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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 Nov 11. 2016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자들의 이야기

연극 <게임>

 두산아트센터는 올해 ‘두산인문극장 2016: 모험’이라는 주제로 관객들과 만난다. 이 프로그램은 ‘두렵고 아픔과 고통이 수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갇히지 않기 위해 떠나야 하는 것이 바로 모험’이라고 말한다. 연극<게임>(2016.04.12.~2016.05.15.)은 하우스 푸어의 삶을 리얼리티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극단적인 장치를 통해 동시대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며 모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사진 = 두산아트센터

디스토피아 

 애슐리와 칼리는 집이 없는 신혼부부다. 직업도 수입도 없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갖춘 좋은 집이 주어진다면 거절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 집에서 살면 월급까지 준다. 사생활을 공개해야 한다는 엄청난 조건에도 ‘돈이 모일 때까지 잠깐만 생활하지 뭐.’ 라며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 연극의 무대는 보통의 연극들처럼 객석과 무대가 마주 보는 형태가 아니다. 스페이스 111의 일반적인 관객 출입구가 아닌 좁은 통로를 지나 뒤편으로 입장하면 객석이 무대를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객석과 무대 때문에, 배우와 관객의 시선이 마주 보기 어렵고 실제로 배우들이 관객과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모니터도 4개나 된다. 모니터 속에서 관리자와 사업가, 고객은 부부를 관음 한다. 또한 배우들의 등퇴장 통로는 무대에서 등장하는 일반적인 공연들과 달리 관객들 뒤에서 혹은 관객들 사이로 지나다닌다. 그래서 관객들은 게임의 참가자가 되어 배우들을 관음을 하는듯한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하고 관객인 나 자신도 모니터를 통해 사업가와 대중에게 관음을 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무대 위는 게임을 주최하는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한 집이 구현되어 있다. 최첨단 설비로 장식된 주방에 필요한 가구와 전자기기에 깔끔한 욕실까지 있다. 좋은 집에 월급까지 준다니 이쯤 되면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토피아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주 잠시이고,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디스토피아적인 공간의 실체가 드러난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관음적인 시선을 넘어서 마취총으로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면서 부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잘못되었음을 느낌에도 그들은 그 공간을 나갈 수 없다. 이미 편안함에 길들여진 그들은 가진 것을 쉽게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자유를, 인간의 존엄성을, 아이 한 명을 포기하기로 한다.

 엔터테인먼트 사업 간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총은 어린아이에게까지 겨눠진다. 칼리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가진 아이가 처음 마취총에 맞을 때 이 집을 나가야 한다고 다시 한번 느낀다. 그러나 여전히 경기는 어렵고 직업은 얻기 힘들며 돈은 없다. 때문에 또다시 칼리는 집을 나가는 것을 포기한다. 부모는 아이가 총에 맞는 것도 이제 어느 정도 당연시하게 된다. 총이 맞기 싫어 상자에 숨어있는 아이에게 도리어 화까지 낸다. 네가 이러면 우리 이 집에서 쫓겨나야 한다며 아이를 다그친다. 인물들은 끝을 향해 갈수록 자신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의 훼손에 대해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긴다. 한번 집과 돈으로 자유와 존엄성을 맞바꾼 이후부터 급속도로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애슐리는 집을 떠나기 위해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기껏해야 기본시급만 받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뿐이다. 세 가족이 먹고 살기엔 너무나 부족한 금액이다. 사는 것 자체가 생존 게임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마취총에 맞아 잠시 기절하는 일은 오히려 쉽다. 나가서 또 거지같이 살 거냐며 짜증내는 칼리의 외침에는 현시대 젊은 세대가 직면한 가혹한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 담겨 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이들의 얼굴엔 피로감과 우울함이 가득하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자본주의의 폭력성

 이 공연의 스크린에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문구는 ‘Are You a Game?’이다. 공연의 제목과 작품 속에서 행해지는 줄거리에 따르면 게임이란 단어는 일종의 유흥거리, 놀이라고 해석하기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여지를 이 문장이 종결시켜 주었다. 게임이 즐거운 것이 아닌 당신도 ‘사냥감’이냐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 문장을 놓고 보면 연극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게임의 룰은 20분간 남자 100만 원 또는 여자 120만 원을 지불하고 마취총을 쏘는 것이다. 총을 더 쏘고 싶으면 돈을 더 지불하면 된다. 고객들은 재미를 위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임을 한다. 이들의 폭력성은 점차 극대화된다. 성적인 농담과 혐오발언, 욕은 기본이다. 연속으로 여자를 쏘는 잔인한 모습도 보인다. 젊은 여성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돈 많은 사모님은 칼리를 쏘고 싶어 하고, 아이에게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학교 선생은 아이에게 험한 말을 하며 쏴버린다. 젊은 여자들과 남자들은 성적인 농담을 서슴지 않으며 온갖 욕설을 하며 게임을 즐긴다. 화면 속 스크린도 점차 잔인해진다. 초반에는 동물을 사냥하는 영상이 나오더니 후반엔 인간을 타깃으로 폭발물을 던지는 영상이 나온다.

 마취총 게임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경쟁 업체가 생기고 마을 전체가 게임촌으로 변하면서, 업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더욱더 자극적으로 변한다. 1+1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고 허용되지 않던 아이까지 총을 쏠 수 있게 한다. 더 자극적으로 게임을 진행해야 한다는 사장은 죽지 않을 만큼 실제 총을 쏴서 피를 봐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다. 자신은 경쟁업체 때문에 빚까지 생기고 힘든데 저들은 돈까지 받고 제공된 집에 사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된다는 잔인한 자본주의적 논리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결말답게 시간이 지나자 게임 시장은 몰락한다. 하우스푸어는 다시 하우스푸어가 되고 기업가는 다른 기업가에게 밀려 종말을 맞이했다. 연극은 끝까지 잔인하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인생은 모험이다

 칼리네 가족이 쫓겨나는 날, 게임 부스를 관리했던 관리인 데이빗이 처음으로 가족들을 만나러 온다. 상자 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리암에게 데이빗은 상자 속에서 나와 세상과 마주하라고 말한다. 세상을 마주하면 생각보다 힘들고 고통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마주하며 살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은 스스로를 좁은 공간인 관음 하는 부스에 가둬놓고 자살을 하면서. 참으로 아이러니한 마지막 장면이다. 아마도 데이빗은 어느 순간 연민의 시선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 가족, 특히 리암에게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답게,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실현 가능한 일인가.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 논리와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리암이 용기를 내어 세상과 마주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자본주의를 마주하여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에 잠식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모험은 필요하다. 당연시되는 사회의 문제점에 안주하기보다는 모험을 해야 인간다운 자신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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