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민중의 적>
샤우뷔네 베를린 극단과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 마이어의 <민중의 적>이 LG아트센터에서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단 3일간 공연을 올렸다. 토마스 오스터 마이어는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동 시대성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으며, 정치적인 연극으로 주목받는 연출가이다. 이러한 그가 헨릭 입센의 <민중의 적>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각색하여 기존의 희곡 텍스트보다 훨씬 더 밀도 있는 질문을 관객들에게 묻고자 한다.
헨릭 입센의 ‘민중의 적’은 19세기 노르웨이가 배경이며 5막으로 구성된 희곡이다. 주인공 스토크만 박사는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의 주된 사업이자 희망인 온천의 온천수가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스토크만의 형이자 마을의 시장은 이제 막 돈을 벌 수 있게 해 준 온천사업을 중단하길 원치 않는다며 스토크만의 행동을 저지한다. 한번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이미지는 회복하기 힘들 것이고, 수도관 교체에는 최소한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며, 교체를 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올려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시장의 뜻대로 자신의 가족과 마을의 안위를 더 중시하여 스토크만의 행동을 저지시키려 하고, 박사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질려 자신을 민중의 적이라고 칭하며 다수는 항상 옳은 가에 대한 연설을 한다.
오스터 마이어의 민중의 적은 입센이 하고자 했던 주제는 그대로 살리면서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시간 배경을 현재로 바꿨으며, 스토크만의 나이를 원작보다 어리게 하면서 교사였던 딸은 사라지고 부인과 어린 아기뿐인 간략해진 가족 구성원으로 설정했다. 빌링과 홉스타드 그리고 스토크만과 부인은 취미로 밴드 활동을 하는 현대인들이다. 1막과 3막까지 스토크만네 밴드는 음악을 활용해서 분위기를 전환하거나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강조하곤 한다. 무대 전체를 칠판 페인트로 다 덮어 그 위에 그림으로 가구를 그린 것도 미니멀하고 인상적이다.
시간 배경을 현대적으로 바꾸면서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5막의 결말이다. 원작에서는 스토크만이 장인의 제안을 거절하고 신념을 지키며 학교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며 끝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연극에서는 장인이 자신의 앞으로 사놓은 온천 주식을 부인과 함께 힐끗힐끗 바라보며 열린 결말로 끝난다. 우리는 스토크만 박사가 그 주식으로 온천을 수리할지, 단순히 부유한 주식부자가 될지 혹은 어떤 다른 선택을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결말은 희곡이 쓰였을 당시보다 돈이 더 중시되고 무시할 수 없는, 돈이 그만큼 영향력이 더 커진 현 사회를 암시하기도 한다.
1막부터 3막까지 다소 지루한 면이 있었다면 4막 스토크만의 연설에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면서 극의 분위기가 역동적으로 변한다. 희곡에서 결국 스토크만이 말하고자 했던 ‘다수가 항상 옳지만은 않으며, 소수의 권리도 존중되어야 한다.’를 무대에 올리면서 관객들에게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익을 위한 다수의 침묵, 진실을 위한 소수의 항변. 당신이라면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이 질문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스토크만의 연설이 인상적이다. ‘더 이상 온천의 오염이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사회가 썩었다는 것이다. 부패를 묵인하고 용인하는 사회의 기반 위에 이 문명이 함께 썩어가고 있다.’, ‘I am what I am 나는 나다. 이러한 현대의 위기는 개인주의적 사고 때문이다. 사람들은 domestic 즉 자신의 안위, 자신의 가족, 자신의 마을, 자신의 국가만의 이익을 중시하며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 이제 인류는 성장이 아닌 절제만이 해답이다.’ 관객 여러분 이러한 스토크만의 주장에 동의하십니까?
원 텍스트가 가진 주제보다 훨씬 밀도 있고 복잡하며 철학적인 그리고 통찰력 있는 논리 전개와 질문을 던지면서 관객들은 사유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한국 관객들의 호응과 참여는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관람했던 날엔 옥시 사태와 사대강을 언급하며 한국의 현실에 대해 비판하는 관객도 있었고, 왜 스토크만 박사의 연구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지 의문을 표하는 관객도 있었다. ‘다수란 누구인가’에 대한 역 질문이 나오기까지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로 굉장했고 세계투어를 돌면서 토론에 노련해진 배우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다만 많은 관객들이 토론에 참여하면서 이야기가 길어져 배우가 중간에 끊어내야 했다는 점, 본인이 흥분하여 다른 관객과의 매끄러운 토론이 되지 않았던 점 때문에 다른 관객들의 흥미가 떨어진다는 것과 같은 부작용이 어쩔 수 없이 수반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이 돼서 이 연극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관객석에 앉아있던 시장의 편을 든 배우들이 스토크만의 연설이 끝나자 그를 향해 물풍선을 던진다. 스토크만은 속절없이 물풍선을 맞는다. 4막이 시작되면서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졌던 벽은 곧이어 노랗게 얼룩진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인 스토크만이 대중들에게 몰매 당하는 모습을 왼편 구석에서 그의 부인이 핸드폰으로 촬영하고 있다.
왜 스토크만의 부인은 남편의 연설 장면을, 몰매 맞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을까? 이 디테일은 정말 현대에 맞는 혁신적인 장면인 것 같다. 아마 강연 후에 부인은 인터넷에 연설 장면을 올려 네티즌, 즉 다수의 힘을 빌리려 하지 않았을까? 나의 예상이 맞다면 결국 누가 더 다수의 위치에 있느냐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마을과 네티즌의 대립은 또 우위가 달라지니깐 말이다. 이 장면이 ‘다수란 누구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민중의 적은 요 근래 본 다른 연극보다도 좀 더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게 해 준 공연이었다.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목소리들은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기록들이 쌓인다면 결코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식하고 노력하는 스토크만 박사가 있듯이 우리도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좀 더 사회가 다양성을 존중하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사회가 올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