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현지하쇼핑센터
세상이 나만 빼고 바삐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만히 멈춰 선 상태로 움직이는 것들을 바라보다 문득 외로운 생각이 들면, 회현지하쇼핑센터로 향한다. 머무는 존재의 고독을 이해해줄 것만 같은 멋진 지하세계로.
요즘 어떻게 지내니?
라는 질문을 들으면, 언제나 “고만고만해”라고 답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고정 멘트이다. 앞뒤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아서 대강 뭉뚱그리는 바도 없진 않지만, 그보다는 정말 별 게 없어서 별 게 없다 말하게 된다.
나는 관성이 강한 인간이다. 일도 일상도 그다지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 20년 가까이 같은 동네에 살며,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사람들과 그 시간 동안 오른 적 없는 원고비를 받으며 알음알음 먹고 산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보다 새로운 드라마 보기를 즐기고, 낯선 곳으로의 모험보다 익숙한 곳에서의 휴식을 자주 선택한다. 결혼이나 출산 같은 생의 전환점도 없었고, 종교적 깨달음이나 인간적 환골탈태, 개과천선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이따금 '맨날 이 모양 이 꼴이어도 되는가'에 대한 불안감이 훅하고 차오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마음속 깊숙이에는 어제와 같은 오늘에 만족하는 내가 있다. 극적인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모든 게 그대로였으면 하는 마음. “사실 큰일이 하나 있었어”라는 말을 꺼내며 주목받고 싶으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에 안도하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은 솔직한 심정이 있다.
바깥 세계야 어떻게 흘러가든
나만의 루틴을 유지할게, 회현지하쇼핑센터는 그렇게 말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1978년, 명동과 남대문 시장을 잇는 길목에 만들어진 이 상가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레코드를 팔기 시작하며 상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오래된 LP를 파는 점포들이 쇼핑센터의 주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기념주화나 우표를 사고파는 점포들인데, 이는 서울 중앙우체국과 한국은행 사이라는 위치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오래된 LP, 화폐, 우표에 더해 중고 카메라, 빈티지 가구와 소품 등을 파는 점포도 곳곳에 보인다. 그 안에 자리 잡은 색색깔의 뜨개 공방은 생뚱맞은 듯하면서도 은근히 결이 맞는다.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한층 고조시킨다.
시간이 살짝 비껴간 듯한 상가 복도로 인근 빌딩의 직장인들이 바쁘게 오고 간다. 작고 네모난 간판을 걸고, 가만히 선 점포들 사이로 사람들이 흐른다. 변화에 가장 민감한 도심의 한가운데, 변하지 않는 물건들을 사고파는 지하 세계가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마치 방공호처럼 바깥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는 듯이, 자신만의 생존을 이어가는 느낌이 든다.
여전하기만 한 것도 쉽지만은 않았어
회현지하쇼핑센터 안의 정지되어 있는 시간은 방치나 퇴보가 아니다. 커버의 빛은 바랬어도 단단한 소리를 내는 LP판에서, 반질반질하게 닦인 90년대의 동전에서, 가판대 위 색깔 별로 곱게 나누어져 있는 털실 뭉치에서 애정 어린 손길이 느껴진다. 사랑받은 태가 난다.
머문다는 것이 나아가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동작과 정지는 반대말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정지에는 그 나름의 운동 에너지가 가득 차 있다. 관심받지 못하면 사라지고 마는 것들의 상태를 유지하려면, 수백, 수천 번의 애정 어린 손길이 필요하다.
골동품 가게의 유리 너머로 반듯한 수트 차림을 하고 점포를 지키는 노신사가 보인다. 단정한 차림으로 꼿꼿이 앉은 모습이 제법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꾸준한 힘으로 단단히 잡고 놓지 않는 힘. 오랜 시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켜 온 자리의 고집스러움을 드러낸다.
그래 봤자 그 자리가 아니라, 그토록 애써서 갈고닦은 그 자리를 확인하러 회현지하쇼핑센터에 간다. 허투루 살아남지 않은 존재의 반짝임을 보기 위해, 여전한 것의 단단함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들고 간다.
* 이 글은 빅이슈 253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