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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Jun 10. 2020

무해하지만 무시무시한 존재

미스 제주댁 이야기 | #제주살이 #왕거미 #바퀴벌레



한 달의 제주살이에 큰 만족감을 얻고 시작한 두 번째 한 달 살이.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동화 같기만 했던 나의 섬 생활에 제주에서의 현실적인 삶을 마주해야 했다. 유해한 듯 무해한 것이 대부분이고 작지만 무시무시한 존재, 벌레. 이들이 아름다운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고만 싶은 나를 굳이, 골치 아픈 현실로 끌어냈다.

육지에서부터 꽤 안면이 있던 날파리는 기본이요. 이따금 안부 묻던 파리도, 두 번째 숙소(바로 옆에 감귤밭을 둔 주택의 일층)에 오면서부터 이렇게 자주 봐도 되나 싶을 만큼 흔하게 그것도 떼를 지은 무리로 마주치고 있다. 진짜 문제는 그림, 영상으로만 보던 큼지막한 아이들이다. 두 달 살이를 시작한 지 5일 차가 되는 오늘까지 본 것이 둘. 바퀴벌레와 왕거미다. 덩치에 비해 겁이 상당한 나인데, 생눈으로는 선명하게 보지 못하는 시력인 덕분에 두 번의 고난을 비교적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짧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고 한동안 심장이 벌렁거려 잠을 못 이루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양반인 셈이다. 안경이나 렌즈 둘 중 하나라도 끼고 있던 때에 마주쳤다면, 더 심하게 까무러쳤을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바퀴벌레를 만난 순간은 떠올리기만 해도 팔에 소름이 쫙 돋는다. 두 번째 숙소에 이사온지 이틀째 날, 생활하는데 필요한 몇몇 물건들을 사고 집에 들어왔다. 그는 오자마자 회사 일 때문에 전화로 업무를 보고 있었고 꽤나 진지한 내용인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려 최소한의 소리만으로 새로 사 온 주방 용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부터 식탁 위에 놓여있던 커피메이커와 커피포트. 새하얀 식탁에 얼룩이 질까 신경 쓰여 사온 식탁보를 깔기 위해 커피메이커의 위치를 옮기려 살짝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커피 찌꺼기 같은 짙은 색의 물이 손에 묻어나기에 잠시 중단. '너무 높게 들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선 원래 자리에 다시 내려두고 손에 묻은 진한 커피 자국은 흐르는 물에 씻어내었다.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아까보다 조금 낮게 기기를 들어 오른쪽으로 옮기려는 그때, 커피메이커 밑단에서 검은 생물체가 툭 튀어나왔다. 조금 오버를 더하자면, 기절할 뻔했다. 집에서 바퀴벌레를 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그의 사무 전화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번뜩 스쳐 입만 쫙 벌린 채 음소거 비명을 지르고는 그에게 달려가 아무 말 없이 안겼다. 다행스럽게도 검은 생물체는 움직임이 없었고 더 다행인 것은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기에 자세한 형태는 보지 못했다는 것. 너무 놀라 멍해진 나를 대신해 바퀴벌레의 사체를 치우러 갔던 그가 말하길, 뒤집혀 죽어있었다고 했다. 아마 꽤 오래 저기 있었던 것 같다고. 이 곳에 오고부터 커피 메이커에 손을 댄 적이 없으니 우리가 오기 전, 커피 메이커를 처음 가져다 놓았을 때부터 그곳에 있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가만있어봐. 그럼 아까 내 손에 묻은 그 진한 커피 자국은, 커피가 아니었던 거야?"



왕거미 역시 생각지도 못한 순간, 우리에게로 왔다. 여느 날처럼 자정을 넘기기 전에 잠이 들었다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깐 깼던 평온 하디 평온한 새벽녘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실눈으로 더듬더듬. 밤눈이 어두워 한참을 걸려 찾아간 화장실의 불을 켰을 때, 나는 짧고 굵은 비명을 꽥!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작지 않은 크기의 어떤 것이 갑자기 밝아진 조명에 놀랐는지 아주 날쌘 몸짓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퀴벌레와 인사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때라, 그 친구의 가족이나 친지 혹은 친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또 한 번 심장이 방광까지 내려갔다 온 듯 철렁했다. 이번에도 다행인 것은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기에 자세한 형태는 보지 못했다는 것. 내 소리에 깜짝 놀라 깬 그가 헐레벌떡 일어나 나에게 왔고 울기 직전의 모습으로 그에게 화장실에 무언가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새벽의 침입자는 바로, 거미. 그것도 크기가 꽤 큰 왕거미였다. 웬만해선 벌레를 보고 놀라거나 잡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그도 이 정도 크기의 거미는 처음이라며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으니. 날파리에도 깜짝 놀라는 내게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한동안 제법 날쌘 불청객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 놔두었던 방울토마토 플라스틱 상자 안에 가두기를 성공했다. 거미는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터라 꼭두새벽 집 밖으로 나가 방생해준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어디서 왔을까?라는 의문과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찝찝함에 우리는 한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 이렇게 큼지막한 것이 들어올만한 빈틈은 집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더욱이 우리는(정확히는 내가) 출입문을 들어오고 나갈 때나 창문을 잠시 열어둘 때도, 작은 벌레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었다. 오랜 회의 끝에 짐작해 보건대, 사건이 있던 날 낮에 우리가 올레길을 걷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점검을 위해 사장님과 기사님이 왔다 가셨을 바로 그때, 몰래 들어와 욕실에 숨어들었으리라. 고놈, 아주 치밀한 놈일세.






자연을 벗 삼는 제주 생활에 벌레들과의 조우는 꽤나 흔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내 이야기가 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제주에 있다면 골치 아픈 문제 따위하나 없이 무조건 행복만 할 것이라는 환상 속에 있던 나. 두 달 살이를 시작하고부터 하나씩 섬 생활의 현실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다행히 아직까지는 이곳에서의 삶이 행복하기만 한데. 이게 끝이 아닌, 시작이면 어떡해야 하지? 그들에 비해 내 덩치가 훨씬 큰 것도 알고 그들이 나를 더 무서워할 거라는 것도 머릿속으로는 잘 알지만, 무서운 걸 어떻게 해.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온다. 아이고 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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