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인간의 노력과 역사가 겹쳐 쓰인, 지워지지 않는 팔림프세스트이다."
→ 깊고 차가운 해저를 가로지르는 빛줄기가 사방을 비춘다. 말을 잃어버린 시인은 거대한 홀의 중앙에 섰다. 그곳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도서관, 수 세기에 걸쳐 누적된 텍스트의 왕국이다. 이곳의 책들은 젖지 않는 재질로 이루어져 있어, 텍스트의 본질이 아닌 표현 수단과 적응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시인은 한 손에 책을 들고 페이지의 표면을 응시한다. 그 행위는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선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역사의 복잡한 현상에 대한 탐구이며, 글쓰기가 비디오 게임이나 동인지와 같은 다양한 형식으로 재구성되어 온 유희적이고 혼종적인 과정 그 자체다. 시인은 침묵 속에서, 이 텍스트들이 폐쇄된 완성품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process)임을 재확인한다.
"모든 이야기가 어디서든 오지 않듯이, 새로운 이야기는 오래된 것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역사는 깨어나려 애쓰는 악몽이다."
→ 시인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고독과 절망의 감정을 겪는다. 애니메이션이 종종 비극과 서사시의 영역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이 텍스트들 역시 어두운 질감을 드러낸다. 이는 삶의 격변을 솔직하게 반영하는 일본 미학의 본질적인 측면과 연결된다. 갑자기 책의 내용이 히로시마의 원폭 생존자의 고난이나 역사적 현실을 다룬 작품들처럼, 잔혹하고 현실적인 고통의 순간들을 시각화한다. 말을 잃은 시인의 눈가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힌다. 눈물은 바닷물 속에서 확산되지 않고, 시인의 얼굴을 따라 중력의 경계를 지키며 흘러내린다. 이는 정서적 고립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공간 배치, 즉 정서적 불안을 강화하는 경사진 평면이나 건축적 칸막이와 유사하다. 시인은 언어 능력을 상실한 채, 표면 너머의 의미를 표현할 힘을 잃은 otaku의 '동물화'된 상태처럼 느껴진다.
"오직 연속성 속에서만 창조는 가능하다. 독창성으로부터 배제된 인간에게, 이 차이(difference)는 곧 적응(adaptation)의 다른 이름이다."
→ 시인은 절망에 굴복하는 대신, 다시 적응의 가능성을 찾는다. 시인의 침묵은 단순히 언어의 부재가 아니라, 문자(litera)의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는 다른 텍스트를 구성하는 급진적인 방식이다. 마치 애니메이션이 원작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시인에게 있어 이 '젖지 않는 책'은 소멸을 피하기 위해 다른 형태로 변이해야 하는 생존주의적 정신을 상징한다. 시인은 책을 덮고, 자신의 침묵이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잠재력의 행렬(matrix of potentialities)임을 깨닫는다. 시인의 얼굴에 고독이 걷히고, 역사와 픽션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서사적 유연성이 드러난다. 바닥에 비친 시인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움직이며, 새로운 표현 매체에 대한 암시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