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사서 고생'
"띠리링! 띵, 딩, 딩... 띠리링! 띵, 딩, 딩."
일요일 새벽 4시 반에 알람이 울린다. 오늘은 아내가 연초부터 맹훈련한 결과를 증명하는 날이다. 아내는 강 건너 브루클린에서 열리는 하프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다. 수업에 연구에 논문 쓰고 학생 지도하고, 학회 가서 발표하고 학회 조직하고... 아내가 없으면 미국 정치학계가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 만큼 바쁘게 학기를 보낸 아내는 그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훈련을 거르지 않고 달렸다.
그런 아내가 손꼽아 기다린 날이니, 나도 아내를 응원하는 마음 80에 같이 뛰지 못해 미안한 마음 20을 담아 힘차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잠든 지 이제 30분 정도가 지났기 때문이다. 하필 내 안의 글 쓰는 올빼미가 오랜만에 토요일 밤에 깨어난 데다 프랑스 대선 관련한 글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됐다. 글을 쓰다 보니 뉴욕보다 6시간 빠른 프랑스에서 결선 투표가 시작됐고, 투표소 이모저모 류의 기사를 찾아보며 글을 다 쓰고 나니 어느덧 3시 반이 됐다.
이때 바로 잠을 청했어야 했다. 그런데 혹시나 한화 이글스가, 절대 그럴 리 없지만, 4연승을 하지는 않을까, 점수만 확인해 보자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중계를 틀었다. 마침 "최강한화" 육성 응원이 펼쳐지는 8회말이었다. 육성 응원을 음소거로 따라하며 야구를 보다 허무하게, 그럼 그렇지, 한화를 욕하며 중계를 끄고 나니 4시였다. 아, 어차피 질 거 괜히 봤다. 30분 더 있으면 아내가 일어날 텐데 그냥 잠은 이따 자고 달리기 전에 탄수화물 섭취해줘야 한다니까 식빵에 바나나 올려서 샌드위치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반시간 뒤 알람 소리에 간신히 든 선잠을 깼다.
올빼미에겐 뭘 해도 가혹한 일요일 새벽 4시 반이었다. 아내는 도저히 눈을 못 뜨고 비틀대는 나를 보더니 혼자 조용히 샌드위치를 만들어 방에서 먹고 결연히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아, 원래 내가 밥 챙겨주려고 했는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나는 계속 잔 것 같다.
그러나 5시 15분, 아내가 집을 나설 때는 나도 눈을 번쩍 뜨고 따라나섰다. 아직 어둑어둑한 시간,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이 괜히 걱정돼서였다. 3년 전에도 아내는 달리기 대회 간다고 주말 새벽에 집을 나선 적이 있다. 그땐 이불속에서 배웅해주고 바로 다시 잤는데, 이번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아무 일 없을 거 알지만, 그래도 우리 동네 치안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을 쉽게 떨치지 못해서 어쩔 수 없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아내는 지하철역에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지하철역으로 종종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아내처럼 마라톤 대회 참가하는 사람들이리라. 브루클린 가는 새벽 열차는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뿜어내는 "달리기 동지들의 전우애"가 가득했다고 한다.
집에 와서 허겁지겁 잠이 들었다. 아내의 예정 출발 시각은 7:20이었다. 그런데 이날 뛰는 사람이 2만 명이 넘는다고 했으니, 대회 진행이 원활할 리 없다. 출발도 늦어질 거고 아내의 페이스를 생각하면 10시는 넘어야 결승선을 통과할 것 같았다. 9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서 씻고 10시에 결승선인 프로스펙트 공원(Prospect Park)에 도착했다.
봄날의 절정이었다. 날씨도, 꽃과 신록이 어우러진 풍광도, 달리는 사람, 응원하러 나온 사람들의 설레는 표정에도 봄이 가득했다.
누군가 내게 가장 미국다운 문화를 하나 꼽아보라면 그 후보 중에 테일게이트(Tailgate)를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테일게이트는 원래 자동차, 주로 픽업트럭이나 SUV의 트렁크 혹은 뒷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미국에선 주로 스포츠 경기 몇 시간 전부터 주차장에서 차 뒤편에 간이 의자나 피크닉 테이블을 펴놓고 앉아서 바베큐를 굽고 맥주를 마시면서 즐기는 걸 뜻한다.
미국에선 지하철을 타고 프로 스포츠 경기를 보러 갈 수 있는 뉴욕이나 보스턴, 샌프란시스코는 특이한 동네다. 하긴 뉴욕에서 미식축구(NFL)를 보려면 자이언츠나 젯츠 경기를 보러 뉴저지 멧라이프 경기장에 가야 하는데, 차가 있는 게 제일 편하다. 한국에선 야구장, 축구장, 농구장을 지을 때 반드시 대중교통을 이용해 편리하게 오갈 수 있도록 한다. 유럽에서 축구 보러 갔을 때도 대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경기장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대중교통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쓸모가 없는 곳이 워낙 많다 보니, 스타디움의 필수 조건은 넓은 주차장인 경우가 많다. 미국 전체로 보면 프로 스포츠보다 각종 대학 경기들이 훨씬 많이 열리는데, 프로 스포츠팀이 없는 동네에선 대학팀의 미식축구나 농구 경기가 열리기 전엔 어김없이 테일게이트가 열린다. 테일게이트는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친목, 사교의 장이기도 하고, MBA 때 기억을 되짚어보면 대학 동문이나 기업 인사팀에서 나오기 때문에 네트워킹을 위해 가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테일게이트에 온 미국 사람들을 보면서 참 잘 먹고 잘 즐기고 잘 논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 프로스펙트 공원에 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테일게이트 생각이 났다. 사람들이 손수 응원 문구나 재치 넘치는 말을 써온 팻말을 구경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특히 언젠가 나도 꼭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얼굴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인쇄한 다음 피켓으로 만들어 들고 응원하는 거다.
오늘은 아내가 본인을 포함한 모두의 예상을 깨고 개인 최고 기록을 세우며 너무 빨리 결승선을 통과하는 바람에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아내를 만나러 가야 해서 사진을 못 찍었는데,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몇몇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웃어라. 지금 이 힘든 레이스 뛰겠다고 당신이 돈 내고 자원한 거다!"
"왜 등록했을까 후회막심이죠? 그래도 이 글씨를 읽을 수 있다면 아직 힘이 남았다는 소리네요. 힘내서 완주하세요!"
아무래도 내 마음에 드는 문구가 뇌리에 남는 것 같다. 황금 같은 주말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2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는 행사에 20만 원 가까운 돈을 낸 2만 명 넘는 달리기 열정러들. 오늘 하루 뉴욕 곳곳에서 열린 달리기 행사가 이거 말고도 몇 개가 더 있다. 이쯤 되면 내가 너무 게으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서 고생'이란 생각을 좀처럼 못 버리고 있다. 아내가 함께 발맞춰 뛰는 커플, 친구들 보면서 잠시 외로웠다고 말할 때는 미안한 마음이 20에서 25 정도로 잠시 커진다. 그렇다고 덜컥 다음엔 같이 뛰겠다고 약속했다가 양치기 소년이 될 수는 없다.
3년 전보다 기록을 10분 넘게 단축하며 역주한 아내가 낮잠을 자는 사이, 나는 탄산수 한 캔과 책을 챙겨 아파트 안뜰로 나온다. 아름다운 꽃을 오래 볼 수 있는 게 아니니, 피었을 때 부지런히 봐 둬야 한다.
꽃망울이 질 땐 분홍빛이 불그스름하다가 꽃이 피면 하얗게 피고, 질 때는 눈이 내리는 것처럼 아름다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감동을 주는 벚꽃 나무다. 사진에는 소리를 담을 수 없지만, 나무 아래 앉아있으면 벌들이 윙윙대는 소리가 꽤 데시벨이 높다. 평소엔 벌레를 진짜 무서워하는 나인데도 이상하게 벌이 꽃을 왔다 갔다 하는 소리는 별로 무섭지 않다.
2년 전에 팬데믹으로 뉴욕이 폐쇄되고 마비됐을 때 매일 저녁 7시 의료진이 교대하는 시각에 시민들은 각자 집 베란다에 나와 박수를 치고 프라이팬을 두드리고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격려와 위로를 건넸다. 그때도 지금처럼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세상이 온통 칙칙하고 어둡게만 보였다. 비로소 두 눈에 선명하게 담기는 따스한 오후 봄볕에 몸을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