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여행소, 스물세 번째 이야기
'우리 바르셀로나 투어 끝나고 숙소 전에 들렸던 데가 어디였지?'
'음, 보케리아 시장.'
'아 맞다. 거기서 사과 두 개 사고.. 얼마였더라?'
숙소에 돌아와 펜과 수첩을 들어 아침부터의 여정을 떠올리며 일기를 써 내려간다. 어디를 갔고, 무엇을 봤고, 얼마에 무엇을 사고 등 시간 흐름에 따라 기억을 더듬으며 회상을 할 때면 '오늘도 참 알차게 썼구나' 하는 일종의 뿌듯함이 몰려온다. 몇 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여행기록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 내용엔 내가 쓸 수 있는 감성적인 표현 어구를 총동원하여 내가 본 것들을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느낌과 생각을 기록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팔이 아팠던 탓인지, 귀찮지만 글은 맺어야 한다는 의무감 탓인지 무미건조 하고도 단순한 사실 나열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여행에서의 기록은 참 의미가 크다. 후에 이 여행을 반추했을 때 나를 마치 그때 그 장소로 보내어 눈앞에서 다시 한번 그때의 감동과 다짐을 떠올리게 만드는 타임머신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사진만으로 그것을 남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뒤 여행의 필수품으로 펜과 노트를 챙기기 시작한 것도 그 이유에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이 있음에도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위해 여행을 떠날 때 노트와 펜을 챙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록하느냐에 있다.
나도 그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히 쓰는 것은 일정과 가계부다. 몇 시에 일어나 몇 시에 기차를 타고 어디서 어디로 이동한다는 사실, 그리고 커피와 빵을 얼마에 주고 사 먹었다는 단순한 '사실'말이다. 물론 여행 기간 동안 남은 예산을 확인하고 계획을 짜는데 이러한 기록들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몇 년 후 나에게 중요한 사실은 빵을 1유로에 주고 사 먹었다는 것이나 아침 8시에 기차를 탔다는 사실이 아니다. 더 큰 의미는 그 행동의 주체인 나의 생각과 느낌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정과 가계부 작성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밀림을 보거나 빨갛게 물든 노을을 보면 저도 모르게 '예술'이라고 감탄합니다. 그리고 뭐라도 한마디 합니다. 나도 모르게 한 말과 몸에 스민 느낌을 몰스킨을 꺼내 그대로 적어두면 '여행의 독후감'이 완성됩니다.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 밥장, '떠나는 이유' 중에서
오랜 여행을 하는 사람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면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내가 발견한 가장 큰 특징은 '여행의 순간 느낀 찰나의 감정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나마 자신이 느낀 감정을 오랫동안 간직하기 위해 취했던 행동이 자연스레 글쓰기로 이어졌을 뿐이다. 숙소에 돌아와 하루를 회상하며 글을 쓰는 것 이상으로 그들은 장소를 불문하고 그 어디에서든 온전한 느낌들을 노트에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순간의 감정을 놓치기 싫은 그들의 글은 다듬어지지 않고 투박하지만 가장 진실되게 기록된다. 순간의 몰입으로 써 내려간 짧지만 강력한 글들은 여행의 그 순간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여행의 기록이 단순히 '남기기 위함'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여행지에서 떠오른 느낌과 영감, 아이디어를 적어두는 것은 일종의 트리거(방아쇠)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순간순간의 발상을 담아내고 심으면(플랜팅) 여행지에서든 일상에 돌아와서든 그 생각과 아이디어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팍팍한 일상에서 벗어나 평소엔 접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주변에 물들어 말랑말랑해진 머릿속과 마음속에 그려지는 것들을 어딘가에 사각사각 옮겨 내는 그 시간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여행에서 무엇을 적어야 하나?
참 쉽고 간단하지만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청춘들에게 추천해보고 싶은 몇 가지 방법들이 있다.
'버스 차창 밖 넘어 보이는 사람,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묘사해라'
'여행을 통해 알게 된 스스로의 새로운 면모를 적어보아라'
'나에게 스쳐 지나간 소중한 인연들을 곱씹어보아라'
'일상으로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보아라'
사실 나열하다 보면 여행에서 적을 수 있는 것들은 참 많다.
단지 스스로에게 솔직함이라는 연필만 손에 쥐어주면 된다. 그렇다면 그 어디든, 발길 닿는 대로 여행하며 내는 사각사각 소리는 가장 멋진 기념이자,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다시 꺼내 읽었을 때 온전히 그때의 그곳으로, 그때의 내 모습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유일한 여행의 산물이 될 것이다.
뛰어난 문장가도 아니면서, 그럴듯한 시나 소설에 에세이를 쓰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쓴다. 아무도 못 보는 곳에서도 쓰고, 모두가 보는 곳에서도 쓴다. 쓰고서야 이해한다. 방금 흘린 눈물이 무엇이었는지, 방금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왜 분노했는지, 왜 힘들었는지, 왜 그때 그 사람은 그랬는지, 왜 그때 나는 그랬는지. 쓰고 나서야 희뿌연 사태는 또렷해진다. 그제야 그 모든 것들을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쓰지 않으래야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김민철, '모든 요일의 기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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