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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Jun 15. 2020

진작에 벗어버릴 걸

올레길 이야기 │ #제주올레길걷기 #올레길3코스 #표선해수욕장



A코스와 B코스로 나뉜 제주 올레길 3코스. 코스 길이가 보다 길고 중간에 통오름과 독자봉을 거쳐야 하는 A코스에 비해 B코스는 다소 짧은 길이의 해안을 따라 계속 이어지는 바당올레다. 이렇다 할 의논이 없었지만 당연한 듯 후자를 선택한 우리는, 바다를 옆에 두고 즐기며 걸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변수는 제주의 바람이었다. 맑은 하늘에 세차게 부는 바람은 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했지만, 앞으로 가려는 걸음을 자꾸만 밀어내는 역풍은 도무지 친해지질 수가 없었다. 우리가 3코스를 걸으려는 날, 언제 만나도 낯선 그 역풍이 굳이 우리의 올레길 메이트를 자청했다. 해가 쨍하게 뜨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면 바람이 잠잠해지려나 기대해보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역풍은 종점 스탬프를 찍는 순간까지도 우리와 함께였다. 쓸데없이 의리 있게.





자꾸만 길을 막아서는 역풍을 뚫고 두 갈림길이 다시 만나는 8.6km 지점(A코스는 15km 지점)의 신풍 신천 바다목장에 도착했다. 소를 방목하여 키우는 사유지로 오른쪽으로는 약 10만 평 규모의 드넓은 초지가, 왼쪽으로는 쪽빛 제주 바다가 펼쳐져있는 신비로운 풍경. 경이로운 풍광을 사진으로 찍고 또 찍으며 한동안의 여유를 즐김과 동시에 내 마음속에는 치열한 내적 갈등이 한참이었다.


‘양말이랑 신발을 벗고 좀 앉아있을까, 그늘인데 맨발로 걸어볼까’


사실, 이 고민이 시작된 건 그곳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였다. 물질을 끝낸 해녀분들을 만났던 바다에서도,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 없던 그늘의 도로에서도. 온 힘을 다해 우리를 밀어내는 바람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바닥, 발 끝에 어찌나 힘을 줬는지. 다리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처럼 천근만근. 양말과 신발로 꽁꽁 싸매 져 있는 발이 다른 코스를 걸을 때와는 다르게 유독 답답하고 열이 가득 차오른 듯 뜨거웠다.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간혹 한 두 명의 올레꾼이나 물질하시는 해녀분들과 마주치는 것 말고는 대체로 우리밖에 없는 올레길이었지만. 선뜻 양말과 신발을 벗지 던지지 못했다. 상의도 하의도 아닌, 속옷도 아닌 그저 양말과 신발일 뿐인데. 고작 그뿐인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거리를 걸을 때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는 것이 당연하니까. 내가 하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고 있지 않은 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지켜온 것들을 벗어나는 행위 즉, 튀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말리고 있었다. 만약 그 당시, 나의 그에게 '나 발이 너무 답답하고 무거운데, 신발이랑 양말 벗고 걸어도 괜찮을까?'라고 말했더라면, 그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그럼 그럼! 뭐 어때, 그렇게 해'라고 말해주었을 터. 평소였다면 나의 생각이 어떤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그에게 다 말할 테지만, 이번만은 나 혼자만의 고민으로 묻어두었다. 그의 대답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의 말을 듣고 난 후에도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는 없었기에.  


도착지점까지 2km 정도를 남겨두고 표선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고 제주만의 오묘한 에메랄드 빛 바다가 잔잔하게 넘실대고 있는 곳. 해변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양 옆의 풀들로 둘러싸여 있는 돌길(원래의 올레길) 대신, 해변을 옆에 둔 폭신한 모래 위를 걸어 보자 했다.  오후 3시의 해변은 썰물로 인해 물로 가득 차 있던 바다의 일부가 드러나 모래는 물결의 모양대로 물길의 촉촉함을 머금은 채 남아있었다. 종점 스탬프의 위치를 확인하려 꺼내 든 휴대폰. 지도는 밀물 때를 기준으로 표시가 되는 모양이다. 우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파란 점이 모래사장이 아닌 바다를 가로질러 물 위를 걷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와. 신기하다며 한참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신기하면서도 왠지 신이 났다. 바다 한 중간을 걷고 있다니.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타이밍, 바로 지금이다.





아직 한참 남은 해변의 끝을 마주한 뒤, 그 자리에서 내 발을 옥죄고 있던 양말과 신발을 드디어 벗어버렸다. 세 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고 쓰임을 다 하느라 퉁퉁 붓고 빨갛게 열이 올라온 발을 폭신하고 시원한 모래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하, 이거지. 뜨겁게 달아오른 냄비를 차가운 물에 담근 것처럼 순식간에 열기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두 발에 장신구들을 벗어던진 것뿐인데. 3시간 동안 역풍과 맞서며 쌓여있던 온몸의 피로가 눈 녹듯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배시시 웃음이 났다. 몇 톤의 모래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듯 무거운 다리가 강력한 파스를 붙여놓은 곳처럼 시원해지고 한결 가벼워졌다. 발끝부터 다리를 타고 느껴지는 싸-한 기분. 헛웃음이 났다.


이깟 신발과 양말이 다 뭐라고 꾸역꾸역 모래와 흙을 잔뜩 묻혀가며, 내 발을 혹사시켜가며, 물에 젖어가면서까지 부여잡고 있었는지. 행여 다른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마음속 소심한 걱정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발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훌렁 벗어버릴 때나 맨발인 채로 한참을 걷는 순간에도 나를 신경 쓰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무엇이 겁이 나고 두려워 다른 사람의 눈치를 그리도 보았을까. 발에 닿는 물의 시원한 찰랑거림, 모래의 따뜻한 보드라움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마다 나지막이 되뇌었다. 진작에 벗어버릴 . 진작에 벗어버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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