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안 돼 우리 회사를 비롯한 다수 언론이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 자막을 속보로 내보냈습니다. 라이브로 연결된 사고 현장을 보면 누구 하나 구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갑자기 전원 구조 속보에 이어 관련 보도도 이어져 나왔습니다. 내 눈으로 보는 방송 화면과 귀로 듣는 소식이 너무 달라, 당시 현장에서 이 사안을 취재 중인 후배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날 제가 맡은 역할은 라디오 뉴스에서 관련 상황을 전달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원 구조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전원 구조 보도가 오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괴로웠습니다. 세월호가 화면에서 사라지면서 바닷속으로 잠드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잠시나마 오보를 믿었던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했습니다.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일하면서 그때처럼 부끄러웠던 순간은 처음이었습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그날의 기억. 전원 구조 오보 이후에도 정부 대책 등을 비판하는 보도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기자라는 이름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얼마 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세월호가 점점 잊혀 갈 때쯤, 팽목항에 중계차를 대고 현장 소식을 전하는 매체가 있었습니다. JTBC였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팽목항을 지키며 현장 소식을 전해주던 기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현장을 지킨 시간은 200일, JTBC가 세월호 소식을 전한 건 500일이 넘었습니다.
누군가는 '잊혀질 권리'를 말하며, 잊고 싶었고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다수의 언론이 더 이상 보도하지 않으며 침묵했던 그 시간에도
JTBC는 팽목항을 지켰습니다. 신생 언론이었지만, 손석희 사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아닌가 싶습니다.
#손석희
20년 전, 모스크바에서 MBC 통신원을 하면서 시선집중에서 현지 소식을 전했습니다.
방송 전날 작가 분들이 질문지를 보내고, 당일 전화 연결을 할 때 질문지와 전혀 다른 질문을 하는 진행자를 보면서 많이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일반인이 생방송으로 소식을 전한다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울은 이른 새벽이지만 모스크바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졸린 눈을 비비며 원고를 붙잡고 전화기 앞에서 연결을 기다리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한번, 두 번 방송을 하다가 세 번째 방송 때인가, 모스크바의 한 뮤지컬 극장에서 대규모 인질극 사태가 벌어졌고, 당시 상황은 CNN이나 AP보다 러시아 현지 언론 보도 소식이 더 빨랐습니다. 그때 며칠 동안 시선집중을 전화로 연결하면서 얻은 작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손석희 진행자와 방송할 땐 질문지가 필요 없구나. 팩트 체크하고 사실관계만 바로 잡아
머릿속에 넣어두면, 진행자가 궁금한 것 대로 그때그때 대답하는 게 훨씬 안전하다.'
방송 중 머릿속으로 '엇... 3번 질문을 1번으로 하심 어떡해요'라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나름의 작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방송 중엔 무음으로 현지 방송을 틀어놓고 사망자, 부상자 속보가 나오면, 방금 들어온 소식으로 숫자를 업데이트 해 전달했던 기억도 납니다.
몇 년 후 러시아 전문 기자를 꿈꾸고 한국에 왔을 때 <100분 토론> 시민 논객을 했고, 생방송 직후 늦은 시간 호프집 뒤풀이 자리에서 손석희 진행자를 처음 대면했습니다.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모스크바 뮤지컬 극장에서 대규모 인질극 사태가 벌어졌을 때
현장에서 소식을 전하던 아무개입니다."
손석희 진행자는 그 사건이 기억난다면서, 그런데 왜 저보고 한국에 와있냐고 물었습니다.
"아, 예. 저는 러시아를 사랑하는 사람인데, 하도 특파원들이 기사를 막 쓰고, 특파원이 오보를 내도
누구 하나오보 대응하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기자 시험 봐서 전문 기자를 해보려고요."
더 솔직히 말하면, 러시아 특파원이 꿈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소위 언론고시를 준비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특파원은 아무나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사내 정치도 잘해야 하며, 실력도 실력이지만 여러 가지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것을..
얼마 후 시선집중에서 막내작가를 뽑게 됐는데 손석희 진행자와 100분 토론 이영배 피디가 '시민논객
중에 기회를 주는 게 어떻겠느냐'며 의견을 모았고, 두 분이 공통적으로 지목한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렇게 라디오 작가가 됐습니다. 작가가 되면서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아나운서국 국장급이셨기 때문에 모두 "국장님"이라고 불렀고, 저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20년간 호칭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진행자님에서 국장님, 교수님, 사장님, 그리고 대표님.
만으로 15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하고 있지만 <선배>라는 호칭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가끔 저보다 한 참 어린 JTBC 기자들이 "손 선배..." 어쩌고 할 때, "아무리 격이 없어도
사장이신데 선배가 뭐냐"는 꼰대 같은 소릴 했더니 "후배 기자들에게 모두 선배라고 부르라고 하셨다"는 답을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한편으론 <선배>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호칭이란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니 더 의미부여는 안 했습니다.
정신없이 몇 년이 흘렀습니다.
나는 내 일을 하느라 바빴고, 출입처 기사 외엔 다른 기사를 잘 검색해서 보지 않는 성격 탓에 손 대표께서 시선집중 출연했고 곧 출국하신다는 기사를 뒤늦게 접했습니다. 고민이 됐습니다. 곧 출국이신데, 너무 늦게 인사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출국 D-1일, 갑자기 연락을 드렸습니다.
"출국 소식을 듣고 인사를 안 드리면 후회될 것 같아서요."
지금까지 100분 토론 마지막 진행이나 시선집중 마지막 방송 같이 항상 그분이 떠나는
마지막 자리엔 인사를 갔던 터라, 순회특파원으로 출국하시는데 인사를 안 드리면 마음에
남을 것 같았습니다. 댁 근처 카페에서 잠시 뵀습니다.
"아주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번거롭게 여기까지 오냐" 말씀하셨지만, 그래야 제 마음이 편했습니다.
<장면들>을 꺼내 사인을 해주셨고, 세월호와 국정농단 상황들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장면들>과 마주하게 되면서, 글을 읽어나가며 울컥하고 가슴이 먹먹했던 <장면들>이 있습니다.
흔히 나비효과라고 말하죠. 이 책에 등장하는 나비효과 중 국정농단 사태의 시작은 세월호 참사였고, 국정농단 당시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피부과 시술을 받는 시간이 '세월호 7시간'과 연결되는 상황들. 더 멀게는 2007년 이명박 대선 후보와 동업자였던 에리카 김이 <시선집중>과 전화 연결을 한 이후 이명박 당선인, 이명박 대통령이 집요하게 MBC에서 손석희 진행자를 몰아내려 했던 얘기들. 2012년 박근혜 당 대표와 인터뷰를 한 뒤 후폭풍...
"그래서 그랬구나."
<장면들>을 통해 묵직한 과제를 하나 받은 느낌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언론인으로서 '어젠다 키핑'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 천직
'뼛속까지 기자다, 천직이 기자다'라는 말을 주변에서 자주 듣습니다.
저도 기자가 천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기자만큼 사람 만나기 좋은 직업이 없습니다. 요즘 들어 문득 언론사 준비생 시절 2년 꼬박 백수로 지냈던 시간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정말 쉽게 합격했다면, 한 번에 기자 시험을 붙었다면 아마 저는 지금쯤 기자가 아닌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기자라는 직업이 힘들고, 쉽지 않은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으니까 일하고 견디고 버티지, 누가 시킨다고 이렇게 일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검찰을 처음 출입했고, 문재인 정부 들어 아침 뉴스 진행 PD 잠깐 다녀온 것을 빼면 4년 동안 법조기자를 하고 있습니다. 한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느끼는 게 참 많습니다. 먼 훗날 언젠가 기자로 은퇴하면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 출입처는 서초동이 될 것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서초동에서 일했던 시간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됩니다. 서초동이 여의도처럼 바뀐 상황에서 기자들도 플레이어가 되어서 마치 여, 야 후보 지지선언을 하듯 특정 세력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이런 상황들을 지켜보며 일하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국정농단 이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나 싶은데 내가 서있는 자리에선 사회적 혼란을 더 가중시키는 일들만 벌어졌습니다. 언제부턴가 생각이 많이 복잡했고, 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어느 날 갑자기 툭 사표를 던지고, 기자를 그만두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멈췄습니다. 생각을 멈췄습니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적어도 나 스스로 양심에 부끄럽지 않다면 상황을 피하지 말자고.
주말엔 학생들을 만납니다. 저널리즘 스쿨에서 미래에 기자를 꿈꾸는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학생과 수업을 준비하면서 '처음 마음'을 많이 돌아보게 됩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꿈꿨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 지금 학생들이 하고 있는 고민들을 함께 나누다 보면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의 길은 열리는 것 같아 숨통 트이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사건을 보지 말고 사람을 보세요."
사건만 쫓다 보면 놓치는 것들이 있는데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조각 퍼즐이 맞춰지듯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한 학기 강의를 맡으면서 '우리 반 학생들이 내 기사를 모니터하고 할 텐데' 생각하며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더 열심히 취재도 하고, 더 성실하게 회사 일도 했습니다.
올해는 회사에서 맡은 자리도 있고, 코로나 상황도 있고 해서 비대면 수업으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12월 종강을 앞두고 처음으로 대면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신촌 기차역에 내려 강의실로 걸어가는데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았습니다. 2022학년도 수시모집 논술 시험이 있는 날이었던 겁니다. 롱 패딩을 입고 고사장으로 향하는 학생과, 두 손 꼭 모아 기도하는 엄마, 쿨 한 척 자녀의 등을 두드려주는 아빠의 모습에선 묘한 감정선이 느껴졌습니다.
강의실에 도착했는데, 곱게 화장하고 앉아있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잠시 후 수업이 시작되는데요, 다른 강의실로 자리 옮겨주시죠."
자리에 앉아있던 학생은 안절부절못하며 일어나더니 조용히 말합니다.
"선생님, 저 OOO입니다. 일찍 와서 기다렸어요."
아...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반년 가까이 줌 수업으로 만나고, 심지어 이 학생은 오프라인에서 만났던 우리 반 학생인데 내가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서로 한 참을 웃고 앉아서 수업 준비를 하는데, 한 명 한 명 강의실로 들어왔습니다. 대면 수업은 어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날이라 수업을 마치고 다른 층 세미나실에서 학생 한 명씩 개인 면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업을 마치면 조교와 둘이 점심을 먹고 집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면담을 마치고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학생들이 집에 안 가고 앉아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 왜 집에 안 가고 남아있어요. 어서들 집에 가세요."
"선생님. 저희 집에 못 가요.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반 조교가 케이크를 꺼내더니 촛불을 켜고, 학생들이 빼곡하게 적은 롤링페이퍼를 전달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선생님, 구글에서 선생님 사진 검색해서 케이크 주문할 때 그 사진대로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MBC 마이크 꼭 넣어달라고 했고요.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감사드려요."
속으로 '아... 학생들 앞에서 울면 안 되는데. 울면 안 되는데...' 하는 순간 눈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수업 중간에 이미 언론사에 합격해서 수습기자를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부터, 최근 방송사 최종 면접에서 아쉽게 탈락한 친구들까지.. 우리 반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손 글씨로 정성스레 마음을 담아 전해준 그 편지에 눈물이 안 날 수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모를 겁니다. 학생들이 한 명 한 명씩 언론사에 합격해서 나갈 때면, 네이버에서 기자 이름 검색해 '구독'을 꾸~욱 누르고, 항상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 지구 끝에서도
2008년 4월, 러시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우주인 탄생의 현장을 취재하던 날.
저는 그날 <시선집중> 전화 연결이예정되어있었습니다.
지도에도 정확한 표시가 안 되어있다는 바이코누르 답게,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숙소에서 시선집중 전화 연결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 안테나가 꺼지더니 휴대폰이 먹통이 된 겁니다. 숙소에 유선전화도 없고, 랜 선도 속도가 느려 기사 송고도 간신히 하던 상황인데, 서울에선 얼마나 놀랐을까 싶고, 현장에 있던 저도 막막했습니다.
전화연결 10분 전, 여전히 휴대전화는 먹통이었습니다.
서울에선 대체할 기자를 섭외한 것도 아닐 텐데 어떡하나 싶었습니다.
9분 전, 8분 전, 7분 전...
거의 방송을 포기하던 상황!
그런데 그때 갑자기 휴대전화 신호음이 잡히더니 벨이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여기 서울인데요!"
시선집중 작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시름 놓였습니다.
그날 방송은 무사히 마쳤고, 귀국 후 시선집중 작가님들을 통해 당시 스튜디오 상황을
전해 들었습니다. 작가들은 출연자 전화 연결이 안 된다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진행자는
걱정을 전혀 안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걘 지구 끝에 가서도 살아남아 연락할 애야. 어떻게든 방송 전엔 연결될 테니 걱정하지 마.”