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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Mar 26. 2016

우리 서로 밀지 말자, 안심하기.

지하철 9호선에 대한 단상


지하철 9호선을 기분 좋게 내려본 적은 없었다. 만원 지하철의 승객들은 언제나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밀치고, 누군가 타거나 내리려고 하면 방어적인 태세로 쉽게 비켜주지 않는다.

특히 퇴근시간의 9호선은 어찌나 불쾌한지! 퇴근 후에 그의 회사로 가는 날이면 만나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려 애꿎은 그에게 짜증을 내기 십상이었다. 가끔 새 신발을 신거나 허니밀크를 테이크아웃 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나의 예민함은 배가 되곤 했다. 신발을 밟힐까봐, 음료를 쏟을까봐.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는 퇴근시간의 9호선 급행열차를 타고도 상쾌한 기분으로 내렸다.


이번 역은 고속터미널 역입니다.
내리시는 승객이 많습니다.
출입문을 오래 열어둘테니
옆 사람을 밀지 마시고
여유 있게 하차해주시기 바랍니다.



기관사 아저씨의 안내 방송. 가장 복잡한 역에서 친절한 말투로 딱 한 번 방송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승객들은 너무나 차분하게 서로 밀치지 않고 내렸다. 내리는 사람들이 신경질적으로 내리지 않으니, 타는 사람들도 조급하게 타지 않았다.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내리는 사람들을 살폈다. 이번에는 안내 방송 없이도 모두들 차분하게 타고 내렸다. 한 사람이 먼저 짜증을 내지 않으니 짜증은 전염되지 않았다. 평화로웠다.


아저씨는 출입문을 오래 열어두겠다고 방송했지만, 사실 그렇게 오래 열어두진 않았다. 다같이 질서정연하게 내리니 오히려 빨리 내리고 탔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말 잘 듣는 사람들이었어? 나는 이제까지 9호선 승객들이 못된 줄 알았었다.


아니- 피곤하고 힘든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밀어댈 건 뭐래.
세상을 향한 분노를 나한테 푸는건가?
이건 미는 게 아니라 때리는 수준이잖아.


그런데 안내 방송 한마디에 이렇게나 온순해지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쩌면 사람들은 그 안내 방송 한 마디에 '안심'한 게 아닐까. 내 옆 사람이 나를 밀치지 않을 것이라는 안심.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이제까지 서로를 밀었던 건, '네가 언제 나를 밀지 모르니까 몸에 힘 빡 주고 정신 차려야지. 밀리기 전에 내가 먼저 밀거야.'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까. '너 나한테 가까이 오지마. 나 밀거잖아. 절대 안 비켜줄거야.' 불안해서, 차라리 못되게 행동하기로 한걸까.


그래서 날 선 승객들에게 필요한 건 안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밀지 않을거야, 짜증내지 않을거야, 사이 좋게 내릴거야.



승객이 많은 시간대에, 승객이 많은 지하철에서는 가끔 이렇게 안심 방송을 해주면 참 좋겠다.



2016.03.24.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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