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이리 Jun 12. 2020

순간을 짙게 남기는 기억법

미스 제주댁 이야기 | #제주살이 #사진 #스냅촬영



혹시 커플 스냅 찍을 생각 있니?”



우리가 제주 한 달 살기를 하러 내려오고 며칠 차이로 와이프와 함께 두 달 살기를 하러 섬으로 온 친구의 연락. 사진을 업으로 하는 친구네 부부는 우리의 제주 이야기를 그들의 색깔로 담아주겠다며 고맙게도 먼저 촬영 제안을 해주었다. 각자의 치열한 현실을 살아내느라 육지에서도 몇 달에 한 번, 길게는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었던 우리가 제주에서 만나다니. 주로 만나던 시끌벅적한 여의도가 아닌, 우리의 대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한적한 섬에서의 만남은 곱절로 반갑고 새로웠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7년 전 여행 매거진 서포터즈에 뽑혀 마카오로 떠나는 공항에서였다. 그때도 나는 글을 쓰고 있었고 친구는 사진을 찍었다.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둘 다 경상도 출신에 동갑인 데다 이야기가 잘 통해, 사회 친구라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친해졌다. 친구의 퀄리티 높은 사진들을 7년 동안 수없이 봐왔던 나. 그 사진 속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답을 보냈다. "우린 너무 좋지!"


급작스럽게 잡힌 촬영이었다. 처음엔 마냥 좋기만 했는데 약속한 날짜가 점점 코앞으로 다가오자 ‘사진이 이쁘게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을 넘어 혹여 친구에게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태산처럼 쌓여갔다. 촬영 날 아침, 처음으로 넷이 함께 모인 자리였다. 어색한 분위기에 굽신굽신 서로 잘 부탁한다는 배꼽인사만 몇 번이나 주고받았는지. 낯선 공기 속에서 각자의 걱정들을 조금씩 안고 시작된 촬영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순조롭게 흘러가 그동안의 걱정을 빠르게 떨쳐낼 수 있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찍어주는 사진이라 마음이 편해서일까. 어색하게 삐쭉대더라도 순간순간 우리의 이쁜 모습을 잘 포착해주리라는 내 친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어서 일까. 늘 카메라 앞에 서면 굳어버리는 나를 많이 봐왔던 그가 ‘오늘은 긴장하지 않은 것 같아’라고 내게 말해줄 만큼 신기하리만치 참 많이도 웃어 보였다. 사진작가 선생님들(친구네 부부)의 끊임없는 칭찬과 순간의 모습을 카메라에 잘 담아내어준 친구의 실력, 무엇보다 내 친구와 함께하는 촬영이기에 두 배로 긴장되었을 텐데도 사진작가가 모델로 탐을 낼 만큼 편안하게 임하며 동시에 나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도록 이끌어 준 나의 그. 먹구름이 낄 것이라는 걱정스러운 일기 예보와는 다르게 선선한 바람과 이따금씩 내리쬐는 따뜻한 햇볕으로 사진 찍기 딱 좋았던 날씨까지도. 모든 것이 딱 맞게 만들어진 조각들처럼 조화로웠다.


촬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감사함의 표시로 대접한 달달한 디저트에 든든한 수다까지 야무지게 챙기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 보정 작업을 할 사진을 선택하기 위해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득 찬 판도라의 폴더를 열어야만 했다. ‘왜 촬영 전날 나는 그리도 먹어댔던 걸까. 촬영 날을 잡아두고 일주일이라는 기간 동안 부기라도 뺐어야 했는데’라며 갖가지 늦은 후회들을 늘어놓다가, 옷으로 가려도 숨길 수 없는 살들과 어색함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멋쩍은 내 표정들에 한숨을 푹푹 쉬기도 했다.


이런저런 아쉬움의 말들과 한탄 섞인 한숨이 한참 동안 이어졌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그럼에도 역시나, 찍길 잘했어’라며 끄덕끄덕. 언제나 남는 것은 사진뿐이고 사진만큼 확실하게 추억을 기억하는 방법은 없음을 900장에 가까운 사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또 한 번 깨달았다.


한 때는 사진으로 남기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더 남는 것이라는 말에 꽂혀 사진을 멀리한 적도 있었지. 그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안타깝게도 나의 기억력이 내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았기에. 더욱이 좋은 순간들 뿐만 아니라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시간들까지, 기억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새로운 기억을 위해 추억은 자연스레 내 머릿속의 자리를 조금씩 내어주었고 임팩트 있는 짧은 순간들을 제외한 소소한 기억들은 지워져 버린 것처럼 깊숙한 곳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스쳐 지나가듯 찍혀있는 사진과 짤막한 영상 하나만 있다면 ‘맞아! 이랬었지’하며 뒷전으로 물러나 있던 추억들은 다시 어깨에 힘을 빡! 주고 당당히 기억의 1열로 나서는 마법이 펼쳐진다. 사진은 더 많은 추억을 더 오랜 시간 기억할 수 있게 하고, 행복했던 시간이 그리울 때면 언제든 다시금 그 순간으로 여행할 수 있게 해주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이었다.


오늘의 내가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그 조차 또 하나의 웃픈 추억이 되어 있었고, 모니터 속 우리의 모습은 나도 모르게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지어 보이게 했다. 우리가 서로를 이렇게 바라보는구나. 이렇게나 행복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라니. 제주에서 우리는 정말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해 보이네. 2시간 만에 찍은 사진이었음에도 신기하게 그 사진 속에는 우리의 지난 한 달이, 우리가 제주에서 보낸 평안했던 시간들이,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고 따뜻했던 제주에서의 지난 한 달, 섬에서 보낸 소중한 보통의 날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해하지만 무시무시한 존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