는 시스템이 또 있을까 싶다. 차로 가면 20분도 안 걸리는 거리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열차, 버스가 제때 맞춰 와 줘야 2시간 28분이다. (마지막 옵션의 뉴왁 공항버스는 공항에서 출발하는 버스라서 뉴왁 주민이 통근용으로 타기 어려워 제외했다.) 원치 않게 뉴욕을 빙 둘러 가다 보니, 얼마 전 총기 난사 사건이 났던 브루클린 선셋 파크도 지난다.
인프라가 낙후된, 열악한 대중교통은 뉴욕은 물론 시카고, 애틀랜타 등 미국 거의 모든 도시가 공통으로 앓는 고질병과도 같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서민의 발"이 되어야 할 대중교통이 오히려 대중교통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박에 없는 스몰스 같은 서민들이 이용하기에 극도로 불편하게 돼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시가 발전하고 확장하면 도심 지역의 집값이 오른다. 비싼 집값과 물가를 감당할 수 없는 서민들은 점점 도시 외곽으로 밀려난다. 계약직, 비정규직 일자리를 하루에 두세 탕씩 겸해야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노동자 가운데는 자가용이 없어서 출퇴근을 대중교통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이 많다. (뉴욕은 차가 있더라도 교통 체증으로 날리는 시간, 주차비를 생각하면 맨하탄에 차를 가져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역세권에 살 수 없어 매일 길에 4~5시간을 버려야 하는 삶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차로 20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우버로 가면 얼마가 나오나 검색해봤다. $50가 나왔다. 출퇴근 시간대에 수요가 높으면 더 비쌀 수도 있다. 편도 $50로 계산해도 하루에 $100짜리 출퇴근은 최저임금을 조금 웃도는 급여를 받는 노동자에겐 감당할 수 없는 사치다. (뉴욕시의 최저임금은 시급 $15. 아마존은 팬데믹 때 구인난이 심해지자 물류창고 노동자들의 초임 시급을 꾸준히 올려 $18가 조금 넘는다.) 오히려 경영직 직원들의 급여 명세에는 교통비가 따로 책정된 경우가 많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물류창고 노동자들과 경영직 노동자들이 철저히 이원화돼 있기 때문인데, 이 얘기가 곧바로 나온다.
팔머는 2015년 7월에 아마존에 입사했다. 마찬가지로 물류창고에서 재고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JFK8이 뉴욕 케네디 공항(JFK)의 이름을 딴 물류창고이듯, 뉴저지 뉴왁에 있는 공항의 코드가 EWR인데, 뉴왁 공항 근처에는 또 다른 아마존의 물류창고 EWR4가 있다. 팔머의 첫 일터는 EWR4였다.
아마존에 입사하기 전, 저는 변변한 직장이 없는 상태였어요. 엄마가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사람 뽑는다는데 지원해보라고 얘기해주셔서 일하게 됐죠. 엄마 아니었으면 그런 기회가 있는 줄도 몰랐을 거예요. - 팔머
스몰스도 엄마가 알려줬다고 한다. 갑자기 분위기가 "역시 엄마 말씀을 잘 들어야..."가 됐다가 인터뷰가 이어진다.
물류창고에 일하러 와보니 아마존이 꽤 많은 사람들을 고용했더라고요. 아마존 덕분에 일자리도 생기고 좋았죠. 세계 최고 기업이라는 데서 일하게 됐으니, 얼른 일 잘 배워서 한 번 열심히 해보자, 그래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한 번 가보자고 생각했어요. - 팔머
스몰스와 팔머는 처음 입사했을 때 포부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일했다. 그렇지만 경력이 쌓인 뒤에도 원하는 근무 시간을 고를 수 없었고, 열심히 일해도 승진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그 이유를 칸터 기자는 아마존의 조직 구조에서 찾았다.
제프 베조스가 설계한 아마존 인력 구조의 핵심은 주로 물류창고에 배속하는 저숙련 노동자(lower-level warehouse jobs)들이 물류창고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반대로 경영직(management jobs)이나 시애틀 본사에서 주로 일하는 사무직(corporate jobs) 노동자들은 대학교 졸업장이 있는 직원만 뽑아 정규직으로 채용하죠. 이들은 물류창고 노동자들과 사실상 다른 회사를 다닌 셈이에요. 물류창고 노동자들이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정규직으로 승진할 수 없던 이유도 거기에 있죠. - 칸터
노동자가 열심히 일할 유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열심히 일하면 월급도 오르고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할 수 있는 길이 보이면 자연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나오고, 그중에 일 잘하는 사람도 나온다. 그런 자연스럽고 건강한 욕망에서 비롯된 노력이 모여 조직은 성과를 내고 성장한다. 그리고 성장의 열매를 다시 조직원과 나누는 바람직한 선순환 구조. 아마존을 이렇게 묘사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텐데, 문제는 이런 이상적인 모습이 아마존의 절반, 즉 경영직과 사무직에만 해당한다는 점이다. 스몰스와 팔머가 일했던 물류창고 노동자들에게는 달나라 이야기였다.
세상의 모든 선순환 구조를 지탱하는 건 넉넉한 자원이다. 자원이 희소하면 경쟁이 생기고 경쟁에서 지면 도태되는 건 어쩌면 세상의 이치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경쟁에서 밀려 도태되는 이가 경제학 원론 교과서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예전에는 컴퓨터 학원에 밀려 도태된 주산 학원이 예로 나왔는데, 요즘엔 코딩 학원에 밀려 도태된 컴퓨터 학원이 되려나—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들, 아니 곧 우리 자신일 때다.
JFK8의 이직률(turnover rate)은 무려 150%였어요. 물류창고 노동자들이 일을 시작하면 평균 8개월 만에 일을 그만뒀다는 뜻인데, 이건 심지어 팬데믹이 오기 전의 수치예요. 코로나19가 덮친 뒤 여기 같이 나온 스몰스나 팔머 씨처럼 안전하지 않은 근무 환경 때문에 자의로 또는 타의로 일을 그만둬야 했던 노동자들이 많으니 지금 이직률은 아마 더 높겠죠. - 칸터
열심히 일해서 경험이 쌓인 숙련 노동자는 물류창고 운영비를 최적화해야 하는 아마존에겐 비용만 더 드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경영직, 사무직에선 모두가 선망하는 일자리를 만들어 우수한 인재를 채용한 아마존은 물류창고 고용 구조를 짤 때는 그런 선순환 구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을 끝없이 뱉어냈다. 직접 해고한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열심히 일해봤자 월급도, 직위도 더 오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노동자들이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달삼쓰뱉도 아니고 딱 한 번 맛보고는 어김없이 더 싼 것, 새것만 찾는 물류창고의 고용 구조는 아마존이 올리는 막대한 이윤의 핵심 토대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낸 이윤은 대부분 주주 몫으로 돌아간다.
그런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쳤다. 우리 모두 그랬던 것처럼 JFK8의 노동자들에게도 2020년 3월의 팬데믹은 처음 겪는, 낯선, 미지의 존재라서 더 무서운 무언가였다.
뉴스를 보면 새 바이러스가 뭔지 몰라도 꽤 심각해 보이는데, 회사는 그저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자꾸 딴소리를 하니까 더 무서웠어요. 한 번은 동료들이 다같이 휴게실에 모여서 TV를 틀었는데, CNN에서 6피트 거리두기를 하고 마스크도 써야 한다는 거예요. 물류창고에서 일하려면 두 가지 다 절대로 할 수 없는데 말이죠. 이러다 진짜 다 큰일 나는 거 아닐지 덜컥 겁이 났죠.- 스몰스
물류창고 노동자들에겐 한없이 두려운 바이러스였지만, 수많은 사람이 집에 갇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걸 온라인으로 주문하기 시작하자 아마존은 팬데믹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기 시작했다. 베조스를 비롯한 아마존의 경영진이 물류창고의 안전한 근무 환경에 신경을 안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올까?' 싶은 엄청난 수요가 모니터 너머에 선명하게 보이자, 아마존의 머릿속에서 물류창고 노동자의 안전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자본가가 탐욕에 눈이 멀어 노동자를 한낱 기계 부품처럼 다루는 모습을 우리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목격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마존 입사 6년 차 중간 관리자였던 스몰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물류창고 인사팀 관리자를 찾아갔다.
뭐 대단한 말 하러 간 거 아녜요. 중간 관리자로서 물어봐야 했던 걸 물어보러 간 거죠. 아니, 지금 여기서 일하는 사람 중에 애들 학교가 갑자기 문을 닫아서 당장 집에서 애 봐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이 든 부모님과 같이 사는 사람은 바이러스가 몇 배는 더 무서울 거 아녜요. 그런 거 물어보러 갔어요. 회사는 무슨 계획이 있냐고. 그런데 CDC 방침만 따르면 된다는 말만 하고는 별 다른 계획은 없더라고요. 그러면서 일하기 싫으면 안 나와도 된다, 그렇지만 근무를 안 하면 급여도 없다고 하더군요. 이게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게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급여 밀리면 당장 이번 달 월세, 통신비, 공과금 같은 거 못 내는 사람이 수두룩해요. - 스몰스
심지어 안전이 걱정되면 일하러 나오지 않아도 된다던 인사팀의 메시지도 곧바로 혼선을 빚었다. (아마도 일괄적으로 자동 발송된 메시지겠지만) 회사 차원에선 전혀 다른 지침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아마존은 JFK8 노동자들에게 전체 메시지로 "전원 특근"을 지시했다. 전례 없이 늘어난 주문에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던 본사와 불안에 떠는 현장 노동자들을 지켜본 관리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한 셈이다. 사무직과 물류창고 노동이 얼마나 이원화돼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마도 경영진은 집이나 한적한 교외에 별장을 구해 안전하게 재택근무하면서 바이러스를 모니터 속의 숫자와 글자로만 접했을 거다. 그러지 않고선 "전원 특근" 지침은 못 내렸을 거(라고 믿고 싶)다. 최소한 현장에서 상황을 지켜본 관리자들은 (월급은 못 주더라도) 걱정되면 집에 있으라고는 하지 않았나.
스몰스는 매일 인사팀을 찾아가 닦달했다. 그러다 하루는 근무 시간이 달라 자주 보진 못하던 동료 한 명과 마주쳤다. 구하기도 힘든 마스크를 어디서 구했는지 쓰고 있던 동료는 한눈에 봐도 무척 아파 보였다. 안 그래도 아파서 그저께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잠깐, 뭐라고? 검사를 받았다고? 아니, 근데 이 사람 아팠던 지난 며칠 내내 출근해서 물류창고에서 일했을 거 아녜요. 진짜 TV에서만 보이던 바이러스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이었어요. 일단 그 사람부터 집에 보냈어요. "네가 오늘 해야 하는 남은 일 내가 다 맡아서 처리하겠다. 잘 말해둘 테니 일단 집에 가서 쉬라"고 했죠. 그 다음날인가 그 동료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양성이었어요. 제가 아는 JFK8 첫 확진 사례예요. 그날은 저도 일 안 했어요. 여기 남아있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다 싶었는데, 지금 일이 중요해요? 당장 아래층에 있던 데릭 데리고 창고를 나왔죠. 집에 갔어요 그날은. - 스몰스
이튿날 스몰스와 팔머는 동료들에게 물류창고 안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길로 물류창고 관리자를 찾아갔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2주간 물류창고를 닫고 건물 전체를 소독한 뒤 다시 열라는 것이었다. 당시 CDC가 내놓은 방역 지침을 따른 것으로 딱히 급진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주장이었지만, 관리자의 뒤에는 절호의 기회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 본사가 버티고 있었다. 스몰스의 요구는 묵살됐다.
아침마다 그 관리자를 찾아갔어요. 한 며칠 그랬을 거예요. 데릭을 포함해 열 명, 열다섯 명 정도가 같이 갔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하루는 관리자와 일대일 면담을 할 수 있게 됐는데, 그 자리에서 선전포고를 했죠. 빨리 결정을 안 내리면 행동에 나서겠다고요. 사실 별 계획도 없었는데, 그렇게 으름장이라도 놓으면 회사가 달리 나올까 싶어서 그냥 질러본 말이에요. 그랬더니 관리자는 다른 지침은 안 내리고, 확진자와 밀접 접촉했다는 이유로 제게만 다음날 집에 있으라며, 자가격리 처분을 내렸어요. - 스몰스
이튿날도 스몰스는 팔머와 출근했다. 회사의 지침을 따르자면 하루 동안 집에서 나와선 안 됐지만, 이미 자기 말고도 수많은 동료가 똑같이 바이러스에 노출된 상태인데,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있을 순 없었다. 그러다 문득 켄터키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부실한 방역 대책에 항의하며 조업 중단을 벌였고, 주지사까지 다급히 나서 공장을 임시 폐쇄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본 생각이 났다.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뭔가 싶었어요. 한 번 해보자고 마음먹었죠. 3월 30일 정오에 JFK8 아마존 물류창고 노동자들이 조업중단을 벌일 거라고 예고했어요. 신기하게도 곧바로 여러 언론사에서 전화가 오더라고요. 제 머릿속에 계획이 있긴 했으니 거짓말은 아닌데, 하아... 그런데 조업중단에 노동자들이 몇 명쯤 나오냐는 질문에는 솔직히 할 말이 없더라고요. 모르죠! 저도 궁금했으니까요. 뉴스에선 사람이 많이 나오는 그림을 원할 텐데, 그렇다고 솔직하게 한 다섯 명 오지 않을까요? 하면 누가 카메라 들고 오겠어요? 그래서 거짓말을 했죠. 200명 나옵니다!라고 했어요 ㅋㅋㅋ - 스몰스
물론 아무런 대책이 없던 건 아니었다.
[30일] 기온을 확인했더니 60도였어요. 주변 동료들한테 이렇게 말했죠.
“자자, 날도 좋은데 30일 점심은 다같이 밖에 나가서 먹읍시다!” – 스몰스
화씨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아서 감이 잘 안 온다. 60도는 섭씨 15도 정도다. 4월에 눈이 내리기도 하는 제멋대로 뉴욕 날씨니까 3월 말에 15도면 밖에서 시위하기 딱 좋은 날씨다.
3월 30일. 조업중단의 날이 밝았다. 스몰스가 양치기 소년이 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날이었다. 전날 저녁으로 곤죽이 된 스파게티를 데워 먹은 스몰스는 속도 안 좋고 긴장이 돼서 잠을 거의 한숨도 못 자고 아침 일찍 데릭과 물류창고로 나갔다.
와, 언론사들이 중계차에 헬기까지 띄워놓고 잔뜩 대기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모습은 당연히 난생처음 봤죠. 맙소사. 진짜 우리가 뭔가 일을 벌이긴 했구나 싶었어요. 12시가 땡 했을 때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5분 지나고 10분 지나고 나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왔어요. 5~60명? 아니, 100명은 됐을 거예요. 다행히 저랑 데릭, 그리고 몇 명이서 주차장 한 귀퉁이에 초라하게 피켓 들고 서 있는 그림은 아니었죠. - 스몰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뉴욕에 한창 퍼지던 시점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검사 인프라도 없어서 확진자 집계도 제대로 안 되던 시점이었지만, 언론은 JFK8 노동자들의 조업중단을 일제히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크리스 스몰스는 해고됐다.
한 4시 35분쯤이었을까요?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고, 전화로 바로 해고 통보를 받았어요. 소명할 기회 같은 건 물론 없었고요. - 스몰스
아마존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스몰스가 자가격리 지침을 어겼기 때문에 해고한 거라고 설명한다. 다만 스몰스가 해고된 3월 30일, 아마존 인사팀 직원들끼리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보면 공식적인 입장과는 좀 결이 다른 걱정이 읽힌다.
저희가 직접 확인한 내용인데요, 제가 직접 읽어드릴게요.
“어휴, 지금 저 사람들 CDC 지침대로 사회적 거리두기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평화롭게 시위 벌인 건데, 그 사람 해고하면 누가 봐도 회사가 인사 보복한 거로밖에 안 보일 것 같은데? 이건 아니지 않나.”
“미쳤네 미쳤어.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심지어 아마존의 관리직, 경영직 직원 중에도 이날 현장에서 상황을 본 사람들은 스몰스를 이렇게 단번에 해고하는 게 좋은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방증이죠. - 칸터
이어서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기 어려운 이메일 발송 사고가 벌어진다. 아마존의 한 법률 고문(Chief Counsel)이 스몰스를 이번 사건의 주동자로 몰아 본보기 차원에서 조처하는 게 좋겠다는 내용의 내부 이메일을 보내면서 스몰스를 “그닥 똑똑하거나 사려 깊지 않은 인물(not smart or articulate)”로 평가했는데, 그 메일을 실수로 아마존 직원 1천여 명에게 보낸 것이다.
이메일을 본 스몰스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당연히 기분은 나빴죠. 그래도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요. 근데 사실 우리는 평생을 그런 시선을 받아가며 살아왔거든요. 흑인은 똑똑하지 않다거나 생각이 깊지 않다는 그런 편견들, 익숙하죠. 흑인을 자기보다 못한 부류로 생각하는 사람이 좀 많은 세상인가요 뭐. – 스몰스
친구를 향한 마녀사냥이 시작되는 장면을 본 팔머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도 놀랐다고 말한다.
아니, 수조 달러를 버는 회사의 경영진, 관리자라는 사람들이니까 못 해도 연봉도 엄청 많이 받고 할 텐데, 그 사람들이 시급 25달러쯤 받는 크리스 같은 사람의 행동에 왜 저렇게들 벌벌 떨며 대책회의까지 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 팔머
상식적으로 부당해고로 볼 소지가 다분한 결정이었지만, 미국 노동법은 (특히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은) 노동자에게 쓸 만한 방패가 되어주지 않는다. 이제 물류창고로 출근해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언론 보도와 이메일 발송 사고로 졸지에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인사가 된 스몰스는 바이러스가 계속 퍼지는 상황에서 더 안전한 노동 환경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계속하기로 한다. 그를 위해 만든 단체가 “필수노동자 모임(Congress of Essential Workers)”이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마존 물류창고 노동자들, 나아가 모든 작업장의 필수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했다. 새 단체의 목표는 기꺼이 그런 창구로 쓰이는 것이었다.
제프 베조스의 펜트하우스 저택이 있는 뉴욕에서 대장정을 시작했어요. 전국의 아마존 물류창고 가운데 우리더러 오라는 데는 다 가볼 생각이었죠. 물론 물류창고가 워낙 많긴 했지만요. 그렇게 전국을 돌던 중 베시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투표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죠. - 스몰스
* 글이 너무 길어지니 여기서 3/3 편을 올리고 뒷부분은 추가로 더 정리해서 JFK8 번외 편으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