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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May 24. 2023

[도쿄텐텐 2] 여전히 아름다운 코엔지

오전과 오후 사이, 느지막이 눈을 떠서 이번 여행에 함께 할 친구를 마중 나간다. 

숙소가 위치한 칸다역에서 한 정거장 거리의 도쿄역까지,  살랑살랑 걸어간다. 도쿄 여행을 위해 한 곡씩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플레이 리스트. 이곳의 언어로 노래하는 곡들이 흘러나오자, 비로소 아, 지금 도쿄에 있구나 싶은 기분이 든다.   

낯선 곳에서만 피어나는 이방인의 용기, 익숙한 얼굴을 만나러 가는 설렘, 혼자라는 가벼움,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뒤섞인다. 

일본 여행의 첫 곡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진대로, 스피츠의 <로빈슨>. 그간 이 곡과 함께 걸었던 수많은 골목들이 뒤얽히며 너무 오래 잊고 있었던 산책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도쿄역과의 첫 대면 

20대 후반의 유학시절, 나보다 10살쯤 어렸던 일본 친구들. 그중에서도 유독 가까웠던 치나츠. 

도쿄역을 바삐 오가는 직장인 중 치나츠와 비슷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지금쯤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진 않을까, 꽤나 세련된 옷차림을 한, 그 옷에 어울리는 노련함과 당당함이 몸에 밴 멋진 어른이 되어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만약 우리가 도쿄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를 알아본다면,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안, 나는 그런 어른이 되진 못했어, 미안할 일은 아니지만..."

전할 일이 없을 답을 만들어 보는 산책의 순간.

우리는 그 시절로부터 아득히 멀어졌는데,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멀뚱히 남아 지나가는 치나츠를, 어른이 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만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코엔지의 나나츠모리 

첫 목적지는 이 도시에서 가장 사랑하는 동네, 코엔지로 향한다. 

유학생으로 도쿄를 찾았을 때, 처음으로 살았던 동네.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던 곳이었는데 어쩐지 낯이 익은 편안함이 있었다. 시작부터 정이 갔던 곳.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던 나의 동네.

인적이 드문 평일의 상점가를 천천히 걷다가,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카페 겸 식당 나나츠모리로 향한다. 

삐걱대는 나무 바닥, 검정 테이블로 몇 번이나 덧대어진 테이블, 닳고 닳은 낡은 가죽 소파.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곳을 지키고 있던 작은 가게가 내어 주는 따뜻한 차와 케이크. 

여전한 것이 문득 고맙다

나나츠모리, 검정 테이프로 덧대어진 나무 테이블 위에 정성스러운 차과 케이크  


코엔지 주택가에 아름답게 피어있던 꽃 

코엔지 상가는 언제나 즐거웠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예전만큼의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친구에게 코엔지를 어필해야 한다는 부담감 탓일까? 즐겁지만 신나지는 않는달까? 

하지만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상가 바로 옆의 주택가로 들어선 순간, 집집마다 아름답게 핀 꽃을 보며 조금씩 흥이 나는 내가 있다. 친구도 마찬가지, 우리는 상가를 걷는 내내 주머니에만 넣어 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내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코엔지는 꽃 동네였구나."

친구가 말한다. 이 동네에서 꽃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 보니 꽃으로 가득한 골목. 상가 구경에 빠져 있던 10년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코엔지의 일면. 같은 공간에서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부분을 사랑하게 된다. 

꽃을 찍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늙었음의 신호로 우스개 삼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꽃을 사랑하게 된 것도, 나이가 든 것도, 우스갯거리 삼아 자조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우스워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변했다. 그런 나를 살펴볼 기회를 낯선 동네에서 가져본다. 

내가 나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동안, 나는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그랬었지라는 게으른 마음으로 알아채지 못했던 나를 알아간다. 

나의 음료는 마이 페이보릿 띵스, 친구의 음료는 카인드 오브 블루. 


신주쿠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골 재즈킷사였다는 더그(DUG)로 향했다. 

재즈를 들으며 차나 주류를 마시는 공간. a.k.a. 재즈의 성지라는 곳. 

무라카미 하루키도 재즈도 잘 알지 못하지만, 낯선 도시에서 모르는 곳을 가보고 싶다는 호기가 발동해 어쩐지 폐쇄적으로 느껴지는 지하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 본다.     

환기가 잘 되지 않는 공간에 줄담배 피우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에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대학시절, 00년대 술집이 생각나기도 하는 매캐함. 오늘 한정으로 이 조차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친구는 한쪽에 놓인 잡지를 펼치고, 나는 끄적거릴 노트 한 권을 꺼내 낙서를 하며 음악을 듣는다. 

재즈는 몰라도 좋다는 건 느껴지는 노래. 

우리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이름 모를 가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같은 음악을 집중해서 듣는 경험이 만드는 은근한 연대감.

영화 <아비정전>에서 아비와 수리진의 4월 16일 3시처럼... 우리는 4월 19일의 오후를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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