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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May 23. 2022

선량한 차별주의자


+ 계속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 책이었는데 다른 책들에 우선순위가 밀려 있다가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관해 남편과 얘기하며 빨리 읽어보고 싶은 책이 되었다. 차별주의자는 스스로를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일반 시민인데~' '나도 애엄만데~' '나도 평등 좋아하는데~' 하는 일반인이 바로 차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남편만 해도 평등한 관계에 관심도 많고 노력하는, 많은 사회현상에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지만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너무 ^극단적^ 이고 지금은 시기상조라고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회사에 근무하는 장애인 직원들이 있는데 장애인 콜택시 부르면 얼마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고 하면서. 글쎄, 말하면서 지쳐버려 끝까지 토론하진 않았지만 우리회사 정도의 대기업에 근무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신체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그렇게까지 고립되지 않은 상태의 장애인들일 것이다. 1회성의 외출이면 모르겠지만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출근/등교 등에 매번 택시를 부른다? 전용 기사도 아니고 그 배정과 도착을 기다리는 것이 전철과 버스를 이용하는 것보다 편할 거라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기다린다? 나도 알아보았지만 이명박 때부터 약속했던 것들을 국가는 이행하지 않았다. 몇 년 째 월급의 50%만 주고 다음달엔 5배 줄테니 좀 더 기다려달라면 우리는 속 편히 가만히 기다릴 수 있을까?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누가 쳐다라도 봐주나? 결국 이런 토론의 장에 올라오게 된 것도 그 ^극단적^인 퍼포먼스가 있었기 때문 아니냐는 거다. 모든 투쟁은 극단적일 수 밖에 없다.

+ 나는 현재 사회에서 기득권까지는 아니라도.. 평균 이상에 속하긴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소위 기득권에 속하게 될 확률이 높을까, 나락으로 떨어질 확률이 높을까(어떤 삶에 대해 나락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옳지는 않겠지만 그냥 상대적인 관념으로 생각해 본다.) 나는 명확히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후자의 편에 서고 싶다. 근데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우리나라는 부자 '연습생'의 나라라는 비유가 찰떡이구나 싶다. 차라리 장애인 연습생, 독거노인 연습생, 싱글맘 연습생 쪽이 더 확률 높을 텐데..

+ 책에서도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한 집단에만 속해있지 않다. 나는 차별받는 여성, 아기 엄마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특권을 누리는 한국인, 서울 출신, 비장애인, 대기업 직원 집단에 속해 있고 학창시절엔 공부 잘 하는 학생(=우수반)이기도 했다. 책에 우열반으로 나눠 교육하는 학교 이야기가 나와 뜨끔했다. 나도 특권을 누렸으면서 그 당시 특권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집단 속에 있을 때 내가 특권을 누리는 쪽이라면 인식하기 어렵다. 같은 사람이라도 여러 집단에서 가지는 권리와 권력은 상대적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관찰하고 의심해야 하는 것 같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지, 나도 모르게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차별하지 말자는 글에 밑줄 쳐 가며 읽은 이전의 독자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차별은 하면 안되지만 도서관 책에 제 멋대로 줄은 그어도 된다?... 



- 평등을 총량이 정해진 권리에 대한 경쟁이라고 여긴다면 누군가의 평등이 나의 불평등이라고 여기게 된다. 사실은 상대가 평등해지면 곧 나도 평등해지는 것이 더 논리적인 추론인데 말이다. 

=>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 아무도 평등하지 않다. 


- 부정적 고정관념을 자극하면, 부정적 고정관념을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고, 부담 때문에 수행능력이 낮아져서, 결국 고정관념대로 부정적인 결과과 나온다. 이런 압박 상황을 고정관념 압박이라고 한다. 반면 부정적 고정관념이 없는 상태에서는 자기의심과 불안이 적기 때문에 지적 능력에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 이러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남도 아닌 나 스스로 나에게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성이 다수인 직종의 임금수준이 전반적으로 낮다. (중략) 같은 직종에서도 남성에 비해 여성의 임금이 대체로 낮은데,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직종에 취업하면서 여성의 임금이 더욱 낮아지고 있다. (중략) 그러니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전공과 진로의 '선택'이 과연 사회적 차별과 무관할 수 있을까? 여성으로서 어떤 전공이 취업에 유리할지,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게 되어도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직업이 좋을지 등의 선택은 이미 노동시장과 사회 전반의 차별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중략) 여성이 많은 직업은 여성이 많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동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일을 하면서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상황은 직관적으로도 부당한 차별로 여겨진다. 하지만 여성이 애초에 임금이 낮은 직종에 진출하는 상황은 다르다. 

=> '여자가' 일하기 좋은 직장이라는 게 애초에 교육 기회가 많다던지, 연봉 체계가 합리적이라던지 하는 회사가 아닌 육아휴직과 정시퇴근이 보장되는 회사라는 것. 정말 웃기다고 생각해왔다. 이건 여자가 다니기 좋은 회사가 아니라 그냥 정상적인 회사잖아 ;; 하지만 나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고, 참 답답할 노릇이다. 통계로 팩트를 때려박는 이런 상황에서도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다니 속 편해서 좋겠다. 


- 구조적 차별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중략)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간다.


-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비하성 언어와 각종 표현들은 일상이라서 더욱 풀기가 어렵다. 늘상 반복되어온 탓에 익숙해진 데다가 워낙 비일비재하여 일일이 대응하기도 어렵다. 특히 유머로 던진 말에 정색을 하고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유머와 놀이를 가장한 비하성 표현들은 그렇게 '가볍게 만드는 성질' 때문에 역설적으로 '쉽게 도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중략)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 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 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중략)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주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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