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사춘기일까
눈코입이 살에 파묻혀있는 스타일의 재희는 내 아들이라 그런거겠지만 정말 귀여운 얼굴이다. 나의 큰아들, 재희. 이제 4학년이 되었는데 다섯 살 동생보다 귀여운 인상을 하고 있다. 지난겨울 동안 살이 많이 붙었다. 열 살이 넘으면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는걸 완벽하게 자립해서 잘 몰랐는데, 요즘 유심히 들여다보니 몸이 많이 불어있다. 하얀 속살이 겹겹이 둘러진 몸통이 정말 한 마리 곰돌이를 방불케 한다.
어떻게 아이를 키울 것인지, 대단히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이미 절반 이상은 자라 버렸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로서 지원을 해준다고 가정해보면 이미 절반의 양육이 마무리된 것이다. 태어나서 열 살까지, 양육 전반전은 주로 먹이고 씻기고 움직이는 일에 초점을 맞추며 신체적 자립이 가능해지는 것을 돕다 보니 내 몸이 힘들지언정 어느 정도는 내 마음대로 아이를 키웠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앞으로 시작되는 10대, 양육의 후반전은 아마도 머리가 복잡한 일이 많겠지.
얼마 전 같은 반 친구로부터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친구가 재희에게 다가와서 "재희야 못생긴 사람을 보면 눈이 먼데. 그거 알아? 못생긴 얼굴 보면 눈이 먼다니까. 아 나 눈이 멀었어~" 재희가 대꾸할 틈도 없이 벌어진 짓궂은 말장난이었고, 기분이 나빠서 선생님한테 일렀다는 말을 하면서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다. 순하고 느릿한 재희는 그 장난을 받아칠 만큼의 순발력이 없었고, 선생님에게 이른 것만으로는 사실 기분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우리 재희가 얼마나 잘생겼는데, 그리고 그 말이 맞다면 ㅇㅇ이가 눈이 안 멀었으니까 너 안 못생긴 거 맞잖아? 그럴 때는 화내지 말고 무시하면 돼"
재희가 요즘 살이 쪄서 그런 놀림을 당한 건가, 아니면 입고 다니는 옷이 별로였나, 벌써 서로의 외모를 평가하는 나이가 된 건가. 자고로 인간이라 함은 내면이 중요한 것인데, 사유와 성찰로 완성되는 어떤 그런 궁극의 인간이 되기 전에 일단 본능적으로 서로의 외모를 평가하며 비교하는 시기를 거쳐가는 것은 사실상 피해 갈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사춘기가 임박.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몇 장면이 있었다. 지난 겨울밤에 재희가 샤워를 하고 나와서 내 방으로 들어와 팬티바람으로 화장대를 기웃대던 모습. 어색한 듯 에어 랩을 들고서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스스로도 겸연쩍어하며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길래 그냥 귀엽다고만 생각하고 넘겼다. 어떤 날에는 내가 바르는 크림을 자기도 조금 발라보면 안 되냐고 묻기도 했다. 그거 비싼 거라서 안된다고 하고 돌려보낼 때 재희의 표정이 매우 아쉬워 보였는데 아들이라고 너무 둔탁한 마음으로 털털하게 생각한 것이 실수였나. 하.
새 학기 시작을 앞두고 지난 주말에 새 공책들과 학용품 몇 가지만 준비했는데 그럴 때가 아닌 것 같다. 옷장에는 온통 트레이닝복 스타일의 상하세트 옷뿐이다. 살이 붙어 몸이 커진 재희가 활동하기 편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넉넉한 사이즈의 품이 큰 옷 위주로만 사 입혔는데 그나마도 이제 작아진 것들. 머리도 더벅더벅 자라나서 깔끔한 인상이 아니다.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데, 새롭게 만나는 반에서는 깔끔하고 스마트한 인상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쇼핑몰로 출발했다.
재희는 평소 아파트 단지 상가의 핑크 펌이라는 작은 미용실을 이용한다. 단돈 만원이면 10분 안에 완성되는 초간단 투 블록 헤어스타일이 장점이라 애용하는데 당장 삼일절 휴무이기도 했고, 오늘은 큰맘 먹고 대형 프랜차이즈 미용실에 가서 삼만 원짜리 커트를 하기로 했다. 5시 30분 커트를 예약해두고서 남은 시간에는 zara 매장에 갔다. 옷을 사러 가서 이것저것 입어보라고 하면 귀찮아하고, 투덜거리기 일쑤라서 최근에는 오프라인에 함께 쇼핑을 간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웬일인지 순순히 피팅룸 앞에 줄을 서준다. 새 옷을 사는걸 기뻐하는 눈치다. 이것저것 옷을 몇 벌 골라서 입어보기로 했다. 145cm, 45kg의 뱃살 부자 체형 재희가 조금 날씬해 보일 수 있는 옷을 골라봤다. 살이 쪄서 청바지를 못 입어 그동안 계속 펑퍼짐한 조거 팬츠 아니면 통이 넓은 코르덴 바지를 입혔는데 오늘은 스판이 함유된 재질의 슬림핏 바지를 입혀봤다. 그런 옷은 너무 불편하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어머, 잘 어울린다 재희야!" 하니까 재희가 몹시 흡족할 때만 보이는 표정 근육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상의는 좀 루즈한 핏에 쨍한 초록색 맨투맨으로. 재희가 날씬해 보여서 합격. 그리고 셔츠와 반팔 티셔츠도 샀다. 대학생 신입생 느낌의 코디라고나 할까, 엄마 취향으로 골라봤지만 재희도 마음에 든다고 해서 쇼핑, 성공적.
이번엔 미용실. 헤어스타일은 인상의 반을 좌우한다. 그래,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 삼만원 컷이 오늘 우리 아들의 인상을 깔끔하고 스마트하게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는 사이 재희가 가운을 입고 자리에 앉았다. 포동포동 뽀얗게 살이 오른 재희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턱살이 자꾸 만지고 싶어 진다. 귀여워. 그런 귀여운 얼굴을 선생님에게 맡겨두고서 둘째 아들과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핑크 펌에서 10분이면 해결되던 커트 시간이 30분도 넘게 걸렸다. 두근두근, 다시 만났을 때 재희는 어머나, 정말 인물이 훤해졌네. 선생님의 섬세한 바리깡 스킬로 완성된 헤어스타일은 뭔가 미세한 차이로 뭔가 동네 커트와는 다름과 감탄을 주었다. 이것이 요즘 말하는 자본주의의 맛인가. 만원과는 다른 삼만원 컷. 헤어컷, 성공적.
수학 선행학습은 못했지만 이보다 더 완벽한 새학기 준비는 없을거라고 믿어 의심치 말자.
4학년, 준비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