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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Feb 01. 2024

애호박 같은 내 마음

수제비에 너무 빨리 넣어버린 애호박처럼 흐물거리고 있다







본격적으로 요리를 한 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였다.

보통 여자들이 다 그렇지,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엄마는 워낙 요리를 잘하셨다. 다른 사람에게 뭘 시키고 만족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나한테 뭘 잘 시키지 않았다. 앓느니 죽는다,라는 표정으로 그냥 엄마가 할 테니까 저리 가서 공부나 하라고 하셨다. 공부를 잘해서 안 시킨 건지 그걸 안 시켜서 공부를 잘했던 건지의 인과관계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요리를 가르쳐주시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요리프로그램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여성중앙 같은 엄마들의 잡지에 나오는 요리섹션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편이었다. 물론 거기에 나오는 요리들은 일반 가정집에 없는 재료나 향신료가 꼭 들어가는 요리였고 수입향신료의 이름을 중얼중얼 곱씹어볼 뿐, 중간 과정에 비약이 심한 레시피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는데 흥미가 있었다. 뭐든 비슷하겠지만 요리도 눈으로만 배워서는 실력이 향상되는 일은 없다. 직접 칼을 들고 주방에 서서 뭐라도 썰고 지지고 볶아가면서 실전에 투입되어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결혼을 하면서 요리를 시작하게 됐다. 소꿉장난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요리를 하다 보니 재료의 특성이나 그에 따른 손질법, 요리 중 재료를 다루는 순서 같은 건 잘 몰랐다. 인터넷 잠깐 뒤지면 수천수만 개의 레시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건 나 어릴 적에 잡지를 톺아보듯이 자세히 읽히지 않았고, 수박 겉핥기로 후루룩 내리고 대충 따라 해보면서 먹고살았다.


내 요리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은 종종 애호박 때문이었다. 수제비는 복잡하지 않은 요리다. 육수를 우리고, 야채와 밀가루 반죽을 준비하고 재료를 넣어가며 간을 맞춰 끓여내기만 하면 끝. 그런데 항상 애호박이 문들어져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지경이었다. 간단하지만 그때는 이유를 잘 몰랐다. 오징어볶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은은하게 좋아하는 애호박은 늘 문들어져있었는데, 맛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요리가 폼이 나지 않았다.


애호박은 아주 짧은 시간에도 금방 데워지고 익기 때문에 거의 요리가 다 되어갈 즈음에 넣어도 된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나는 성격이 급했고, 그냥 뭐든 일단 준비된 야채들을 때려 넣기 바빴다. 한 소 뜸 끓고 난 후에 피날레로 넣어줘야 수제비 국물 위를 동동 떠다닐 푸르른 친구인데, 너무 일찍 투하되어 이미 바닥에서 흐물흐물해진 채로 가라앉은 애호박이란.


요즘 내 마음이 그런 애호박을 닮았다는 사실로 자기 연민에 빠져있다. 나는 먼저 마음을 던지고, 그곳에 가있기 일쑤다. 상대방의 마음은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 국물이 끓기 전부터 냄비 안에 들어가 있는 애호박처럼 먼저 가있다가 국물이 끓어오르는 동안 흐물흐물해져서 정작 내 마음을 다 전하지도 못한 채 물러나는. 생색 한번 못 내보고 물컹물컹 국물 속 감칠맛으로 사라지는. 그게 멸치 때문인지 다시다 때문인지의 문제로 귀결되는 동안 육수의 깊은 맛에 더해진 지나가는 채소 1 정도의 역할에 대해서 한마디 미명도 내보지 못하고 으깨어지는. 내 마음 요즘 참 애호박.




어릴 땐 단호박인줄 알았는데, 지나온 세월 내마음은 애호박이었구나.




#자기연민 #오늘은 in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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