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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는 것에 대해

장수연 선생님의 <강남은 못가도 목동은 가야할까> 브런치 글을 읽고

by 로라


저는 1986년생으로 목동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입니다. 목동에서 10대 시절은 한마디로 외롭고 괴롭고 슬펐습니다. 남들이 저를 볼 땐 외적으로는 '당찬(?)' 성격 때문에 친구도 많고 큰 문제 없어보였다고 하지만 유치원때부터 외모, 어느 아파트 사는지, 공부, 각자의 재능 등으로 애기들끼리도 비교하고 줄 세우는 환경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부모들의 경쟁은, 아이들끼리만 있는 '야만의 환경'에서는 조금도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촌지선생-엄마의 치맛바람-철없는 아이가 삼위일체된 목동의 초등학교는 아귀도가 따로 없죠. 제가 그 서열의 몇 번째 자리에 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괴롭힘을 당하면 당하는대로, 누군가 괴롭힘 당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보고 있는대로 영혼이 부숴질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기었을 때는 다른 환경이란게 있을 수 있단 생각조차 할 수 없기에 그저 도태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같은 가면을 쓰고 발버둥을 치게 되고 이 상황이 병들었다는 것을 정확히 자각한 건 상당히 나이를 먹은 뒤였습니다.


집안 형편도 형편이지만 부모님도 다른 부모님들과는 조금 다르셔서 굳이 억지로 남들의 교육열과 분위기를 맞춰야 한단 생각 안하고 하고 싶은 걸 하게 두시는 편이었는데, 그게 우습게도 또래들 사이에서 제가 '괴짜' 취급을 받게된 원인이 되어 어린 시절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외롭고 슬프게 보내야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원을 가는 대신 집에서 책 읽고 엄마랑 요리하고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 덕분인지 문과 과목과 음악 관련 과목은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곧잘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산수였죠. 유치원 때부터 선행학습을 받고 온 친구들과 그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빠른 학교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던 전 산수를 못하는 아이었습니다. 글을 곧잘 읽고, 말을 잘하고, 시사 상식이 많고, 음악을 잘했어도 산수를 못하는 아이가 되는 순간 '저능아'(실제로 반 친구들이 제 산수 시험지를 보고 절 저능아라고 부르곤 했습니다)가 됐던 것이 제가 신목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고 있던 때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약점이 보이면 얼른 배제시키고 순위를 만드는 엄마들의 습성을 그대로 닮은 아이들의 태도는 참으로 잔인했습니다. 차라리 최소한의 사회성이 생겨 남을 무조건 멸시하는게 부끄러운 행동이란 것을 대다수가 인지하던 고교시절이 초등학교 때보다는 나았지만, 스스로와 대면해 이겨낼 수 없던 나이에 겪은 상처는 가슴 속에 작은 암덩어리로 숨어있다가 세월과 함께 기괴하게 커져 엉뚱한 때에 터져나오곤 했습니다.

어머님이 가정주부로 집에 계시면서 저의 교육과 상황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 제가 학교에서 어떤 일을 겪고 제 마음 속에 무슨일이 있는지 다 아실 순 없었습니다. 산수가 뒤쳐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모든 과목을 다 잘할 수 없고 또 산수 외에 과목을 잘했다고 판단해서 '우리집은 역시 이과머리는 아니구나'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다고 하더군요. 설마 산수 못한다고 3학년 짜리들이 친구를 저능아, 더럽다, 병신 소리를 할 줄은 어떤 엄마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엄마는 그때를 돌이켜보면 말도 없고 아줌마 대열에 잘 끼지 않고 늘 조용히 소신대로만 행동했던 엄마가 동네 입김 쎈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먼저 미우털이 박혔고, 그런 엄마 밑에서과외를 받지 않았음에도 제가 다른 과목에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 얄미운 요소가 되어 암암리에 더욱 적대감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셨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역시 산수는 안 되지?' 라며 기다렸듯 달려들었달까요. 촌지를 주지 않아 담임선생님이 시도때도 없이 절 구박하셨던 것도 큰 이유였구요. 촌지를 줬다면, 다른 아이들처럼 새벽 한자와 선행학습 과외를 시켰다면, 수입의 상당 부분을 교육에 쏟아부었다면 제가 특별히 도태되는 일은 없었겠지만 그건 부모님 천성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고 저도 원치 않았습니다. 물론 대단히 소신있고 진보적이고 예술가적인 집도 전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은 고학력자도 아니었고, 아버지는 군인 출신 블루칼라였으며 장로교 보수 노회 소속 조그만 개척교회를 섬기는 집사님들이었습니다. 그냥 착하고 신앙 좋고 건강하게 크는게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는 지극히 상식적 사고를 하던, 오히려 상당히 보수적이고 엄격한 집이었습니다.


물론 시대가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그때까지만해도 부모님들께서 아이들이 그토록 잔인할 수 있고 학교가 정글 같다는 걸 지금만큼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덜 예민하셨던 것도 컸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육아지식이 많아졌지만 줄세우기와 배제는 더욱 심해진 지금, 진짜 원인이 사라지지 않은 학교에서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동안 아이에게 일어나는 영혼의 일까지 완전히 다 알 수 있을지요.

또한 목동은 다른 무엇보다 '어떻게하면 나의 불안과 수치를 엄마에게 숨길 수 있는지'를 가장 빨리 배우는 공간이었습니다.
멸시가 부끄러워 학교에서의 생활을 열심히 지어내 말하고, 그마저도 지칠 땐 몸도 같이 지쳐 열이 펄펄 나 학교를 안가던 제가 몇 년이 흐른 뒤 그때를 고백했을 때 무너졌던 부모님과 언니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져도 엄마까지는 끝까지 일을 안하시고 제곁에 함께하려 하셨던 건, 자식은 항상 곁에서 사랑으로 보살피는게 최고의 교육이라고 믿던 어머니의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에서는 자신있다 여겼던 저희 어머니께서 정작 막내딸의 상처 받은 학교 생활을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단 걸 아신 뒤로 엄마의 세계도 큰 폭풍이 몰려왔습니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방송국 합창단을 언니와 다니며 재미를 붙이게 된 뒤 비교적 건강해지기 시작했고 학교 공부도 뒤쳐지지 않게 된 뒤에야 전 또래들에게 인격체로 대우를 받게 되고, 성적이 오르자 이전까지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던 노래와 저의 다른 부분들이 함께 칭찬을 받으며 저학년 시절 따돌림이 우스울 정도로 또래들과 선생님은 절 공주처럼 대우해줬습니다. 그리고 전 그 대우에 도취돼 절 괴롭혔던 친구들을 똑같이, 그보다 더 괴롭혔습니다. 깨닿고 약자를 보호하는 사람이 된 게 아니라 눈 뒤집혀 복수복수를 외치며 절 괴롭혔던 아이들을 화장실에 가두고 지나가며 어깨를 치고 머리를 때리고 심한 욕설을 퍼부었던게 고작 제가 초등학교 5, 6학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또한 전 고작 초등학생 성적으로 하루아침에 저에 대한 대우가 바뀌는 동네 친구들과 선생님이 사람처럼도 보이지 않아 대다수의 인간을 아주 불신하고 멸시하는 사람으로 커나갔습니다. 건강해졌다고 착각했던 마음은 사실 더 썩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은 목동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양천여고에 진학하고 집은 구로구 개봉동으로 이사가게 됐습니다. 동네에서 역시 방황하던 언니를 금천구 시흥에 있는 국악예고(지금의 전통예술고)에 거의 피신 시키듯 부모님이 보내신 뒤에 더이상 좁은 집을 견디며 목동에서 저희를 교육시킬 이유가 없어졌기에 저와 언니의 고등학교와 멀지 않은 구로구로 터전을 옮기게 됐습니다. 결국 소위 입시를 직접 준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 고교시절에 저희는 목동을 떠났습니다. 주변 아주머니들은 어쩌려고 목동을 두고 구로구로 이사를 가냐고 다들 말을 잃으셨지만 고작 바로 옆동네로 이사갔을 뿐인데 제가 느낀 그 고요함과 평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 공부했던 고3때가 편안했습니다. 학교 끝나고 목동 아파트를 거닐지 않는 것 자체가 휴식이었고 그나마 아이들이 철이 들고, 여고 특유의 다소 부드러운 분위기에 목동 외 지역 친구들이 많고 전교조 선생님들의 유난스런 평등 교육 등의 두드러졌던 학교 분위기도 그 평화에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목동 안에서 그나마 '비목동'적인 것들이 만들어낸 한줄기 오아시스였달까요. 그제서야 조금씩 자기 반성이 시작됐고 가해자 피해자 할 것 없이 우리모두 목동의 어른들이 만들어낸 기형아들이라는 걸 인지한 뒤로 전 더더욱 목동에 놀러도 가고 싶지가 않아졌습니다.

지금도 그 동네에 중학교 교사를 하는 친구와 학원 강사를 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놓고 촌지를 받거나 하는 건 시대적 분위기상 힘들어졌지만 어딜가나 지독할 정도로 서로의 시선을 신경쓰고 살림살이로 계급을 나누는 건 여전히 이 동네만한 곳이 없다고 한숨을 쉬더군요. 그러던 중 sns에 공유된 한 기사를 보게 됐습니다. 그곳은 정말 여전했습니다.


관련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308&aid=0000018712&sid1=001



대한민국 어딜 가나 자유롭게 자신의 날개를 펴고 살 수 있는 곳은 드물지만, 목동은 그 중에서도 더욱 힘든 환경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곳 자체가 모두에게 저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경쟁 사회 승자를 향해 쉴새없이 달리길 바라는 꽤 많은 한국의 부모들에게는, 목동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 환경일 것입니다. 최소한의 문화도 지조도 인간성도 자본 앞에선 모두 우습다는 것을 가르치기에도 역시 좋은 환경입니다. 여타 전통적 부자동네와는 또 다른, 뭐랄까요 목동만의 특색이라고나 할까요. 지극히 저의 주관입니다만 제가 느꼈던 것들을 굳이 표현하자면 '강남 따라가고 싶어 유난 떨다 못된 것만 배우고 개성은 사라진 못난 2인자'가 목동의 느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교육환경이 좋은지..저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한국형 엘리트'를 찍어만들어내기엔 더없이 적합한 교육 환경이지만요. 그건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 너무 학교와 동네가 싫어서 홍대 공연장들을 떠돌며 음악을 듣고 인디 빠순이 노릇하며 추억을 만든 건 목동에 고맙네요.

교회에서 악기를 만지던 시간이 더 많았고,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셨던 언니와 저는 어느 동네에 있었어도 분명 음악을 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목동이 아니라 '교육열이 보다 낮은' 동네에서 어린시절 내내 죽 살았다면 지금보다는 모나지 않고 너그러운 영혼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컴플렉스 덩어리 엉망진창 자존감을 극복하기 위한 지금의 몸부림들이 조금은 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요.

물론 이 모든 것을 100% 목동탓이라고만은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갈수록 저 자신과 그것을 거쳐온 수많은 동네 친구들의 30대를 보며 그때 제가 느꼈던 어떤 처절함들이 상당 부분 목동이라는 지역의 기괴함에서 기인한 것임을 매해 더욱 절실하게 느끼곤합니다.

최고가 되지 않으면 차라리 자신을 평범하다 깎아내리며 군중 속에 안전하게 장착해야 그나마 편안했던 목동이라는 곳은 헬조선의 좋지 않은 모습들이 응축된 곳이 아닐까요.





너무 긴 글 죄송합니다. 아이와 관련된 브런치 글들 쭉 읽으면서, 선생님의 이 고민들이 씨앗이 되어 결국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가지로 무지했던 시절에 저희 가정의 단편적 이야기였고, 선생님께서는 결국 최선의 선택을 하실 것이고 그 선택이 아이에게 좋은 것으로만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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