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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titudo Dec 16. 2021

다닐만큼 다녔네. 옮겨도 되겠구나. 잘 견뎠다. 장하다

4년 5개월 동안 다닌 첫 회사를 퇴사한다고 말했을 때

선배님과의 첫 만남은 2016년 8월이었다. 


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멘토-멘티가 랜덤으로 정해졌다. 멘토 한 명에 멘티 대여섯 명쯤. 멘토들이 있는 자리를 슬쩍 보는데 비슷하게 양복을 빼입은 중년 남성들 사이에 연노랑 카라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분이 계셨다. 저분이 내 멘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그분이 내 멘토로 배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멘토님은 대뜸 자기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라 하셨다. 인생을 먼저 산 선배고 사업을 먼저 시작한 선배라고. 우리들 모두 나중에 자기 사업 하나쯤은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우리 멘토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녹색당 당원이시다. 환경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하고 계시고, 아파트 반장을 하며 지역 아파트 최초로 태양광 발전기를 들여오셨다. 성인지 감수성이 높으셔서 여성들한테 하면 안 되는 질문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고, 항상 더 배우려고 노력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멋지고 저절로 존경심이 드는 어른이 내 삶에 들어오게 되어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인생에서 받아온 스트레스의 몇 배는 더 받은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인격모독을 할 거면 차라리 잘라 버리지 하는 생각도 들고, 미칠 듯이 사람을 증오하게 되는 순간들도 많았다. 멘토님은 우리들을 보러 오실 때마다 나와 내 친구들의 불평불만을 모두 다 들어주셨다. 거의 상담사처럼 무조건적 공감을 해주며, 같이 상사 욕도 해주고 위로해주셨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우리가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보다 회사생활도 훨씬 먼저 오래 해보시고 사업도 하시면서 산전수전 다 겪으셨을 텐데. 이제 갓 회사에 들어간 애가 이게 불만이다 저게 불만이다 불평을 해대는데 잔소리 한 번 안 하시고 그저 다 들어주신 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가뜩이나 배운 것도 많으신 분인데, 한 번도 가르치려 들지 않으시고 공감만 해주신 인내심이 정말 존경스럽다. 


멘토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본인은 멘토가 아니라 선배라는 말. 우리는 나중에 무조건 각자 사업을 해야 하고, 자신이 먼저 그걸 시작했으니 선배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베트남에 아파트도 사고, 오래오래 버티라는 말도 항상 하셨다. 


그래서 회사에 퇴사 통보를 하고 한국에 복귀하기로 결정했을 때 선배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됐다. 내 얘기를 다 들어주시고 계속 일관되게 해 오신 말씀이 있어서. 고민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회사에 다닌 지 얼마나 됐지? 하고 물어보셔서 4년 5개월 됐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하신 말씀. 


"다닐 만큼 다녔네. 옮겨도 되겠구나. 잘 견뎠다. 장하다." 


전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어서 1이 사라지지 않은 카톡 채팅방 목록을 보는 순간 갑자기 멍해졌다. 유독 힘든 상사를 만나 입사 초기부터 마음고생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대놓고 인격을 무시당해도 이 회사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만큼 얻어낼 때까지 고작 나를 괴롭히는 사람 1명 때문에 그만둘 수는 없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이 악물고 버텨왔다. 


항상 생각해오던 퇴사를 드디어 실천에 옮겼다는 뿌듯한 마음과 드디어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만 해왔는데 "장하다." 이 한마디를 들으니 마음이 확 가라앉으며 차분해졌다. 4년 넘게 다녀온 회사 생활에 대한 보상을 드디어 받은 것만 같았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 반대의 반응을 상상하고 있어서 조금 놀라기도 했고, 나도 몰랐지만 내가 제일 듣고 싶던 말을 들으니 갑자기 벅차 올라왔다. 


그래, 나 많이 견뎠지. 정말 장하지. 


어느 정도의 인생 경험을 쌓아야 이런 말들을 해줄 수 있을까? 지금까지 누군가를 끌어주고 싶다는 생각보단 내 앞길만 잘 신경 쓰자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나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생겼다. 여러모로 선한 영향을 끼치시는 선배님. 나도 누군가에게 선배님 같은 존재가 되기를.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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