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햇빛 샤워>
2015년 여름 남산예술센터에서 초연을 한 연극 햇빛 샤워가 2016년 5월 다시 남산센터에서 재연을 올린다. 장우재 연출의 작품에는 ‘가난’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가 말하는 21세기의 가난이란 이전처럼 작고 하찮은 것이 아니라, 좀 더 진화되고 변형되어 나비처럼 화려하고 치밀한 모습을 가진 형태로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극 중에서 광자가 동교에게 말하는 ‘가난은 자신보다도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대사, 골연화증을 앓고 있는 광자가 실내에서 일하며 햇빛 쬘 시간도 없어 해가 저물 즘에야 반지하방에서 미약한 햇빛으로 샤워하는 애처로운 모습에 현대의 가난이 압축되어 있다, 연극 <햇빛 샤워>는 주인공 광자의 삶을 통해 좀 더 복잡해지고 얽혀버린 현대적인 가난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대는 단순하고 강렬하다. 중앙 구석 즈음에는 그녀의 유니폼이 있으며, 옷장이나 화장대와 같은 가구가 놓여있고, 무대의 정중앙에는 광자의 침대가 있다. 그녀의 방으로 묘사되는 공간은 리프트가 있어 반지하방을 묘사하거나 싱크홀을 묘사할 때 아래로 내려가기도 한다. 극의 인트로는 광자와 얽혔던 인물들이 침몰되어버린 광자의 공간을 지나가다가 발견하고 흠칫하는 장면이다. 극의 일정한 간격 사이에 광자의 주변 인물들이 광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삽입되어있다. 이들의 기억 속 광자는 썅년, 또라이, 미친년 혹은 예쁘고 착한 아가씨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이러한 그녀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해서 광자에 대해 누군가(형사)가 그녀를 캐묻고 다니는지 관객들은 궁금해서라도 몰입하게 된다.
광자는 고아출신에 상해 전과 기록이 있고 반지하방에 살고 있는 20대 후반의 백화점 의류 매장 직원이다. 그녀는 부정적인 단어로 대변되는 자신의 삶이 싫다. 당연하게도 어릴 때부터 놀림받아오던 이름은 그녀의 삶에서 제거되었으면 하는 고유명사이다. 마치 자신의 불행은 이름에서부터 시작된 것처럼. 이름만 바꾸면 뭔가 달라질 것 같은 조그맣고 불확실한 희망으로 그녀는 이아영이란 이름으로 개명을 원한다.
고아로 자라온 그녀는 아무런 이유나 대가 없이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이 없었다. 진심을 바탕으로 사람과 관계되어 본 적 없는 그녀에게 관계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에 의하여 맺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옷을 빼돌려주는 물류담당 직원과 연인관계를 맺고, 승진을 목적으로 김 과장과 불륜관계를 맺는다. 치밀하고 잔머리가 넘치는 그녀는 필요가 없어진 관계라고 판단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과감하게 주변인들을 배신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주변의 환경에 맞춰 길들여진 광자의 현실적인 처신으로 관객들에게 인식된다. 관객들은 광자를 마냥 욕할 수만은 없고, 그녀를 연민하게 된다.
광자와 비교되는 인물로는 동교가 있다. 동교는 광자와 마찬가지로 고아출신이지만 연탄가게를 운영하는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셈을 잘 못하는 정신적으로 약간 모자란 사람으로 묘사되는 그는 양부모 밑에서 일하며 자신의 몫으로 받은 것의 대부분을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한다. 동교에게 관계란 부담스럽거나 불필요한 것이다. 동교는 아무 관계가 없어도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편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광자와의 관계도 아무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편하고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광자는 동교가 자신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원치 않아하는 사람이기에 서로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관계 아닌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동교는 국가에서 지원하는 나눔 사업에 대표 상징 격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사업에 대한 양부모의 압박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과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가지게 되면서 고민 상담을 광자에게 하게 된다. 얘기를 나누며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 광자와 동교는 비슷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서로에게서 비슷한 점을 찾고, 서로를 연민하게 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둘은 친구 혹은 정의될 수 없는 어떠한 관계를 정신적으로 맺는다. 광자에게서 이성에게 느끼는 감정 혹은 친밀함이 생기자 동교는 광자의 속옷을 하나 달라고 부탁한다.
얼마 후 동교는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다. 유서에는 ‘그것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아무 관계도 없이 나에게 주었다. 나는 이제 내 삶을 결정했다.’라고 쓰여 있었다. 수사관은 브래지어가 동교의 자살 동기의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하고 광자를 찾아간다. 광자는 동교와 무슨 관계였냐는 수사관의 물음에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답한다. 승진도 했고 이름도 바꿨고 이제 좀 괜찮게 살아보나 했던 그녀는 혹시 자신에게 해가 될까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답한 자신에게 혐오감, 동교를 부정한데서 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결국 광자는 동교의 양부모를 상대로 무엇 때문에 동교가 자살을 한 것인지 알아내려 칼로 위협하다가 우발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관계를 부정했던 광자가 유일하게 진실했던 동교와의 관계를 위해서, 자신을 인간답게 바라봐준 유일한 동교를 위해서 한 행동이다.
작품의 줄거리만 보면 광자의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광자와 동교는 각자가 결핍된 부분을 가지고 있는 상대를 보며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일을 하며 상대적으로 당당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광자와 어딘가 어눌하고 모자라서 봉사 정도의 일 밖에 할 수 없는 동교. 이름에 빛 광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햇빛이 부족해 반지하 방에 작게 들어오는 햇빛에 샤워해야 하는 광자, 열을 내는 수단인 연탄을 다루는 동교. 부모님이 존재했으며 이름까지 지어준 광자, 아무런 연고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동교. 이들은 이렇게 다른 듯 같은 결핍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동교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때 광자는 동교를 위해 칼을 들고 동교의 부모를 찾아가고 죽은 이후엔 무대 중앙에 놓인 침대에 홀로 누워있던 동교 옆에 눕는다. 이들은 결국엔 하나가 된 것이다. 서로에게 햇빛이 되어 준 것이다.
연극 <햇빛 샤워>는 지난해에 평단으로부터 ‘탄탄한 극적 서사, 자기모순과 분열 속에서 끝내 파열하고 마는 주인공의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형상은 드물게 탁월하고 아름답다(제9회 차범석 희곡상 심사평)’, ‘사회의 냉혹함을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자멸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싱크홀이라는 상징과 대비시키며 그려낸 수작(제17회 김상열연극상 심사평)’과 같은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에 대해 탄식을 금할 길이 없었다.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왜 광자의 이야기를 개인의 불안과 절망으로 보는 것인가이다. 가난한 여성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수단 중에서, 몸을 파는 것이 가장 단시간에 이룰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사회 병리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 캐릭터의 엉덩이를 만지며 ‘나랑 쉴래요?’라고 묻는 광자의 모습은 이름을 바꾸고 싶은 절박한 모습이 아닌 일을 쉽게 끝내고만 싶은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그녀가 저지르는 도덕적으로 나쁜 행동들, 이를테면 같은 직장의 다른 직원을 이기기 위해 불륜 관계를 저지르거나 돈을 더 벌기 위해 물류 센터의 남직원과 연애를 하는 모습은 그저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화시켜 버리고 있다.
다음으로, 광자가 몸까지 팔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 중에서 광자는 직업이 없는 것이 아니다. 백화점 의류매장 직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상사와의 내연관계나 물건을 가져다주는 남자와 연인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아 단기간 일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광자가 700만 원이 없어서 몸까지 팔아야 하는 것일까. 그녀가 돈이 없었다면 돈이 없을 수밖에 없던 개인적인 이유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더 드러날 필요가 있다.
가난을 소재로 한 비극들은 많다. 최근에 공연되었던 연극 <게임>만 보더라도 가난을 소재로 한 비극이면서 그들이 왜 하우스 푸어가 되었는지, 자신들을 상품화하면서까지 그 집에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고 그 속에서 고뇌하고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간다. 하지만 <햇빛 샤워>는 어떠했는가. 광자는 죄책감을 가지기보단 자신의 도덕적 악행들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이 공연의 창작자 또한 광자라는 캐릭터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할 뿐 그녀가 그러한 행동에 다다르게 된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현대의 비극을 하고자 했다면 ‘가난한 여자가 성공하기 위해 몸까지 팔아야 하는 감상적인 이야기’보다는 사회 구조에 의해 그럴 수밖에 없었으며 그 속에서 타자화되지 않기 위해 고뇌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더 맞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